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는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4-25 14:16
Views
562

제가 보스턴에 있을 때 같이 공부하던 대학원생들과 바다낚시를 갔습니다. 출발 때부터 파도가 제법 쳤습니다. 배를 타고 나가면서 저마다 자기는 멀미를 하지 않는다고 장담을 했습니다. 어떤 선배는 해군장교로 4년 복무한 것을 내세우며 거친 파도에도 끄떡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친구는 바다낚시를 여러 번 갔었기에 이 정도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친구는 멀미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다고 자랑했습니다. 저는 배를 타고 바다낚시를 가본 적이 없기에 별로 할 말이 없었습니다. 배에 탄 다른 그룹들은 배 가운데 앉아서 낚시하는 곳으로 선장이 인도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우리 일행은 경치를 즐긴다고 제일 심하게 움직이는 뱃머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엔진 소리가 작아지면서 스피커로 낚시를 시작하라는 선장의 안내 방송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우리 일행에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고기를 잡아야 할 시간에 멀미를 하느라 저마다 배의 난간이나 기둥을 붙잡고 어떤 친구는 화장실에 가서 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도 속에 있는 것을 다 쏟아놓는데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돌아오는 배에서 우리 일행은 누워있거나 맥없이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그룹들은 한 사람도 전혀 멀미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얼마나 창피하였는지요? 무려 열 명이나 갔으면서도 한 마리도 못 잡고 죄다 비실비실하는 꼴이 안 돼 보였든지 자기들이 잡은 고기 몇 마리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날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우리가 어리석게 행동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가복음 1장부터 4장 34절까지 선생님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이제 4장 35절부터 6장까지 일련의 power story를 통하여 마가는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집중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수천마리의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치시고 심지어 죽은 야이로의 딸까지 살리십니다. 본문을 보니 제자들이 풍랑에 시달립니다. 뱃사람 출신인 제자들조차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광풍이 몰아칩니다. 제자들이 멀미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죽음의 공포를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잠에서 깨신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나중에 그때 있던 일을 회상했다면 어떠한 생각을 했겠습니까? 믿음 없는 행동을 한 자기들의 모습이 평강 가운데 계시던 예수님의 모습과 비교되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저편으로 가자고 하여 그 길을 떠났는데 왜 그런 풍랑이 일어났을까요? 그런 풍랑을 만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인생의 여정에도 크고 작은 풍랑이 수시로 일어납니다. 그 풍랑이 부부 관계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고, 돈 때문에 오는 것일 수도 있고, 건강 때문에 오는 것일 수도 있고 욕심 때문에 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원망이나 분노를 터뜨리십니까? 제자들과 같이 당황하여 예수님을 깨우십니까? 본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려는 마가의 의도를 반영합니다. 예수님은 자연에 대해서도 명령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살아가노라면 풍랑으로 인하여 우리가 타고 가는 인생의 배가 흔들릴 수 있고 물이 샐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그 해결책을 찾으며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저편으로 가자는 예수님(35-36절)


본문은 power story의 첫 번째 에피소드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낮에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배에 오른 채 모여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별도로 그 비유의 의미를 설명해주셨습니다. 해가 저물어 저녁이 되자 제자들에게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십니다. 5:1에 의하면, ‘저편’은 갈릴리 바다 동편에 있는 ‘거라사’지역을 가리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에 모신 채로 저편을 향하여 노를 저어갑니다. 그때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일부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님 일행이 탄 배를 따라갑니다. 아마 그들은 나중에 이 사건의 목격자들이 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함께 가는 여정 그 자체가 제자훈련 과정입니다. 저편에서도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것이 있고 저편으로 가는 도중에도 가르치실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건들을 훈련교재로 사용하십니다.   


 


제자들의 구조 요청(37-38절) 


