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신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5-02 15:27
Views
457

살다보면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같이 느껴지는 절박한 상황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가정 문제, 건강 문제, 사업 문제, 인간관계, 비자 문제 등으로 인해 위기감을 가질 때 성도님들은 어떻게 하십니까? 입술로는 주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있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며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위로 길이 열려져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주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를 온전케 하셔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를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5장에는 세 개의 power story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라사 귀신 들린 자 치유(1-20절),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 치유(25-34절),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다시 살린 사건(21-25, 35-43)입니다. 삼주에 걸쳐 한 사건씩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거라사 지방을 방문하셨습니다. 제자 훈련 관점에서 무덤이 있는 해변은 훌륭한 교육 현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그곳에 가셨는지,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이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고 그분을 믿음으로 의지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1-5절)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헬라어 원문에서 주어가 ‘예수님’이 아니라 ‘그들’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거친 파도와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 동편에 도달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 ‘거라사’로 언급된 지방은 당시 갈릴리 바다 동편에 있던 10개의 헬라화된 도시(데가볼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거라사는 오늘날 요르단에 있는 제라쉬에 해당하며, 이 지역은 갈릴리 바라로부터 남동쪽으로 47km 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바다에 빠져 몰살할 수 있겠습니까? 마태는 거라사 대신 ‘가다라’라고 합니다(마 8:28). 분명한 것은 오늘 사건이 갈릴리 바다 동편 해변에서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갑자기 몰아닥친 풍랑을 인하여 겁에 질렸던 제자들이 이제는 또 다른 무서운 상황에 있게 됩니다. 예수님 일행이 그곳에 도착한 때는 아마 한밤중이었을 것입니다. 그 지역은 석회암 동굴이 많아서 밤에 보면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더구나 무덤 사이에서 뛰쳐나온 자가 예수님을 향하여 달려오니 제자들은 기겁을 했을 것입니다. 본문에는 제자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 그저 배 안에서 벌벌 떨고 있었는지 아니면 배에서 내려서 어느 곳에 숨어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몇 시간 전까지 풍랑에 떨었는데 지금은 귀신들린 자 때문에 떨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생애에 그날처럼 공포에 질렸던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곳에 있던 돼지 떼의 존재는 그 지역이 이방인들이 사는 곳임을 알려줍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짐승으로 여겨 키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자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첫째, 그가 사는 곳은 무덤들 사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를 직역하면 ‘그는 무덤들 안에 거처를 갖고 있었다’입니다. 즉‘무덤 사이’는 여러 무덤들 사이의 공간이 아니라, ‘굴로 된 여러 무덤들’을 의미합니다. 그가 ‘돌로 된 동굴 무덤들’에 살았다는 것입니다. 무덤은 부정한 곳이었기에 더러운 귀신들의 이상적 거주지였습니다. 둘째, 어느 누구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힘이 셌던 이유는 그의 속에 있는 ‘군대 귀신’때문입니다. 그가 얼마나 광기를 부렸는지, 자신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릴 정도였습니다. ‘고랑’은 발에 채우는 ‘족쇄’를, ‘쇠사슬’은 몸을 묶는 ‘사슬’을 가리킵니다. 셋째, 그는 늘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기 몸을 해치고 있었습니다. ‘해치고 있었다’에서 ‘있다’가 미완료 형입니다. 일정시간 지속되었던 상황이나 상태를 가리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자가 돌로 자신의 몸을 계속해서 찍고 내리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넷째,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귀신이 축출된 후 이 사람은 제 정신을 차리고 옷을 입습니다. 그가 짐승처럼 살았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거라사 인의 동네에 오신 이유는 더러운 귀신이 들린 자를 멸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를 더러운 귀신에게서 건지기 위함입니다. 마가복음은 인간의 상황을 ‘강한 자’사탄에게 결박돼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인간은 ‘강한 자’사탄보다 ‘더 강한 자’가 와서 사탄을 결박할 때 비로소 자유롭게 됩니다. 예수님이 바로 ‘더 강한 자’로 오셨습니다.


 


귀신과 대면하시는 예수님(6-8절) 


귀신 들린 청년이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절하더니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그가 왜 예수님께 달려왔을까요? 8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자마자 귀신을 향하여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의 존재를 알고 계셨습니다. ‘절하며’에 해당하는 동사는 ‘무릎 꿇고 경배하다’는 뜻인데 귀신 들린 그의 행동은 예수님을 경배한다기보다는 조롱하려는 의도에 가깝습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귀신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임을 알고 있었고, 그분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탄의 권세를 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키실 분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자기가 예수님의 정체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함으로 예수님이 오신 의도를 좌절시키고자 하지만 그런 전략이 예수님께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귀신은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을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자기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간청을 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권세를 멸하며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실 분입니다. 사람이 죄와 어둠의 권세에서 온전히 해방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돼지 떼에게 들어가는 귀신들(9-13절) 


