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보게 하시는 주님의 손길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7-25 14:18
Views
369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시력이 약해져 노안이 오고 때로 백내장이나 녹내장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senior 교우들 중에도 백내장이나 녹내장 수술을 이미 하신 분들도 있고 수술을 기다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시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시력입니다.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보는 것이지 본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듣는 것이지 듣는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을 보니 바리새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수많은 병자를 고치셨고 귀신을 쫓으셨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군대 귀신을 제압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안이 어두웠기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릅니까? 예수님께서 벳새다에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어른만 5천명을 먹이셨습니다. 데가볼리 지역에서 떡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두어 마리로 4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이 거의 비슷한 이적을 두 차례에 걸쳐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급식 이적들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백성의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떡 가져오지 않은 것을 인하여 염려합니다.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지난 날 어렵던 때에 주님께 부르짖었더니 주님이 응답하시고 피할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응답하신 주님을 인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역경 속에서 다시 염려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한심한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전히 그들을 품으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영의 귀가 열리고 영의 눈이 떠져 주님의 역사를 보고 들으며 하나님 나라 사역에 기쁨으로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바리새인들(11-13절)


예수님이 달마누다에 도착하시자 바리새인들이 나옵니다. 유대인 지역으로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힐난합니다. ‘힐난하다’는 ‘트집을 잡아 싸움을 걸다, 비난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이미 많이 보고도 또‘표적’을 요구합니다. ‘표적’으로 번역된 헬라어 ‘세메이온’은 신약에서 총 77회 나옵니다. ‘표적’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행해진 기적을 말하지만, 그 기적을 행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드러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이적을 뜻합니다. 그런 표적을 요구한 것은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가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게 사로잡혔다고 음해하는 서기관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을 보고도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것을 얻었는가’(6:2) 놀라워하며 의심하는 나사렛 고향 사람들의 불신과도 연결됩니다. 바리새인들은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인지라, 예수님이 어떤 증거를 보여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앞서 귀먹고 말하지 못하는 자를 고치실 때도 ‘하늘을 우러러 탄식’(7:34)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마음 속 깊이 탄식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여기서 ‘세대’는 ‘세대 차’가 난다고 할 때 그 세대가 아닙니다. ‘세대’는 성경에서 부정적으로 사용되며 ‘노아 당시의 세대’(창 7:1)와 ‘교만하고 불순종하는 광야 세대’(시 95:10)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즉 이 용어는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는 패역하고 신실하지 못한 사람들(신 32:20)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이미 많은 이적을 보여 주었음에도 믿지 못하고 여전히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불신의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에 대한 탄식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어떤 표적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후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그들을 떠나신 것은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받지 않거든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고 떠나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에 부합한 행동입니다(6:11). 바리새인들의 행동은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14-21절)


배를 타고 가면서 제자들은 떡을 가져오지 않아 떡이 한 개밖에 없다고 걱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시면서 ‘주의’를 요구하는 동사 세 개를 연달아 사용하십니다. caution(경고하다), watch out(조심하다), beware(조심하다). ‘경고하다’가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으니 계속 경고하는 것입니다. ‘삼가다’와 ‘주의하다’는 현재명령형이니 계속해서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입니다. 누룩은 성경에서 점차적으로 스며드는 특성으로 인해 긍정적 의미로도 사용되기도 하고,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13:33을 보면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하며 누룩을 은연중에 빠르게 성장해 가는 하나님 나라로 비유합니다. 고린도전서 5:6에서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면서 누룩을 확산되는 나쁜 영향력에 비유합니다. 마가복음에서 바리새인과 헤롯이 함께 언급되는 경우는 두 차례인데, 두 차례 모두 예수님을 죽으려 모의하거나,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시험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바리새인들의 누룩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 12:1을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외식’은 바깥에만 관심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형식과 틀에만 관심이 있고 정작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주의를 경계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책망하실 때 ‘회칠한 무덤’이라고도 부르셨습니다. 무덤의 겉만 열심히 꾸민다고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안은 마른 뼈들과 썩은 냄새가 가득 차 있습니다. 마태복음 23:23을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하시면서 예수님은 종교인으로서의 겉모습보다 의롭게 살고 사랑하며 살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강조하셨습니다. 온 덩이에 퍼지는 누룩처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신앙’이 백성 속에 퍼지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며,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고 경계하십니다. 자칫하면 우리에게도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행위에는 익숙하지만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참된 성도의 모습이라 할 수 없습니다. 