얼마쯤 노를 저어 가는데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며 파도가 치기 시작합니다. 갈릴리 바다는 해면에서 200미터 아래에 있고 그 북쪽으로 약 60km 지점에는 해발 3000m의 헤르몬 산이 있습니다. 그 산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공기가 갈릴리 바다의 따뜻한 공기와 충돌하면서 큰 파도를 일으키곤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일어난 광풍은 갈릴리 바다에서 오랫동안 어부로 살아온 제자들조차 무서워 할 정도였습니다. 파도가 배 안에 덮쳐 들어오므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찼습니다. 제자들은 풍랑 가운데 노를 젓고 배에 들어온 물을 퍼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이러다가 배가 침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었을 것입니다. 바다에 풍랑이 이는 것처럼 그들 마음에도 풍랑이 일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낮에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에 관한 메시지를 들었을 때, 당장이라도 천국 시민이 된 것같이 자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풍랑에 시달리면서 낮에 받은 은혜를 죄다 쏟아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배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물’은 ‘배 뒤편’을 가리키는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마가는 ‘베개를 베고’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예수님이 주무시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여기서 ‘주무신다’는 동사가 5:39에서 야이로의 죽은 딸의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데, 죽은 사람처럼 아주 깊이 잠든 것을 의미합니다. 물에 빠져 죽느냐 마느냐 하는 위기의 상황에서도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사람을 낚는 어부를 삼겠다고 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왔는데 이거 너무 하신 것 아닌가, 우리들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안전도 보장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 혼자 주무시다니, 과연 이런 분에게 우리 인생을 믿고 맡길 수 있을까 등의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외칩니다. 마가복음 4장까지 주로 선생님으로서의 역할이 부각되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도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죽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폴루미’는 단순한 죽음을 넘어서 ‘완전히 파괴되어 없어지다, 멸망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영원한 죽음, 파멸 등으로 뜻합니다. 요 3:16에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할 것이라고 말하는 데 사용되었고, 막 8:35에서도 복음을 위해 살지 않는 자들의 영원한 멸망을 설명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단지 육체의 죽음뿐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면 멸망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말에는 곤경에 빠진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는 주님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이 섞여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적을 행하여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해달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칫하면 배가 가라앉을지 모르는데 예수님도 이 상황에서 무엇인가 해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물이 배로 들이닥치는 상황에서 공포에 질려 안절부절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그 와중에도 편히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대조가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의지하시는데, 제자들은 상황에 압도되어 이 땅에 오신 구원자와 한 배에 있으면서도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탓하시는 예수님(39-41절)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자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Be still, be silenced)”명령하십니다. 현재 명령형이니 계속해서 잠잠하고 계속해서 고요한 상태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집니다. ‘꾸짖다’라는 뜻의 헬라어는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실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하는 귀신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꾸짖으셨는데, 그때도 ‘잠잠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1:25). 눅 4:39에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실 때 열병을 꾸짖으실 때 같은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고대에 바다는 귀신들의 처소, 혼돈과 제어하지 힘든 세력들의 집합소처럼 여겨졌습니다(계 13:1). 예수님이 바다의 광풍을 제압하신 것은 그분이 모든 흑암과 죽음의 세력을 다스리시는 신적 권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이 말씀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위기에서 그들의 믿음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다 보니 광풍에 흔들리던 배와 같이 그들이 심령은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배에 물이 차듯이 그들의 심령은 불안과 염려로 채워졌습니다. 제자들은 전에 귀신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쫓겨나가는 것을 보았지만 현재의 상황을 함께 연결시키지 못합니다. 제자들이 처음에는 풍랑 때문에 무서워했는데, 이제는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큰 두려움을 가집니다. 마가복음에서 믿음과 두려움은 긴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5:36)고 말씀하셨고, 한밤중에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6:50)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생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까지도 순종하게 하실 수 있는 분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워했습니다. megachurch 하면 아주 큰 교회를 가리킵니다. 본문에는 ‘mega' 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오는데, 세 번 모두 아주 크거나 강한 정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에는 각기 다르게 번역되어 같은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한 저자의 의도를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시자 ‘크고 심한’바람이 ‘크고 심한’잔잔함으로 바뀌었고, 그 결과 제자들이 ‘크고 심한’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하면서 사건의 긴장감과 더불어 예수님의 크신 능력을 강조합니다.  


 


바람과 바다의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인지를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보여 준 사건입니다. 이때 제자들이 던지는 질문이 ‘그가 누구인가’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묻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은 선생님입니다. 물론 그저 가르치기만 하는 평범한 선생님이 아니라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죄를 사하는 능력 있는 선생님입니다. 제자들은 바다 위에서 행하신 능력에 놀라면서 예수님이 선생님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에도 풍랑은 있습니다


예수님이 타신 배가 갑작스럽게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풍랑을 만났습니다. 주님과 함께 항해할지라도 위기는 다양한 방법으로 예상치 않게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자가 내 곁을 떠나기도 하고, 자녀에게 어려움이 생기기도 하고, 건강을 상하거나 사업에 어려움을 겪거나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 풍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인하여 평강을 잃고 불안과 초조감에 싸여 우왕좌왕 하거나 다른 사람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깊은 고민에 빠지거나 좌절하기도 합니다. 때로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저 주무시는 분으로, 자기에게 무관심한 분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잠드셨기 때문에 갈릴리 바다에 광풍이 분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오히려 광풍을 통하여 제자들의 믿음을 달아보셨습니다. 풍랑을 만나자 다급하여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을 깨우던 제자들처럼 우리 인생의 여정에 풍랑을 만날 때 소란을 피우며 호들갑을 떨고 난 후 비로소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고난을 통하여 주님을 경험하게 된다면 우리는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성도님들은 지금 어떤 풍랑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그 풍랑이 자신을 완전히 압도할 만한 강한 것입니까? 그 풍랑 속에서 현재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원망합니까? 주님은 풍랑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확신하였기에 평안히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광풍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어떤 풍랑도 잠잠케 하실 수 있습니다. 주무시는 주님과 함께 풍랑 가운데 있는 것이 주님이 계시지 않는 무풍지대에 있는 것보다 더 안전합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8-10). 주님은 언제나 믿는 자들과 함께 계십니다. 임마누엘의 주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제자들이 경험한 주님의 능력을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까?


