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부활에 대해 가르치시는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4-04 14:37
Views
365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 즉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종말론적인 시간관을 가지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 뜻대로 순종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 믿기 전의 삶을 그대로 살면서, 말씀으로 도전받고 변화되기를 싫어하거나, 왕년에 한번 받은 은혜만 곱씹으며 과거에 묻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유대교의 관점에서 보니 예수님은 율법을 어지럽게 하는 자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면서 안식일을 범하는 자요, 죄인들과 어울리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초자연적인 이적을 많이 보여주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잣대로 잘못 재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엄청난 실수를 범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어떠하십니까? 시대를 분별하는 영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새 역사에 참여하려는 열정과 영적인 순발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기억할 것은 시대는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말씀을 붙들고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팬데믹의 위협이 아직 끝나지는 않았으나 점차로 그 위협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이번 부활절을 계기로 이제 신앙의 기지개를 켜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여전히 조심을 해야 하지만 모이기를 힘쓰고, 배우기를 힘쓰고, 섬기기를 힘써야 합니다. 


 


부활절에는 주로 복음서의 후반부를 토대로 설교를 많이 해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3월 12일 마태복음 22장으로 새벽기도를 준비하다가 이번 부활절에는 이 에피소드로 설교를 해야겠다는 감동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같은 내용을 다루는 마가복음 12장으로 부활주일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부활 신앙이 무엇인지 깨달을 뿐 아니라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주님과 동행하면서 역동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참된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종려주일에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성전에서, 정확히 말하면 이방인의 뜰에서 제물에 쓸 물건을 사고파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환전을 하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면서 성전 제사에 쓰일 기구들을 들고 성전 안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성전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에서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며 질타하셨습니다. 성전에서 행한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이 종교 지도자들의 심사를 불쾌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종교적 특권과 경제적 이권에 방해가 되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을 합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11:28). 그러면서 예수님과 연이은 논쟁이 벌입니다. 본문은 그 중에서 두 번째인 부활 논쟁을 다룹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18-23절)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질문을 던집니다. 바리새인들이 종교적인데 반하여, 사두개들은 정치적 색채가 강했습니다. 그들은 헤롯 왕과 로마정부와 타협하며 예루살렘 내에서 자기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챙겼습니다. 특히 성전에서 행해지는 종교 활동을 독점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들은 솔로몬 시절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이었던 사독의 후손임을 자처했지만 신앙보다는 사회에서 기득권을 행사하고 유지하는데 더 관심을 가졌기에 사회의 변화와 변혁을 아주 싫어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현세적이었기에 부활도, 천사도, 영도 인정치 않았습니다. 영혼은 육체와 함께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지금 이 세상뿐이고 장차 오는 세상은 없다고 생각하니 불의를 범해도 심판에 대한 염려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에서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대적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호칭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신 25:5-6에 기록된 ‘형사취수’제도, 혹은 ‘수혼 제도’를 근거로 질문을 만들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 합니다. 그 제도에 의하면 남편이 죽었는데 자식은 없고 아내만 남았을 경우 시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해 자녀를 낳고 그 형의 기업을 계속적으로 이어가도록 했습니다. 만일 자신의 기업, 즉 이스라엘 안에서 분배된 일정 부분의 토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 죽을 경우 자식이 없이 아내만 남았다면 그 아내는 과부로서 땅을 무를 수 없기 때문에 그 땅은 다른 가문이나 다른 지파에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 죽은 자의 동생이 있다면 그로 하여금 보호받을 길 없는 미망인을 거두게 하여 기업을 잇도록 한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수혼 제도로 발생할 수 있는 극단적인 예를 제시합니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남편이 아내를 취한다는 말은 아내를 소유로 취급하는 개념에서 나온 것입니다. 부활 후에도 아내는 여전히 남편의 소유물이며 아내는 남편에 의해 삶이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은 그 형제들 중에서 과연 누구의 아내가 될까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 아니라 부활 교리의 불합리성을 주장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대답하기 곤란해 할 것이라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24-27절)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사두개인들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했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오해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부활에 관한 성경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새롭게 하실 뿐만 아니라 전혀 새로운 형태의 삶을 창조하기도 하십니다. 만물을 다스리시며 시간과 생명을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이기는 부활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고려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오해(24-25절)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두개인들이 던진 질문의 전제는 부활 후의 사람의 육신이 지금과 같은 상태이고 부활 후의 사회제도도 지금과 같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생각한 대로 부활 전의 삶이 부활 후의 삶의 단순한 연장이라면 일곱 형제와 결혼한 여인이 부활 후에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지 혼란스런 상황이 발생할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을 요즘 상황에 비추어, 만약 불신자가 신자에게 부활을 부정하는 질문을 한다면 아마 이런 식이 되지 않을까요? ‘예수님을 믿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 여자가 믿는 남자와 재혼을 했다. 세월이 흘러 그들 모두 죽었다. 부활 후에 누가 그 여인의 남편이 되겠는가? 처음 결혼한 남편인가 아니면 재혼한 남편인가?’예수님은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 하늘의 천사들과 같을 것이라고 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 현재와 다를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부활 이후의 삶이 전혀 매력이 없는 무미건조한 삶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과 dynamic 하고 영원한 교제를 중심으로 한 삶이 있을 것입니다. 결혼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가 출산을 통한 종족 보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영생의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는 성도들은 더 이상 결혼이나 출산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은 이 세상의 일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내란 관계마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같은 인격체로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재합니다. 부활의 시대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지도 않고 결혼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천사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 성경에 대한 오해(26-27절)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출 3:6을 토대로 “너희가 이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라고 물으셨는데 이것은 그들이 성경을 읽기는 했어도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다는 질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가 호렙산 가시나무떨기 근처에 있었을 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만일 족장들이 죽어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었다”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니”현재형으로 말씀하십니다. 육신적으로 이미 죽은 족장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부활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생명의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자는 비록 육신이 죽는다 할지라도 그 영혼은 하나님과 계속 교제하게 되며 마지막 날에 육체까지 부활함으로서 완전한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구약에도 이사야 26장, 다니엘 12장, 시편 16편과 같이 부활에 대한 간접적으로 암시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반면, 신약에는 부활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과 사건이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고, 친히 죽으셨다가 다시 사심으로 부활의 주인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 날에 모든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부활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그런데 ‘심판의 부활’은 실상은 영원한 죽음을 뜻하기 때문에 불신자들에게는 부활이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생명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비한 복과 영생, 영광에 의한 부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신자들에게는 부활과 기쁨과 감격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은 우리의 신앙과 삶에 놀라운 의미를 제공합니다. 부활에 대한 바른 깨달음은 제자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기에,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 모두 도망을 치며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부활의 의미가 깨달아졌을 때 그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증인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순교까지도 각오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부활을 깊이 깨닫기 위해 성경을 가까이하고 성령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문제는 ‘내가 정말 부활을 믿는가’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고 ‘죽어봐야 알지’하는 생각이 든다면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하며 주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복음의 빛이 점차로 바래지는 지금의 어두운 현실 가운데서 부활의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부활의 신앙을 제대로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자기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경을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선입관과 경험에 비추어 성경을 보니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한 영적인 소경과 귀머거리들이었습니다. 불신앙도 일종의 무지입니다. 이것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성경에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요한이 기록했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을 붙드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오해’했다고 반복하여 말씀하셨는데 이 말의 원래 의미는 ‘미혹되다’, ‘잘못된 길로 인도되다’입니다. 성도들의 믿음의 토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진지함과 겸손함이 없으면 말씀을 대할지라도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성령의 조명 없이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그 능력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말씀 속에 담긴 주님의 마음과 뜻을 깨닫고자 기도하면서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전신갑주 중 유일한 공격 무기인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 삶의 변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구원론적으로 본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하는 관점에서 복음을 본다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사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자기 부인이요, 자기희생입니다. 자기의 권리를 주님을 위하여 유보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주님을 위하여, 주님이 쓰시겠다 할 때 아낌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부활은 소생과 다릅니다. 소생은 이전 상태로 도로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은 단순한 상태 회복이 아니라 죽음을 경험한 후 새로운 상태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고 난 후의 삶이 달라야 합니다.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셔서 복음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힌 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삽니다. 주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신다 할 정도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의 사랑이 피부에 와 닿습니까? 이제부터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느끼며 그 강권적인 사랑에 이끌린다면서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진짜가 아닙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면 육신의 죽음이 존재의 끝으로 보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천국은 이 세상 삶의 단순한 연장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은 이 땅에서 가진 삶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새로운 삶입니다.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에서 살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죽음 이후까지 이어지는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통해 함께 경험해야 합니다.  


