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비유로 가르치시는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4-1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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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0

사무엘하 11장에 다윗이 밧세바와의 간음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가 임신한 것을 감추려다가 실패를 하니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 죽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셨습니다. 왕이여 들으시오 한 성에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유했고 또 한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부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았고, 가난한 자는 작은 암양새끼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암양 새끼는 그 집의 자식들과 같이 함께 먹고 자며 딸같이 귀여움을 독차지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에게 손님이 왔는데 자기 양이나 소를 잡는 것이 아까워 가난한 자의 양 새끼를 빼앗아 그것으로 자기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다윗이 크게 분노하며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하고 양 새끼 값의 네 배를 물어 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나단이 다윗을 향하여 외칩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삼하 12:7).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네가 연약할 때 내가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 부족함이 없게 하였는데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악을 행하였구나. 너의 충성된 부하를 암몬 사람의 손에 죽게 하고 그의 처를 빼앗아 네 처로 삼았으니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나단 선지자의 말이 다윗의 심령에 비수와 같이 꽂혔습니다. 다윗이 금식하며 철저히 회개하면서 쓴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다윗이 나단의 비유를 처음 들었을 때 그저 남의 이야기 인줄 알고 흥분했다가 그 비유가 자기를 두고 한 것이고 그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를 경고하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비유는 누구나 알고 있는 일상적인 소재를 이용해 다른 것을 이해하도록 돕는 기법입니다. 선택된 소재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를 알기만 하면 전달자의 의도를 더 분명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연관되는지 알지 못하면 비유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요 감추어진 비밀이 됩니다. 여기에 비유의 묘미가 있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신 것이 소개됩니다.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도전 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어느 누구도 들을 귀가 없었기에 그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요? 말씀하신 비유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은 비유의 의미를 바로 알고 들을 귀 있는 자들이 되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행함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한 열매를 거두기를 바랍니다.


 


배 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1-2절)  


예수님께서 ‘다시’바닷가로 가셨습니다. 바닷가는 가르치기에 좋은 장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고 온 사람들이 흩어지기 쉬운 장소이고 그들이 흩어지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빨리 전파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서 무리가 많음을 표현할 때 대부분 ‘많다’을 뜻하는 ‘폴뤼스’를 사용하지만 1절에서는 최상급이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큰 무리’를 직역하면 ‘가장 많은 군중’이 됩니다. 예수님이 천국 비유를 가르치실 때 가장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다에 띠운 배 위에 오르셔서 사람들과 마주 앉으셔서 가르치십니다. 비유는 헬라어로 ‘파라볼레’인데 사물을 ‘나란히 놓다’, ‘옆에 놓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어떤 사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사실을 곁에 놓고 비교해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가르치시니”는 미완료시제로 지속적인 동작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비유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계속 가르치십니다.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10-13절) 


예수님께서 비유를 마치시며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는데,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들으라”하시는 것을 보면 누구나 듣기를 원하시는 것 같은데 아무도 그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예수님이 헛수고를 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비유의 말씀을 마치신 후 대부분의 무리는 비유의 의미를 모른 채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돌아가지 않고 예수님 주변에 남아 있었습니다. 열 두 제자를 포함하여 평소에 예수님을 가까이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비유의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혼자 계시기를 기다렸다가 그 의미를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밀’로 번역된 무스테리온은 영어 단어 mystery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비밀’은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아주 난해한 수수께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의미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비유를 듣고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너희”와 “외인”으로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너희’로 구분된 사람들은 비유의 의미를 꼭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나아가 물었을 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인용한 사 6:9-10은 읽기에 따라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사야를 유다 백성에게 보내시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실 리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유다 백성의 완악함을 풍자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굳어져서 더 이상 계시의 말씀,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말씀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비밀을 외인들, 즉 믿음으로 받지 않는 이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들의 심령이 이미 굳어져 있어 복음을 이해하고 돌이키지 않음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외인’이란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은 죄사함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2:10),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2:17),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3: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는 매 장마다 죄사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외인”으로 불리는 그룹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기에 죄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깨달음’과 ‘돌이킴’과 ‘죄 사함’이 일어나지 않기에 그들은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자들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려는 자세를 가진 자들은 “너희”로 불립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요 예수님의 참된 가족이요,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너희’가 됩니다.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라는 말씀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의미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 다른 모든 비유의 의미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의미(3-9, 14-20절)  


