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누가 제자입니까?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8-01 14:15
Views
394

가방이나 옷이나 구두에는 명품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품은 비쌉니다. 한번 사려면 주머니 사정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은 없지만 명품을 갖고 싶다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온 것이 짝퉁입니다. 진짜는 아니지만 명품 흉내라도 내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술이 발달하다 보니 가짜가 더 진짜 같이 만들어집니다. 영의 세계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니 사탄이 있고, 그리스도가 계시니 적그리스도가 있고, 성령이 계시니 악령이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어 속기 쉽습니다. 구약을 보면 ‘내가 여호와 너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사 45:3, 겔 20:20)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옵니다. 사람들이 가짜를 진짜로 알고 섬겼기 때문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나일강, 개구리, 파리, 메뚜기, 태양 등이 자기들의 신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통해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가짜인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가 제자입니까’묻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진짜 제자인지 짝퉁 제자인지 궁극적인 판단은 주님이 하시지만 우리도 수시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마가복음을 크게 둘로 나눌 때 본문이 분기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제자들을 떠나시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저절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신앙고백을 했다고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와 제자도에 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제자도를 실천하면서 주님의 참 제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섬김과 헌신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정체성 질문(27-30절)


예수님은 벳새다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지방의 여러 마을로 가셨습니다. 이 지역은 갈릴리 호수에서 북쪽으로 약 40km쯤 떨어진 헤르몬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합니다. 이곳에는 가나안 시대부터 바알 신전이 있었습니다. 산림이 우거지고 물이 많아 토지가 비옥하고 풍요로운 곳으로 농사와 목축이 적합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곳을 정복한 후에 그 지역 사람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풍요의 신 ‘판’을 섬겼기에 파네아스라고 불렸습니다. 헤롯 대왕의 아들 분봉왕 빌립은 그 성읍을 확장하고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빌립이 로마 황제를 기념하고자 황제의 칭호 ‘가이사’와 자신의 이름을 붙여 만든 것입니다. 거대한 판의 석상과 로마 황제를 위한 신전과 제우스를 위한 신전 등 세상 영화로 가득 찬 그곳에 왔을 때 제자들은 웅장하고 화려한 분위기에 압도되었을 것입니다. 


-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때 예수님이 길 위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무리의 반응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답변합니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하며 세례자 요한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니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많은 능력을 행했고 다시 온다고 예언된(말 4:5) 엘리야라고도 합니다. 권세 있는 말씀과 능력을 인해 모세가 말한 선지자 중의 한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제자들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제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예수님의 질문은 무엇인가 보다 나은 대답을 기대하시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제자들의 대표격인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우리말 성경에는 ‘주’로 번역되어 있으나 원어에는 ‘당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 정관사 ‘the’가 있습니다. You are the Christ. 당신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되어 왔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절히 기다리던 메시아이십니다. 마태복음 16:16에 기록된 베드로의 대답은 더 구체적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베드로는 그 대답으로 인해 예수님으로부터 복이 있다는 칭찬과 더불어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놀라운 말씀도 듣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후 ‘자기의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자기의 일’은 그리스도라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경고하다’는 절박함과 권위를 가지고 강하게 경고하다 외에 ‘꾸짖다’는 뜻이 있습니다. 같은 단어가 예수님이 귀신을 꾸짖으실 때와(1:25; 3:12) 바다를 꾸짖으실 때에(4:39) 사용되었고, 32절에서는 ‘항변하매’33절에서는 ‘꾸짖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경고하신 이유는 아직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밝힐 시점에 아니었기 때문이거나, 그 호칭의 사용으로 말미암아 야기될 수 있는 그릇된 기대와 혼란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31절)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어떤 메시아인지 분명히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비로소 가르치시니라”하시면서 예수님은 당신이 어떤 메시아인지 알려주십니다. ‘비로소’로 번역된 ‘에릭사토’는 ‘시작하다’라는 뜻의 동사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하리라. 예수님이 수난을 예고하시며 당신을 ‘그리스도’가 아닌 ‘인자’라고 칭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란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니엘 7:13-14을 근거로 당신이 천상적 존재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성경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대적들의 승리로 그려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의 성취로 그려진다는 점입니다.  


 


두 꾸짖음(32-33절)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받으실 고난에 대해 ‘드러내 놓고’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이 똑똑히 알아듣도록 말씀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놀라운 능력으로 이적을 행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분명히 가르쳐 주실 때가 됐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메시아의 이미지는 크게 둘로 나뉩니다. 승리를 가져오는 왕으로서의 메시아와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다윗의 씨를 일으켜서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다윗이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인 풍요와 사회의 정의를 회복시킬 육신적인 메시아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도저히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당하실 수난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성미 급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 ‘붙들고’는 ‘따로 말하기 위해 옆으로 데리고 가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개역개정판에는 ‘항변하다’로 점잖게 번역되어 있으나 원어의 의미는 ‘꾸짖다’입니다. 제자인 베드로가 스승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꾸짖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서 그 의미를 약화시킨 것입니다. 마 16:22을 보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하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강력하게 제지합니다. 얼핏 들으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하여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자기를 위해서 말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 때문에 한 자리 하고 싶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 높아지려는 야망을 드러냅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아직도 예수님의 정체성과 그의 사역에 대해 제대로 깨닫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을 대변합니다.


