주일예배

혈루증 여인을 치유하시는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5-16 14:23
Views
698


누구나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은 빨리 미국생활에 정착되기를 원합니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분들은 어떻게 하든지 돈을 많이 벌기 원합니다. 건강이 좋지 않은 분들은 빨리 육신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런 소원이 때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그 목표를 이루어 보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봅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장애물이 나타나면서 좌절하기도 합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밀려들어 옵니다.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질병은 인류의 죄가 가져온 불행이며 고통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질병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의학이 발전했지만 암, 치매에서 고혈압, 당뇨에 이르기까지 아직 제대로 정복하지 못한 질병들이 많습니다. 우리들도 지난 일년 이상 COVID-19의 위협 속에 살아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질병을 극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본문을 보니 온갖 역경을 헤치고 믿음으로 승리한 한 여인이 소개 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이 어떻게 죽음의 권세를 극복하고 치유되었을까요? 어떻게 믿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믿음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예수님은 그 여인을 어떻게 평가하셨습니까? 함께 살펴보면서 이 자리에 함께 한 성도들도 그 여인처럼 믿음으로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인생의 문제들이 해결되고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주님의 증인으로 쓰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있던 군대귀신 들린 청년을 온전케 하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가버나움 지역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그가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또 수많은 무리가 모여듭니다. 예수님께서 해변에 서 계시는 동안 회당장 야이로가 찾아와서 예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간청합니다. 자기 어린 딸이 심한 병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낫게 해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청을 받아들여 그와 함께 길을 나섭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며 뒤따라갑니다. 혈루증 걸린 여인의 치유 사건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사건 중간에 샌드위치 같이 끼어 있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는 과정에 여인의 존재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 주에 살펴보기로 합니다.


 


여인의 등장


본문은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을 향하여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을 다룹니다. power story의 특징은 문제의 정도가 아주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를 지날 때 제자들이 만난 바람은 그들 생애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막강한 power를 가진 광풍이었습니다. 거라사 인의 지방에서 청년을 사로잡았던 것은 군대 귀신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power를 가진 귀신이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타난 여인은 당시 의술로는 고칠 수 없는 혈루증으로 인해 지난 12년 동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심한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25절부터 27절까지 문법적으로 보면 한 문장입니다. 전부 여덟 개의 동사가 나오는데 그 중의 일곱 개는 분사로 되어 있고 한 개만 본동사입니다. 분사의 역할은 명사나 본 동사를 수식합니다. 즉 마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기 직전까지의 여인의 상황을 7개의 분사를 사용하여 아주 실감나게 설명합니다.   


 


헬라 원문은 ‘한 여인이 있었다’로 시작합니다. 그 여인은  


-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고 있고  (being with a flow of blood for twelve years)


-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having suffered much by many physicians)


- 가진 것을 다 허비했고  (having spent with her everything)


- 아무 효과가 없었고 (having benefited nothing)


- 병세가 더 중하여졌고 (having come worse)


- 예수님에 대하여 들었고 (having heard about Jesus)


- 무리 가운데 있다가 예수님 뒤로 왔고 (having come up behind him in the crowd)


마침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 (She touched his garment)


 


여인은 십이 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했습니다. 용하다는 의사들을 찾아다녔지만 도리어 괴로움만 당할 뿐이었습니다. 1980년 진해에 있을 때 직장동료들과 족구를 하다가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적이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다가 볼이 뒤로 튀는 바람에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볼을 좇아가려고 하니 ‘텅’하면서 굵은 밧줄이 끊어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났습니다. 무슨 줄이 끊어졌나 하여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녁이 되어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는데 신호등에 서기 위하여 왼발로 땅을 딛었는데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자전거와 함께 넘어졌습니다. 다시 일어나려고 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직장 동료가 저를 발견하고 집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아내가 밤새 다리에 찜질을 해주었습니다. 아침 일찍 동네 병원에 가보았더니 아킬레스 근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급히 서울대학 병원에 예약을 하고 입원을 했습니다. 담당 의사가 누워 있는 저에게 오더니 이쪽인가 하면서 왼쪽 아킬레스 근이 끊어진 부분을 만졌습니다. 조금 있으니 정형외과 교수가 레지던트와 인턴들과 함께 회진을 돌다가 제가 있는 병실로 들어왔습니다. 끊어진 아킬레스 근을 가만 내버려두면 근육이 점점 올라간다고 설명을 하면서 상처 난 부위를 또 건드렸습니다. 그날 저는 의사들에게 여러 차례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혈루증 여인은 여러 의사들을 찾아다니다가 가지고 있던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병세가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29절과 34절에서 ‘병’으로 번역된 ‘마스티고스’라는 단어는 ‘치명적인 상처’를 가리킵니다. 여인이 가진 병은 생명을 위협하는 불치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여인은 그저 병든 몸을 이끌고 기약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병자들을 고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여인의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의사들은 못 고쳤으나 예수님은 자기를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여인 앞에 놓인 장애물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근처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 정결법 규정 