마가복음에는 다섯 개의 비유가 등장하는데 그중 3개(씨 뿌리는 자 비유, 스스로 자라는 씨 비유, 겨자씨 비유)가 4장에 나옵니다. 비유가 시작되는 3절과 끝나는 9절은 ‘들으라’는 2인칭 현재 명령형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계속 들으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들어야 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중요한 교훈임을 암시합니다. ‘들으라’는 표현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매일 암송하는 신 6:4-9에서 ‘들으라 이스라엘’로 시작되는 표현과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자로서의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경청과 순종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비유에서 네 가지 밭을 언급하십니다. 길 가, 흙이 얇은 돌밭, 가시떨기 밭, 그리고 좋은 밭입니다. 밭들은 열매 맺지 못한 밭과 열매 맺은 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팔레스타인의 농경 생활을 배경으로 합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씨를 뿌리고 나서 경작을 합니다. 밭을 갈고 나서 씨를 뿌리는 우리의 풍습과 반대의 순서입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흩어 뿌릴 때 길가에 떨어지고, 돌밭에 떨어지고, 가시덤불 사이에도 떨어지는 것은 그가 부주의해서가 아닙니다. 길가나 덤불이라도 나중에 밭을 갈 때 함께 갈아엎을 것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돌이 많은 땅에 씨앗을 떨어뜨리는 것도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얇은 흙으로 덮여 있는 작은 돌들이 나중에 밭을 갈 때 모두 흔들려 돌은 위로 드러나고 흙은 씨앗과 함께 밑으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처음 세 경우에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밭에 씨가 뿌려지고, 결실을 방해하는 요소가 나타나고, 원하지 않는 결과가 발생합니다. 길 가에 씨가 뿌려졌는데 새가 나타나 씨를 쪼아 먹어 버립니다. 돌밭에 씨가 뿌려졌는데 싹이 나오다가 해가 뜨자 타서 말라 버립니다. 가시떨기에 씨가 뿌려졌는데 가시와 함께 자라다가 가시 기운 때문에 자라는 것이 막혀 버립니다. 뿌려진 장소가 다르지만 공통점은 뿌린 씨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좋은 땅에 떨어진 씨들은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씨가 떨어진 장소를 언급할 때마다 등장하는 ‘더러는’이라는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사역이 반대에 부딪히면 불안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더러는’길 가, 더러는 돌밭,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져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할지라도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러는’좋은 땅에 떨어져 100배까지도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의 손실을 덮을 만큼 풍요롭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비유의 의미를 설명해 주십니다. 씨앗은 ‘말씀’을 의미합니다. 밭은 ‘말씀을 받은 자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씨를 뿌린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종류의 밭인가 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잘 모를 수 있지만, 일단 씨가 뿌려진 후에는 밭의 참모습이 드러납니다. 뿌린 씨는 동일하지만 씨가 떨어진 밭의 종류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 길 가에 뿌려진 씨


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가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씨가 뿌리조차 내리지 못합니다. 마가복음에서 여기에 해당하는 인물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마음이 굳었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을 도무지 인정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질 뿐 아니라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하기에 죄 사함 받을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본 후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6:2)라고 놀라면서도 예수님의 출신 배경을 알기에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 돌밭에 뿌려진 씨


말씀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는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버릴지라도(14:29) 자신은 그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다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의 행동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복음을 선포하시자 열광적으로 반응했고, 오병이어 이적 후에는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던 무리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을 맺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염려는 마음이 나누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음이 나누이니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재리는 돈만 생각하는 것으로 역시 우리의 심령을 둔하게 합니다. 욕심은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세상 것을 더 가지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을 말합니다. ‘막다’의 헬라어는 ‘질식시키다, 제압하다’란 뜻을 가집니다.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등이 말씀을 질식시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부자 청년입니다(10:22). 그는 영생에 대한 관심도 있었고, 어려서부터 율법도 지키며 살았지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슬픈 표정으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 좋은 땅에 뿌려진 씨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받아 30배나 60배나 100배의 결실을 맺는 자들을 말합니다.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다가 치유 받은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5:27)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5:28) 믿고 예수님께 나아가 치유를 받았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7:25) 엎드렸을 때 자기의 딸이 낫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좋은 땅은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한두 번 적당히 듣는, 감정에 의지하는 들음이 아닌, 지속적으로 말씀을 집중해서 듣는 사람은 그 마음 밭이 옥토가 되어 풍성한 결실을 거둡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열매 맺는 비결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네 가지 밭을 비유로 드셨는데, 길 가는 씨가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단단하고 완악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말씀 속에는 왕성한 생명력이 있지만 단단하고 굳은 땅에서는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편견과 여러 가지 사상, 지적 교만 등은 말씀의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좋은 결실을 얻으려면 마음속에 굳은 요소들을 제거하고 마음 밭을 부드럽고 겸손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마치 먹잇감을 얻기 위해 사방을 빙빙 돌면서 주시하는 매처럼 사탄은 말씀을 가로채 가려고 항상 대기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우리는 언제나 영적으로 깨어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 지속적인 말씀의 공급이 있어야 합니다 