 


- 부활의 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종교지도자들도, 머리를 저으며 모욕하던 무리들도, 로마 군병들도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함께 지나던 제자들도, 끝까지 예수를 지켜보던 여인들도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이 새벽 일찍이 무덤에 가보니 예수의 시신은 간 곳 없고 빈 무덤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천사는 여인들에게 “그가 살아나셨다”는 놀라운 메시지를 전해주었습니다.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니 얼마나 기뻐하였겠습니까? 그들은 고통과 좌절과 절망에서 기쁨을 회복했습니다. 이것이 부활을 경험하는 삶입니다.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 17:12) 하던 사르밧 과부에게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하여 역사하시니, 삼 년의 가뭄을 지나면서도 통의 가루가 마르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이 부활을 경험하는 삶입니다. 부활을 경험하는 삶은 성경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각자가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우리의 부활이요 우리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산 자의 하나님을 믿고 부활의 능력을 알고 있었기에 오직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한 성, 즉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며 살았습니다. 부활의 산 소망은 죽고 나서 하늘나라 갈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망이 있을 때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가면서


팔로마한인교회가 창립된 지 26년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 동안 함께 신앙생활 하던 교우들 중에 주님 품에 안기신 분들이 많습니다. 1996년 박혜신권사, 2000년 허염성도, 2004년 최두환성도, 호경찬집사, 신문자권사, 2011년 이주영집사, 김명신권사, 김광주전도사, 2015년 심기련성도, 2016년 김미진집사, 2017년 서인숙권사, 2018년 유문상장로, 이제희성도, 2019년에는 특히 여러분이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고현정권사, 김진호집사, 박미옥집사, 김수경성도, Peter주 성도. 얼마 전에는 유세경집사까지.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들은 살아 있습니까, 죽었습니까? 살아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기에 지금은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직면하는 가장 큰 두려움이자 현실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부활신앙을 갖고 이 세상에서의 삶이 나그네 삶임을 알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죽음을 새로운 시작, 곧 영원으로 향하는 관문으로 여기고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합니다. 그리고 먼저 떠난 자들을 주 안에서 다시 만날 소망을 가집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들이 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막 5:42), 나인 성 과부의 아들(눅 7:15), 베다니의 나사로(요 11:44). 그런데 그들은 잠시 살았으나 다시 죽었습니다. 그들이 살아난 것을 부활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고전 15:20) 되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마지막 날에 있을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보증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말씀하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눈에 눈물을 닦아주시고 고통의 멍에를 함께 져주시고 형통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가운데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모든 염려와 근심은 다 주님께 맡깁시다. 주님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시고,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도 알고 하나님의 능력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삶의 변화를 경험하고,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지고 살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회복하시고 주님만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을 누리시면서 삶의 현장에서 부활의 주님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풍성하게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