‘혈루증’은 피가 계속 흐르는 질병으로, 생리와는 무관합니다. 레위기 15장을 보면 유출병이 있는 사람이 만지는 것마다 그것이 사람이든지 물건이든지 부정해진다고 규정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여인은 지난 12년 동안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못하고 격리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정결법 규정 때문에 야이로처럼 드러내놓고 도움을 청할 수 없었습니다. 여인도 그것을 잘 알았기에 예수님께 자기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신뢰했습니다. 27절과 28절의 개역성경의 번역은 다소 밋밋합니다.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를 직역하면 ‘그의 옷에 손을 대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입니다. 마가는 유대인의 정결법을 어긴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 안에서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과거 율법의 규정을 뛰어넘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 무리와 함께 이동 중이신 예수님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혼자 서 계시다면 다가가서 그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에 둘러싸여 야이로의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다가가려면 무리를 헤치고 가야 합니다. 더구나 뒤에서 예수님에게 다가가 옷깃을 붙잡으려면 예수님보다 더 빨리 가야만 합니다. 건강한 여인이라도 그 상황에서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이 쉽지 않은데, 하물며 십이 년을 하혈을 하던 여인에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가가면서 호흡이 가빠지고 현기증도 났을 겁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자신을 재촉하며 한발씩 나아갔습니다. ‘이 여자가 왜 비집고 들어와’하며 핀잔을 주거나 밀치는 사람들이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주변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여인의 안타까운 사정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힘들어하는 여인을 도와 길을 열어 예수님께로 이끌어주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이 기회를 놓치면 자기는 고침 받을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젖 먹던 힘을 다하여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연약한 여인이 어떻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질 수 있었을까요? 여인이 뒤에서 힘들게 좇아오는 것을 눈치 채신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셨을까요? 분명한 것은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으로 만졌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여인은 오랫동안 자기를 괴롭혔던 불치병에서 놓여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여인을 찾으시는 예수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자 혈루 근원이 곧 마르면서 자신의 병이 나은 줄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 자신도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것을 곧 아셨습니다. 그 능력은 예수님 안에 있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제자들이 무어라 합니까? 선생님! 이렇게 예수님을 에워싸고 따라가는 무리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무리들과 섞여서 걷다보니 손이 닿을 수도 있죠? 무어 그런 것을 가지고 예민하게 반응하십니까? 갈 길이 바쁜데 다른 데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 갑시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예수님과 그 여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합니다. 찬송가 449장 ‘저 장미꽃 위에 이슬’의 후렴 부분을 보면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받아본 사람만이 압니다. 제자들의 말에도 예수님은 가시지 않고 주변을 돌아보시며 자기를 만진 여인을 찾으십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자기의 옷자락을 만져 치유함을 받은 사람이 여인인 것을 이미 알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살짝 만지고 사라지려고 했는데 예수님이 자기를 찾으시는 것을 알았을 때 가슴이 뛰고 두려워 떨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을 감출 수 없다 생각하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엎드려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사실을 낱낱이 고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여인을 찾으셨습니까? 자신의 허락 없이 능력이 나간 것을 책망하기 위함입니까? 부정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져서 예수님이 부정하게 되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 여인이 정결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람들 앞에 세움으로 그 여인은 혈루증으로부터 다 나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여인은 더 이상 부정한 사람 취급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 여인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으로 떳떳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원하셨습니다.  


- 여인이 간증하도록 하기 위해 


주님은 당신의 능력으로 고침 받은 자가 그냥 무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 귀신 들렸다가 온전해진 청년이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간청하였을 때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하시면서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여인에게도 자신의 입으로 사람들 앞에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증언하게 하십니다. 여인은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예수님과 무리 앞에서 자기에게 있던 모든 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혈루증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부정한 사람 취급을 받고 12년 동안 소외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더니 내 병이 즉시로 나았습니다. 내가 전에는 부정했으나 이제는 깨끗해졌습니다. 여인은 감격에 겨워 아마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여인의 간증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었을 것입니다.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진한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 여인을 축복하기 위해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예수님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3:35)라고 말씀하셨는데,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 치유를 받은 행동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인을 ‘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제 그 여인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되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예수님의 능력이 그녀를 낫게 해 주었지만, 그 능력이 발휘되도록 만든 것은 그녀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직접 보시며 말씀하시거나 안수하지 않으셔도, 내가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절대 신뢰를 뜻합니다. 여기서‘구원’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육신의 치료와 영적인 구원입니다. ‘구원하였다’는 완료시제로 온전히 구원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더 이상 예수님이 안수하실 필요도 없음을 암시합니다. 마가복음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는 칭찬을 들은 사람은 이 여인과 맹인 바디매오뿐이었습니다(10:52).