귀신 들린 청년은 어느 것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귀신에 사로잡혀 자신의 이름도 댈 수 없었고, 그저 귀신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채 가정과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야수처럼 소리를 지르며 자기 몸을 찌르며 피투성이가 된 채 처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를 채웠던 고랑과 쇠사슬을 끊고 부술 수는 있었지만 그런 힘을 제공하는 마귀의 올무는 풀 수 없었습니다. 그 청년은 하나님 없이 죽음을 향해 미친 듯이 달음질치는 인생, 죄와 사탄의 종노릇하는 인생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소망 없이 살아가는 그 청년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 찾아 오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그 귀신 들린 자를 어떻게 회복시키는지 보여주기 원하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귀신의 이름을 확인하는 것은 귀신을 제어하기 위한 첫 단계입니다. 자기의 이름을 ‘군대’라고 합니다. ‘군대’로 번역된 헬라어 ‘레기온’은 당시 로마 군대의 편제로서 5000명 내지 6000명으로 구성된 보병 군단입니다. 우리가 듣기에는 그저 평범한 단어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레기온’이라는 말을 들을 때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로마 군대는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요 무적의 군대였기 때문입니다. 청년 안에 있는 귀신이 자신들을 군대로 소개하는 이유는 사탄의 막강한 power로 무장되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사로잡고 있었던 사람에게서 쫓겨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예수님에게 요청합니다. 아마도 자신들이 거주하던 지방을 떠나면 무력화되거나 혹은 자신들이 나온 곳으로 가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기를 허락하십니다.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자 2000마리나 되는 돼지들이 갑자기 미쳐 날뛰면서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빠져 몰사했습니다. 출애굽 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널 때, 그들을 해하려고 홍해로 달려온 애굽 군사들이 바다에 빠져 몰살당했습니다(출 15:4-5). 마찬가지로 영적인 출애굽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때문에 바람과 바다가 잠잠해 진 후 그 바다에 ‘군대’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가 몰살되었습니다. 아무리 악한 세력이 우리 신앙을 뒤흔들더라도, 우리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창조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주민들의 반응(14-17절) 


돼지를 치던 자들이 놀라 도망갑니다. ‘읍내’로 번역된 ‘폴리스’는 영어로 ‘city’인데 성을 의미합니다. ‘여러 마을’은 성 주변에 위치한 마을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동네에 뛰어가서 주민들에게 자기들이 본 것, 즉 귀신 들렸던 자에게 일어난 일, 돼지 떼가 바다로 치달아 몰사한 일 등을 상세하게 전합니다. 주민들도 놀라서 어찌된 일인지 확인하고자 사건 현장에 옵니다. 과연 돼지들은 갈릴리 바다에 다 빠져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곁에 있는 한 청년을 봅니다. 그의 모습은 4-5절에서 묘사된 모습과 전혀 다릅니다. 더 이상 쇠사슬에 매여 있지도 않고, 벗은 몸으로 자신을 해하지도 않고, 옷을 입고 앉아 있습니다. 주민들은 귀신이 떠난 채 평온하게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이 반응은 예수님이 바다의 광풍을 잔잔하게 하셨을 때 심히 두려워했던 제자들의 모습과 같습니다(4:41). 예수님의 신적 권세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은 예수님을 보고 거라사 지방에서 떠나달라고 간청합니다. 1절과 10절에 ‘지방’이 단수형이었는데, 17절에는 ‘지방들’하며 복수형이 사용됩니다. 이는 한 동네만이 아니라 언급된 읍내와 여러 마을에서 온 사람들도 떠나 달라고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들이 그런 간청을 할까요? 첫째, 귀신을 쫓아내고 온전한 정신으로 회복시켜주는 예수님의 신령한 능력이 자기들의 구부러지고 그릇된 부분들을 완전히 바뀔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귀신 들린 자에게 일어난 변화가 자기 자신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사나’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구원으로 인해 생기는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둘째, 그들에게 재산의 손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 사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돈을 사랑하기 시작하고 돈에 집착하면서 추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귀신 들렸던 자에게는 관심이 없고 자기들의 돼지 떼만 안전하다면 만족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에 눌려 감히 손해 배상을 청구하지는 못하지만, 더 이상의 피해를 보고 싶지 않아서 예수님께 떠나가기를 간청합니다. 주민들의 반응을 보면 이적을 보거나 이적에 대하여 듣는 것이 언제나 믿음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청년의 반응(18-20절) 


치유 받은 청년은 자신을 귀신의 억압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신의 인생을 다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있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청을 거절하시고 가족에게 돌아가 그가 체험한 은혜를 전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그가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였을까요? 마가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중에 데가볼리의 한 지역에 오셨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로 4000명을 먹이셨습니다. 그곳은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인데 어떻게 유대인인 예수님께로 몰려들 수 있었습니까? 바로 그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가 경험한 예수를 열심히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도훈련을 제대로 받은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시간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자기를 통하여 하신 일이 너무나 생생하였기에 그것을 강하고 담대하게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내게 있던 귀신들을 전부 쫓아내시고 나를 온전케 하셨습니다. 이제 나는 귀신에게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그는 거라사 지방에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수고한 자가 되었습니다.   