 


- 헤롯의 누룩


헤롯 가문의 왕들은 로마로부터 임명을 받아 팔레스타인 땅을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다스렸기에 분봉왕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탐욕스러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몰랐습니다. 따라서 ‘헤롯의 누룩’(마 23:27)이란 세속에 물든 불경건을 가리킵니다. 이 누룩이 퍼지면 사람들은 탐욕과 음란과 훼방과 교만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하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위선과 헤롯의 세속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주의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적은 누룩이 빵을 부풀게 하듯이, 작은 죄라도 그것과 타협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도 습관적으로 드리는 예배, 억지로 혹은 인색하게 드리는 헌금, 세상에서의 성공으로 보답받기 위해 하는 봉사, 이러한 형식주의나 세속주의가 믿음 생활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신 말씀을 자기들이 떡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꾸중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벌써 두 차례에 걸쳐 수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인데, 배에 탄 10여명이 먹을 떡이 없다고 해서 걱정을 하니 얼마나 답답합니까? 이에 예수님은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라고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여 준 실망스러운 모습의 근원이 ‘알지 못함, 깨닫지 못함, 마음의 둔함’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지금까지 제자들을 향해 이토록 심하게 꾸중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특히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는 질책은 마가복음 4:12에도 나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따라다니며 모신다고 자부하던 제자들이 외인, 즉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된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둔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둔한 마음은 예수님을 적대시했던 바리새인들의 완악한 마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눈으로 보았지만, 본 것을 마음에 새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기면 이전에 보여 주신 그 놀라운 능력과 은혜를 잊어버리고, 여전히 불평을 늘어놓거나 염려합니다. 예수님은 떡 문제로 말씀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시기 위해 이전에 행하신 이적들을 다시 언급하십니다. 오병이어 이적으로 5천명이 먹고 남은 것이 얼마나 되었는지 물으시자 제자들은 열두 바구니라고 대답합니다. 칠병이삼어 이적으로 4천명이 먹고 남은 것이 얼마나 되었는지 물으시자 제자들은 일곱 광주리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 단락에서 눈에 띄는 것은 제자들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인내하시며 계속해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아직’깨닫지 못했지만 ‘언젠가’깨달을 것이라는 희망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벳새다 맹인의 단계적 치유(22-26절) 


벳새다 맹인 치유 사건은 전반기 갈릴리 사역의 종결인 동시에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후반기 사역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다시 벳새다에 오셨습니다. 전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곳입니다. 사람들이 맹인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손대시기를’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치유하신 것과 유사한 방법으로 그를 치유하십니다. 귀먹은 사람을 무리에서 따로 데리고 나가신 것처럼, 앞을 못 보는 사람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치유하실 때에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셨는데, 앞을 못 보는 사람의 경우에는 눈에 침을 뱉으십니다. 예수님은 맹인에게 안수하시며 무엇이 보이는지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는데 누가 있단 말입니까? 제자들이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고 대답합니다. 흐릿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맹인의 눈에 다시 안수하시자 그 사람이 ‘주목하여 보더니’‘나아서’모든 것을 밝히 ‘보았다’고 합니다. 마가는 ‘보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를 3번이나 사용합니다. 확실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 중에 다시 안수하시는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 맹인을 단계적으로 치유하십니까? 그날따라 예수님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그런 것이 아닙니다. 두 단계 치유는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의 영적인 안목이 완전히 닫히거나 열린 것이 아닌 중간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맹인의 치유 사건은 영적으로 둔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안수를 다시 한 번 받을 필요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8:27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수난을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꾸짖기까지 합니다. 제자들이 온전하게 영적 시력을 회복하도록 부활 이후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앞에서 예수님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셨을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7:36)라고 하셨는데, 이번에는 아예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기적을 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참그리스도로 인식하기보다 그저 자기들의 이기적인 욕구를 채워 주는 사람 정도로 알기 때문입니다.