 


“평안히 가라”헬라어 원어를 직역하면 ‘평안 속으로 들어가라’(go into peace)입니다. 지난 12년 동안 그녀의 마음을 지배한 것은 좌절, 체념, 분노,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믿음으로 치유를 받아 하나님의 딸이 된 그녀에게 예수님은 shalom을 선포하십니다. shalom은 단지 마음에 걱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갖게 되는 은혜와 감사가 충만한 상태입니다. 구원 받은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임합니다. 여인이 평강을 누리고 건강해지는 것이 주님의 소원입니다.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에서 ‘병’에는 ‘채찍’이란 뜻도 있습니다. 병은 사탄의 채찍질이었고, 예수님의 병 치유는 사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행위임을 암시합니다. 


 


여인의 치유는 믿음의 손으로 예수님의 옷깃을 만짐으로 시작되었고 예수님의 축복의 말씀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던 무리 중에는 예수님과 가까이 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심지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건드린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손으로 만지는 자는 누구나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가난하고 고독하고 한 많은 인생이 주님의 곁에 가까이 나아감으로 세상이 도저히 줄 수 없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부정한 여인이 깨끗함을 받고 이제는 새사람이 되어 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승리의 드라마는 믿음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여인이 보인 믿음은 복음의 소식을 접하는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 주님을 붙듦으로 주님의 은총을 힘입어야 합니다.  


   


* 우리의 자세


-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혈루증 걸렸던 여인은 예수님의 소식을 들으면서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으로 발을 움직여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믿음으로 손을 움직여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습니다. 믿음으로 입을 움직여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과 같은 실천적인 믿음을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문제를 가지고 계십니까? 나의 인생의 문제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까? 그런데 왜 주저하십니까? 우리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요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강한 자인 사단보다 더 강한 자이시기에 우리를 사단의 속박에서 건져내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주님은 교우들이나 친구들도 모르는 우리의 눈물과 아픔을 아십니다. 복을 주실 준비를 하시고 우리가 주님께 나아오는 것을 기다리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하시며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자기를 만진 여인을 찾기 위하여 주위를 둘러 보셨던 주님께서 지금도 자기를 만진 사람을 보시고, 만나시고 위로하시고 복을 선포하기 위하여 가던 발걸음을 멈추십니다. 우리 생애에 위기가 닥치고 복잡한 상황에 있더라도 주님이 개입하시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문제와 고통을 구체적으로 솔직하게 내놓아야 합니다. 혈루증 걸린 여인이 주님께 나아가 손을 뻗쳐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 같은 믿음의 행동이 필요합니다. 


- 이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예수님 외에 어느 누구도 여인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막상 우리의 아픔이나 필요를 제대로 알거나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피상적인 인사말을 주고받지만 실상은 무관심하게 스쳐지나가기 마련입니다. 사실 우리가 그렇게 스쳐가는 사람들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주변의 형제나 자매에게 신경을 쓰기에는 너무나 바쁘다고 자신을 합리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꺼져가는 등불과 같던 여인을 모른 척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어가는 야이로의 딸에게 가려면 갈 길이 바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여인에게 구원을 선포하시고 평강을 빌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나 무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보았습니다. 낫기를 갈망하는 여인의 안타까움을 보셨습니다. 주님만을 의지하는 여인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깊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여인을 만나주신 예수님이 오늘 우리가 믿고 따르기 원하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본받는다면 이제 우리의 시선도 주위를 향해야 합니다. 말뿐인 사랑의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관심을 보여야 합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이 무리 앞에서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것이 여자가 구원받은 이유라고 말씀하신 것은 믿음의 중요성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복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 다른 조건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모든 대가가 이미 치러졌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깃을 만져서 병이 나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 가족이 되는 보너스까지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몸과 마음을 온전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죄인들의 심령 속에 깊이 들어와 새 삶의 용기와 기쁨을 안겨주고 새로운 감격으로 살게 합니다. 우리 지혜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난제들과 우리 힘으로는 넘어갈 수 없는 장벽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 34:15).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그분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주님이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인과 같이 믿음의 touch down을 통하여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며 큰일을 행하신 주님을 전하는 증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