 


돼지 떼 몰사 사건의 의미 


돼지 한 마리의 값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보았습니다. 한국에서 돼지 한 마리가 평균 110kg 쯤 됩니다. 도매가로 한 마리에 55만 원 정도 됩니다. 계산하기 쉽게 돼지 한 마리를 오백 불로 친다면 2000마리면 백만 불이 됩니다. 적지 않은 돈입니다. 거라사 지방에 돼지고기 값이 그날 이후로 폭등하지 않았을 까요? 인간들의 유익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면서 어떻게 주민들의 생계가 걸린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를 일시에 다 죽게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Who shot J.R.?”1980년에 CBS 방송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어 전 세계적으로 3억 5천만 명이 시청한 드라마 Dallas의 선전 문구였습니다. 누가 돼지 떼를 죽였습니까? 예수님이 죽이셨습니까? 아니면 귀신들이 죽였습니까? 돼지 떼의 몰사 사건은 예수님으로부터 돼지 떼에 들어가기를 허락받은 귀신들이 일으킨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귀신들의 목적은 단지 돼지들을 죽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하여 거라사에 하나님의 나라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사탄은 주민들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그 동네서 쫓아내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냥 떠나신 것이 아니라 온전해진 청년을 그 지방에 남겨 두셨습니다. 그 청년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그를 인해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돼지 떼 몰사 사건은 귀신들렸던 자를 위한 주님의 배려와 거라사 인이 가졌던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그릇된 자세와 관련해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귀신들렸던 자를 구원하는 기적이 정말 일어났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이기 위함입니다. 돼지 떼가 몰사함으로 청년은 귀신들이 과연 다 나갔다는 것과 또한 귀신들이 다시는 자기에게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더러운’귀신들의 청을 들어서 돼지 떼에 들어가게 허락하신 것은 더러운 동물로 간주된 돼지가 갖는 이미지에 어울리는 일입니다. 사탄은 사람의 가치나 돼지의 가치를 다르게 보지 않습니다. 사탄은 인간을 실족시켜 얼마든지 돼지 같이 만들어버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주민들이 가진 세속적이고 타락한 가치관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입니다. 짐승처럼 살던 한 불쌍한 청년이 귀신들의 무서운 속박에서 풀려난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주민들은 한 사람의 회복된 영혼보다 돼지 떼의 손실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이제 미친 자는 귀신 들렸던 청년이 아니라 거라사 주민들이 되었습니다.  


 


사탄을 대적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일행이 풍랑을 헤치고 한밤에 거라사 지방에 도착했을 때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 지르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우리를 이런 곳으로 데리고 오셨을까 하며 제자들이 불평하지 않았을 까요? 아무도 제어할 수 없어 포기했던 그 한 사람을 위해 폭풍이 이는 바다를 건너오신 것은 그를 구원하시기 위한 주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마치 99마리의 양을 놔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나서는 목자와 같지 않습니까?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큰일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입니다. 훗날 제자들이 이 사건을 떠올릴 때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오신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하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도 잃어버린 한 영혼이라도 불쌍히 여기며 사랑으로 다가가시는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 예수님 따르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주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신들의 우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을 때에 우리 삶의 터전이나 우리가 의지하는 것을 일시에 무너지게 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돼지 떼로부터 인연을 끊게 하셔서 귀신들렸던 청년처럼 치유를 받고 온전한 정신으로 주님 앞에 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들이 귀신들로 가득 찬 돼지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때로 낭떠러지로 몰아내십니다. 우리의 돼지 떼가 벼랑에서 추락하는 모습을 보며 아쉬워합니다. 때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이 우리들의 기준에서 보면 가혹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유를 무시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생육하고 번성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늘의 신려완 것과 이 땅의 기름진 것으로 채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도 거라사 주민들처럼 주님을 밀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자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혹시 주님을 따르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속히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성하게 거둘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탄의 권세에 억눌린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를 풍랑으로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또한 거라사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을 동네에서 나가달라고 하여 거라사 지방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못하게 방해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귀신을 내쫓으신 것처럼 이방인 지역인 거라사에서도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본문의 핵심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영혼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있습니다. 귀신에 사로 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청년이 예수님 때문에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 가족에게 예수님을 증언했을 뿐만 아니라 데가볼리 전 지역을 다니며 예수님이 자기를 치유하신 역사를 전파함으로 예수님이 맡기신 사명을 훌륭하게 감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마땅히 우리 인생을 주님께 드려야 할 뿐 아니라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명을 감당하는 가운데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 삶에 역사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나가면서 


군대귀신에 사로잡혔던 청년의 구원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사탄 나라의 세력과 저항을 굴복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폭풍과 파도를 잔잔케 하시고 무서워 떨던 제자들을 풍랑에서 건지신 주님, 오랫동안 군대 귀신에 사로잡혀 소망이 없던 청년을 온전케 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신 주님,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신 주님이 바로 우리가 믿고 섬기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때로 현실에서 부딪치는 문제나 고난을 인하여 낙심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어떤 풍랑 가운데 있든지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회복시켜서 주님의 제자들로 삼기 원하십니다. 귀신 들린 청년이 온전하게 회복된 것을 계기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헌신의 기회를 가졌던 것처럼 성도들이 주님의 증인이 되어 자기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임하였는지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하고 보여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