 


끈질긴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이것이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삶을 나눈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중간평가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는 아직도 부족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셨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포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맹인을 다시 안수하듯이 예수님은 여전히 그들을 가르치시고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보신다면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하시며 안타까운 마음을 갖지 않으실까요? 그런데 그 주님은 우리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후에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과 제자도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제자들의 영적인 둔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한 주님의 끈질긴 사랑이 있었기에 제자들은 마침내 깨닫게 되고 예수님의 뒤를 이어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어제 교우 몇 분과 함께 박원철 선교사 사모 천국환송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참석자들은 검은 옷을 피하라고 해서 그랬는지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한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뜨겁게 찬송을 부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감사가 넘치며 작은 부흥회를 하는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박선교사님이 아내가 췌장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병 낫게 해주세요’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했는데, 계속해서 임한 기도의 응답은 ‘고쳐줄께’가 아니라 ‘내가 너를 여전히 사랑한다’는 성령의 감동이었다고 합니다. 주님 안에서 다시 만날 소망으로 가득찬 모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오늘도  그 사랑을 끈질기게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이 맹인을 안수하신 후에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을 때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인다고 말하면서 더 잘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사실 그 맹인이 주님 앞에 처음 나왔을 때 그가 믿음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왔기에 끌려 왔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치료하실 때 그 사람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혈루증 걸린 여자, 다시 돌아온 사마리아 문둥병자, 여리고의 맹인 바디매오에게 공통적으로 하신 말씀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당사자의 믿음에 근거해서 치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맹인은 아직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처음 안수하셨을 때 그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희미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더 분명하게 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주님이 역사하시지만 우리 쪽에서도 주님에 대한 사모함이 필요합니다. 육신적인 필요에 대하여 민감해야 하지만 그와 더불어 말씀을 통한 마음의 변화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필요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채워집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영의 눈이 열리고 진한 감동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우리의 안에 있던 상처들이 낫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부족할 지라도 기다리시고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의 사랑과 인내가 있기에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다가오시는 주님 


맹인의 손을 붙들고 마을 밖으로 나가신 주님이 지금도 우리의 손을 붙드시고 조용한 곳으로 가십니다. 맹인에게 안수하시고 그가 낫기를 기다리신 주님께서 우리를 안수하시고 우리가 낫기를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다시 안수를 받은 맹인이 모든 것을 확실히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문제를 해결 받고 주님께 대한 바른 신앙을 고백하기 원하십니다. 아직도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둔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눈이 있어도 주님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귀가 있어도 주님의 말씀이 제대로 들리지 않고 내가 왜 사는지 인생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살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맹인 한 사람만을 만져주시고, 그 사람만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그 사람에게만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 각자의 필요를 아시고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다시 안수하신 주님 때문에 맹인이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보느냐”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 던지는 질문입니다. 다시 안수하시는 주님의 인내와 사랑이 있기에 우리도 벳새다의 맹인처럼 만물을 밝히 보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인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분의 사랑과 관심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주님이 원하시는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이 주님을 기도와 말씀과 예배를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나가면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책망은 우리를 향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연륜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변화를 받아 우리의 중심이 주님을 향하고 주님의 뜻을 깨닫고 주님을 위하여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이제는 주님께 맞추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영의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법을 보게 해달라고 시편 기자와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혹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도하시는 주님을 끝까지 붙들며 믿음을 지킬 때 하나님의 은혜를 천국에서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맛보고 누리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지만 그 상황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기다려 주시는 주님, 다시 다가오시는 주님, 그리고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시는 주님, 이 주님의 사랑과 인내와 은혜가 있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영의 귀가 열려져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영의 눈이 떠져 주님의 역사를 보고 깨달으며 입으로 주님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감당할 시험만을 허락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마련하여 주시는 그 주님과 동행하며 다시 만져주시는 주님의 touch를 때마다 시마다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