 


베드로의 말을 들은 예수님의 반응도 단호하십니다.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베드로를 꾸짖으셨다는 것은 단지 베드로만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 모두를 꾸짖으신 것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베드로가 왜 사탄으로 불립니까?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그리스도가 되는 길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사람의 생각이 앞설 때 예수님의 제자라 할지라도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신앙의 연륜이나 직분이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깨어있지 아니하면 사탄의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랄한 꾸짖음은 자신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제자도와는 결코 조화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반면에 주님께서는 당신이 당하게 될 고난과 수치보다 그로 인해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과 구원을 얻게 될 영혼들을 언제나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34-38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예수님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무리를 당신 곁으로 불러 주님을 따르는 도를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이제 말씀하시려는 내용이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이 말을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나를 따라오기를 소원한다면’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일은 우리의 의지적인 각오와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1세기에 로마 제국 사람들은 황제를 신으로 경배하였고 그를 주(Lord)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인들은 황제가 주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라고 고백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말세의 특징 중의 하나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부인’은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자기 뜻보다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히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4:6절을 보면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고집과 욕망을 꺾고 그 뜻대로 순종하고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면 우리의 옛 사람도 십자가에서 죽은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참여함, 즉 철저한 희생을 의미합니다. 십자가형을 당하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가 처형당하는 장소까지 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져야 할 십자가는 다릅니다. 사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달란트 비유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어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주님의 칭찬은 같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자기를 부인하라’는 과거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형편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순간부터 당장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자기의 권리를 유보하고 주님 중심으로,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표현도 과거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희생을 각오하고 지금 당장 자기의 십자가를 지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까? ‘예수님을 좇으라’는 현재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며 그 뜻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35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습니다. 누구를 위한 삶이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것”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사는 삶은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복음을 위하여 사는 삶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나누고 전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목숨이 무엇입니까? 문자 그대로 목숨이라고 본다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순교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목숨’은 단지 목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10:29-30에도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제자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식, 전토를 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 내세에 영생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온 천하를 ‘얻다’, 자기 목숨을 ‘잃다’, ‘유익하다’는 상업적 표현입니다. 즉 ‘얻는다’는 것은 이득을 보는 것이고, ‘잃는다’는 것은 손실을 보는 것이며, ‘유익하다’는 것도 이득을 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잃어버린다 해도, 심지어 내 목숨까지 잃는다 해도 사실은 남는 장사라는 뜻입니다. 대신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여기서 ‘음란’은 성적인 타락은 물론 영적 음행인 우상숭배까지 포함하는 말입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는 사탄의 권세 아래 있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 역사 전체를 가리킵니다. 당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 정치범과 같은 중범죄인에게 내려지는 형벌이었습니다. 신명기 21:23에 따르면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나무에 달린 자,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로 선포하는 복음은 당시 사람들에게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고전 1:22-23). 그러나 바울은 바로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기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오히려 만방에 알려야 할 기쁨의 소식입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 중에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신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스승의 길이 십자가의 길이었다면 제자의 길도 당연히 십자가의 길이여야 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길과 십자가의 길이 공존할 수 없음을 예수님은 분명히 하십니다. ‘사람의 일’, 즉 세상적인 관심사나 세상적인 가치관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위해 살 때 예수님도 우리를 시인하고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을 나누어주십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 주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제자는 다른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알고 있는 자가 아니라 자신만의 고백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정보의 대상이 아니라 고백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고백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으나 그가 생각한 그리스도는 다른 제자들은 물론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메시아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광의 그리스도로 알기 이전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 받으신 십자가의 그리스도로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바른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 주님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오늘의 사건 이후에도 제자들은 누가 더 높으냐 싸우고, 또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를 구했습니다. 참된 제자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기의 뜻을 포기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생각과 뜻을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기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제자는 스승과 동일한 길을 가야 합니다. 참된 제자는 예수님을 본받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 주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참생명은 구원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하나님 나라 영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 많은 세상에 얽매여 살다 보면 주님과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게 됩니다. 참된 제자는 예수님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런 사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칭찬하시고 자랑하실 것입니다. 제자는 천하보다 귀한 영생을 얻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갈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주님의 질문은 결국 “주님이 우리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것과 연결이 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세상의 것으로 우리의 눈이 가리어질 때 주님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당연하게 말하는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을 갔던 제자들의 모습은 없습니까? 혹시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조롱하고 모욕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은 없습니까? 무리처럼 표적만 구하지는 않습니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거짓 제자는 아닙니까?  


 


바울은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4)고 선언합니다. 바울이 가진 흔적은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면서 당한 고난의 흔적입니다. 그 흔적은 바울이 하나님의 택한 종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흔적이 생깁니다. 주님을 인해 무엇인가 손해 보거나 포기한 적이 있습니까? 고민하고 씨름한 적이 있습니까? 제자가 되는 길은 좁은 길인지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기를 주저합니다. 그러나 가치가 있고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참 제자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갑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과 골고다까지 따라왔던 여인들처럼 주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주님의 길을 따라갑니다. 비록 자원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구레네 시몬처럼 맡겨진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갑니다.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을 위해 사용합니다. No cross, no life. 십자가 없는 생명은 없습니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습니다.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기 원한다면 먼저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자기가 져야할 십자가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교우들이 제자도를 실천하며 생명보다 사명을 귀하게 여기는 열정으로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길 때 교회는 든든히 세워져 갑니다.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들이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 중에 바라보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끝까지 좇는 참 제자들이 되어 “나는 주님의 제자입니다”담대하게 말할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