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메시아에심을 드러내신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7-18 15:00
Views
345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야기를 어렸을 때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열려라 참깨”라는 password를 사용하면 어느 때든 보물이 들어있는 동굴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도 저렇게 할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상상은 누구나 해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끊임없이 발생합니다. 그것이 육신의 질병일 수도 있고 사업의 어려움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의 어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내용이야 어떻든 그것을 인하여 낙심하기도 하고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 문제들을 해결해보려고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쉽지 않습니다. 고난은 삶의 일부인지라 믿는 자에게도 고난이 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을 통하여 성도를 믿음의 사람, 인내의 사람,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고난을 당할지라도 기뻐하라,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권면합니다(약 1:2-5). 


 


이방 여인의 귀신 들린 딸을 고치신 예수님은 이어서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치유하시십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에바다’라고 외치시니 귀가 풀리고 입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 막힌 것이 있습니까? 닫힌 것이 있습니까? 너무 얽혀서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습니까?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무거운 짐이 벗겨지고 묶인 것이 풀리는 ‘에바다’의 역사를 경험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비결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통하여 자신이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여러 차례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종교지도자들이나 많은 유대인들은 메시아 시대에 일어날 표적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도리어 배척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귀가 있지만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을 제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입이 있지만 예수님을 자기들의 구주로 시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영적으로 귀가 먹은 자들이요 혀가 굳은 벙어리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 종교지도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치유하셔서 듣게 하고 말하게 하시는 사건은 커다란 상징적 의미를 가집니다. ‘에바다’라고 외치신 것은 귀가 열려져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입이 열려져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라는 믿음의 촉구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온 귀먹은 반벙어리(31-32절)


예수님께서 두로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나셔서 그의 딸의 귀신 들린 것을 고치신 후 북쪽에 있는 시돈에 들르셨다가 동남쪽에 위치한 데가볼리 지역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까지 가십니다. 여기서 갈릴리 호수는 ‘갈릴리 호수 동쪽 데가볼리’라고 보아야 적절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방인의 지역을 다니고 계십니다. 본격적인 이방인 전도는 나중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지지만 예수님께서 먼저 이방인 사역의 본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유대인만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에게도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데가볼리 지역에 오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거라사에서 얼마 전 예수님은 군대귀신 들린 청년을 고쳐주셨습니다. 고침 받은 청년이 자기도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간청하였을 때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대신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5:19).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께서 자기에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 지방에 열정적으로 전파함으로 그 청년의 간증을 들은 무리가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데가볼리에 오셨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몰려들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예수님께 데려고 와서 치유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귀먹다’는 것은 복음을 들을 수 없음을, ‘말 더듬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어도 제대로 간청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당시는 구전 사회였기 때문에, 들을 수 없다는 것은 다른 장애보다 심각한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당연히 하나님 나라 복음도 들을 수 없기에 하나님 나라의 구원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고치셨다는 것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직접 보기 원했을 것입니다. 


 


독특하게 치료하시는 예수님(33-35절)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그와 함께 어디론가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데가볼리에 오신 것이 단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 예수님의 치유가 인격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다수의 무리에게 관심과 동정을 가지실 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같은 반응을 보이십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은 남들이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가 하는 말을 남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답답함 때문에 사람 만나는 것을 꺼려했을 것입니다. 자기의 상황을 이해하거나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의 손에 이끌리어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마 그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과 그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평생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느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를 데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십니다. 무리를 떠나 예수님과 단둘이 길을 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이 저만치 앞에서 걸어가고 그는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없이 따랐을까요? 아마 함께 걸었을 것입니다. 8장에 보면 벳새다 맹인을 고치실 때 예수님은 맹인의 손을 잡고 가셨습니다. 장애자 특유의 예민함으로 자기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느꼈을 것입니다. 떠떠떠떠떠 말을 더듬지만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의 생애에서 지금처럼 마음이 푸근해진 적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예수님을 인하여 무엇인가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대감이 생겼을 것입니다. 


 


- 예수님에 대하여 섣불리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저 기적이나 행하는 사람으로 오해하거나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와 반발을 자극하여 주님의 사역이 방해를 받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러 번 자신의 치유 사역을 알리지 말라고 여러 차례 당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알림으로써 예수님이 행동하는 데에 많은 제약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치유 받는 사람의 상황이나 믿음 수준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고치십니다. 예수님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실 때 사용하신 방법은 그 사람을 위한 맞춤치료법이었습니다.  


- 양쪽 귀에 손가락을 넣고 손에 침을 뱉어 혀에 대십니다


예수님이 그저 말씀만 하셔도 귀가 열리고 말이 터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양 귀에 손가락을 넣으시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마치 창조주가 손으로 사람을 지으셨던 것처럼 친히 손으로 빚으시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손가락을 양 귀에 넣으신 것은 막힌 귀가 열려야 함을 의미하며, 손에 침을 뱉어 그의 혀에 대심은 굳어진 혀가 풀려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요즘 방탄소년단이 새로 발표한 "Permission to Dance"라는 뮤직비디오에 ‘기뻐하자, 춤추자’라는 의미가 담긴 수화가 여러 개 포함되어 있다고 하여 사람들의 관심이 폭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화와 같은 이러한 방식의 의사소통을 통해, 예수님은 그를 치유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당시 유대 사회나 헬라 사회에서 침은 병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했기에 예수님이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에 대신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깊은 탄식을 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는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실 때도 보여주셨던 기도 행위입니다. ‘탄식하시며’는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터져 나오는 외침을 뜻합니다. 아마도 귀먹고 말 못하는 신체장애가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왜곡시킨 것을 의미하는 안타까운 탄식일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을 인하여 엘리야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였습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왕상 17:21). 죽은 나사로를 앞에 두고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 11:41)라고 기도하신 후 “나사로야 나오라”부르시니 죽은 나사로가 걸어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어둠의 세력에 갇혀서 복음을 듣지 못하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할 수 없는 그를 인해 안타까워하시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그 탄식에는 귀가 있으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으나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영적 장애자들을 향한 안타까움도 담겨 있습니다. 그가 비록 듣지는 못하지만 주님이 탄식하며 기도하시는 것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 ‘에바다’를 외치십니다