-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운 것은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 이적을 기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배에서 물을 퍼내든, 노를 젓든 무엇인가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풍랑이 잔잔하게 된 후에 보여준 제자들의 반응은 예수님에게 기적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풍랑을 인하여 제자들이 가졌던 육신적인 무서움이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경험한 후에 큰 두려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강한 자’로 군림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강한 자’로 오셔서 말씀의 권능으로 사탄을 능히 제압하시고 그의 밑에서 신음하고 고통을 받던 자들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바람과 바다는 제자들에게는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의 권능으로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면서 ‘더 크고 두려운’존재가 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던 바람과 바다조차 예수님 앞에 굴복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모실 때 우리를 두렵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12:5). 예수님의 능력 있는 말씀 한 마디에 모든 mess-up 된 상황이 완전하게 정리가 됩니다. 자연의 힘을 압도하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은 예수님이 평범한 선생님 이상의 인물인 것을 보여줍니다. 1장부터 지금까지 나타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가르치는 권세, 병 고치는 권세, 귀신 쫓는 권세, 죄사하는 권세, 그리고 자연도 제어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타고 계셨던 배는 큰 유람선이나 어선이 아니었습니다. 1986년 갈릴리 바다에서 주후 1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배 선체가 발견됐습니다. 이 배의 크기는 길이 약 8미터, 폭 2.3미터 높이 1.4미터였습니다. 그 정도로 작은 배가 풍랑에 흔들리고 물이 가득 차는 상황에서 어떻게 예수님께서 주무실 수 있었을까요? 혹시 자는 척 하시면서 손가락 사이로 제자들의 모습을 살짝 보신 것은 아닐까요? 성경은 예수님은 분명히 주무셨다고 합니다.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풍랑 가운데도 예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이 있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궁극적인 힘은 예수님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는 주인임을 믿는 데서 나옵니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예수님은 제자들이 풍랑 앞에서 무서워한 것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헤매는 동안에도 예수님은 여전히 배에 계셨으며 그분의 능력 또한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저편으로 가자고 제안하신 분이 주님이라면 저편으로 인도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다보니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 데도 무서워 떨었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나 문제 자체가 아니라 바로 믿음 없는, 믿음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power story에서 예수님은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혈루증 걸린 여인은 본인의 믿음으로 질병이 낫습니다(5:34). 야이로의 딸은 그 아버지의 믿음으로 (5:36) 죽음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이 믿음이 없음으로 예수님의 책망을 받습니다(6:6).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시고 풍랑 가운데서도 평강을 누리시는 주님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참된 믿음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는 염려와 걱정을 물리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가 없을 때는 두려움이 우리의 마음을 대신 채웁니다. 반면에 주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만 바라보면 문제가 점점 더 커 보이고 나중에는 그 문제에 눌리게 됩니다. 고난도 우리의 삶의 일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 조금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에도 종종 광풍이 불고 파도가 칩니다. 때로 그 풍랑이 우리가 감당하기에 벅차다고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인생의 항해에 언제나 동행하십니다. 주님께 부르짖으면 주님이 응답하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 한 마디에 바람과 바다도 잔잔해졌습니다. “저희가 이리 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 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 127:27-30). 우리의 부족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께 나아갈 때 위로를 주시고 환난 가운데 피할 길을 마련해주십니다.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시험을 이길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질 때 크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 주님의 크고 놀라운 능력을 경험합니다. 


 


나가면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는데 왜 그들은 두려워했을까 생각하십니까?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믿는다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제자들과 같은 행동을 할 때가 많습니다. 염려하고 불평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풍랑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며 주무셨던 주님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오십니다. 능치 못함이 없으신 주님을 붙잡으세요. 그럴 때 주님이 베푸시는 사랑과 능력을 인하여 인생의 풍랑이 잠잠해지고 주님이 누리셨던 평강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경험하였으면 이제부터 주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남은 생을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풍랑으로 인해  불안해하며 방황하는 이웃에게 참 안식처가 되시는 주님을 담대히 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신은 하늘에 쌓는 영원을 위한 투자가 될 것이요, 우리가 거두는 열매는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칭찬을 듣고 상급을 받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고 나아감으로 역경이 순경으로 바뀌는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