돌밭에 비유되는 사람에게는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자마자 곧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인해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넘어집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자기 부인이 요구됩니다(10:29). 쉽게 넘어지는 이유는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 번 두 번 말씀을 듣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지속되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말씀을 접하고, 말씀이 주는 힘을 공급받아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 시험을 이겨내야 합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가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말씀을 막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기타 욕심이 ‘들어오기’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대비책은 이 세 가지가 들어오지 못하게 아예 차단하는 것입니다. 들어오더라도 빨리 떨쳐 버려야 합니다. 계속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결국 말씀을 질식시키고 신앙을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성경이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딤전 6:10),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마 6:24)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적으로 질식되지 않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받습니다. 여기서 ‘듣다’는 직설법 현재 능동태인데, 지속적으로 들어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누가는 좋은 땅을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8:15)이라고 합니다. 어떤 자세가 착하고 좋은 마음입니까? 첫째 기대감입니다. ‘어떤 은혜를 주시겠습니까’기대감이 있는 사람은 말씀을 대하는 자세부터 다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 쪽으로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 합니다. 둘째, 절박함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주변에서 조용히 하라고 하니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오늘 내가 말씀하소서’‘내게 은혜를 베푸소서’이런 절박함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말씀을 나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최고로 인정할 때 말씀을 굳게 붙잡습니다. 말씀을 꽉 붙잡는 이유는 사탄이 말씀을 빼앗아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인내심입니다. 말씀을 굳게 붙잡고 살려면 인내가 요구됩니다. 인내하며 말씀을 계속해서 붙잡고 살 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은 무리에게 가르치시나 제자들에게만 깊은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외인’에서 ‘너희’로 바뀌려면 되려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막 8:3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우리의 시간과 정성을 드려야 합니다. 주일 예배는 온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주중에 목장에 참여하도록 동기를 제공합니다. 예배 시간에 서로의 삶을 깊이 나눌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목사가 대단한 설교를 해서 큰 감동을 준다 해도 우리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도록 직접 도움을 주는 곳은 여러 분들이 소속된 목장입니다. 백신접종도 하고 COVID-19의 위협도 줄어들고 있으니 이제부터 모이기를 힘쓰기 바랍니다. 목장에서 친교도 더불어 한 주일 지나면서 일어났던 일들을 나누고, 가정이나 사업의 기도의 제목을 나누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며, 말씀을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다루어야 합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형제냐”하시면서 예수님은 기존의 혈육 관계를 넘어 새로운 가족의 개념을 정하셨습니다. 모든 목장 식구들이 예수님을 중심에 모신 한 가족입니다. 서로를 섬기며 각자의 삶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말씀에 진실하게 반응하고 순종함으로 삶이 변화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말씀을 받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우리의 마음 상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항상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좋겠지만, 처한 상황에 따라 우리 마음이 길 가가 되기도 하고 돌밭이 되기도 하고 가시떨기가 되기도 합니다. 너무 낙심이 되면 기도도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 점검해야 합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초점은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생명령 있는 능력의 말씀으로 임하기에 이를 받아들인 자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합니까? 주일 한번 들은 것으로 만족하십니까? 이 비유에는 두 가지 들음의 자세가 나옵니다.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들음’과 ‘깨달음과 지속적 순종이 따르는 들음’입니다. 제자들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순종하여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두며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기여하였습니다. 오늘날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세속화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속화는 교회와 복음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생명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듣고 깨닫고 행함으로 풍성한 결실을 맺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