치유 사역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 예수께서 ‘에바다(effatha)’라고 외치셨습니다.  ‘에바다’는 아람어로 마가는 이방인 독자를 위해 그 뜻을 설명해 줍니다. ‘열리라’는 뜻인데, 단순히 입이나 귀와 같은 신체 부위가 열릴 뿐 아니라 속박에서 놓여 자유함을 얻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립니다. ‘혀가 맺힌 것’은 직역하면 ‘혀의 결박(속박)’입니다. ‘맺힌 것’은 복음서에서 악한 세력에 의해 사로잡힌 이미지를 나타냅니다. 마태나 누가는 귀신을 사람의 혀를 결박하는 세력으로 언급합니다. 마가는 직접적인 원인을 귀신에게 돌리지 않으나 ‘결박’이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암시합니다. 그의 입의 말이 분명해졌다는 표현으로 보아 그 장애인이 예수님께 또렷한 목소리로 깊이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닫힌 귀가 열리고 굳어진 혀가 풀리고 닫힌 눈이 열려져서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우리의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기 원하십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사역의 결과 8:29에 보면 제자들의 대변인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의 입이 열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반응(36-37절)


치유 받은 장애자를 데리고 무리에게로 오신 예수님은 당신이 하신 그 이적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 것을 경계하십니다. 기적적인 치유로 인해서 예수님의 정체가 오해받기를 바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같은 경계를 무시하고 그 사건을 널리 전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감추어질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칭찬하며 심히 놀라워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사람들의 반응은 창조 시에 하나님의 역사를 기술하는 창 1:31의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 오직 마가복음에만 기록된 이 사건은 특히 메시아의 사역에 대한 이사야 35:5-6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는 것은 종말에 약속된 메시아가 와서 하실 일들이 현재 일어나고 있다는 흥분과 기대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언이 이방 지역에서도 놀랍게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방인들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은 ‘모든 일을 잘하는 분’, 즉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일하시는 분으로 그려집니다. 마가는 지금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종말론적 새 창조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닫힌 것이 열리고 막힌 것이 풀리기를 간절히 원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에바다’의 이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저 귀신을 내쫓고 질병을 치유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사탄의 지배 아래 있고 고통 가운데 있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이 에바다라고 말씀하시자 창조주이신 예수님의 능력이 그 장애자에게 나타났습니다. 곧 귀가 뚫리고 혀가 풀리더니 제대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의 치유 이야기는 문맥에서 볼 때 예수님의 이방인 선교라는 주제와 연관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앞 구절에서 유대 지도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전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은 그들이야말로 영적 귀머거리와 벙어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자들도 치유하실 수 있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1:15). 하나님 나라가 주제인 마가복음 내용의 약 삼분의 일이 치유와 축사에 관한 것입니다.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표징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은 치유와 회복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고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간다면 주님이 베푸시는 치유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shalom, 즉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을 통한 예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가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시려고 동네 바깥으로 나가시는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만을 만져주시고, 그 사람만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그 사람에게만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오늘도 개인의 필요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0:3에 의하면 주님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지금도 개인적인 고통이나 연약함을 아시고 가까이 오시며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나를 데리고 가셔서 나의 필요를 채우시기 위해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기도하십니다. 나의 양 귀에 주님의 손이 와 닿고 나의 혀에 주님의 손이 와 닿을 때,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문제나 어두움의 세력들이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치유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전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하셨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을 통하여 이 일을 이루십니다. 중요한 것은 겸손히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열고 은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영의 귀가 열려 있습니까? 주님을 증거하는 입술이 열려 있습니까? 주님의 능력의 손길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가까이 와 닿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부끄러운 것이 있다고 주님께 나아가지 않으면 이것보다 안타까운 것은 없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와 믿음으로 구하시기 바랍니다. 전적으로 각자의 삶을 주님께 맡기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의 인자하신 손길이, 주님의 치유의 손길이 우리의 귀에 우리의 입에 우리의 마음에 닿게 될 것입니다.  


 


-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육신의 장애보다 더 불행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영적인 장애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거나 들어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니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에바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막힌 것이 열려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필요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채워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언제부터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영혼에 진한 감동을 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심령에 있던 상처들이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믿음으로 주님을 붙들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막힌 것이 열리고 묶여진 것이 풀리고 우리를 누르는 것들이 벗겨집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일과 더불어 육신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데도 정성을 쏟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할 뿐 아니라 직접 그들의 도움을 채워주는데 열심을 내야 합니다. 고통 받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며 탄식하셨듯이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탄식하며 도움의 손길을 뻗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고친 자에게 침묵할 것을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을 담대하게 증거하기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예수님 주변에 있던 무리처럼 눈이 있어도 주님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귀가 있어도 주님의 메시지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께서는 자기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우리 한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시간을 넉넉히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나의 수치, 문제, 고민거리, 장애를 아십니다. 우리를 개인적으로 대하시며 우리를 위해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기도해 주십니다. 치유의 주님을 믿고 영적 장애를 먼저 치유 받으면서 그 주님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시기를 원합니다. 삶 속에서 문제들이 생겨 닫히고 막히는 것이 있다할지라도 예수님처럼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은혜를 사모하는 가운데 열리고 풀리는 역사를 때마다 시마다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