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이방인도 정결케하신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7-04 14:08
Views
388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학교 식당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주문했습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하며 자신 있게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직원이 ‘what?’하면서 되물었습니다. 발음이 잘못 되었나싶어 ‘바니일라’했는데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인토네이션을 바꾸어 보았지만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메뉴판을 가리키며 ‘first one’이라고 했더니 그제야 ‘버낼라’라고 말했습니다. 줄서서 기다리던 다른 학생들이 그 모습을 줄곧 보고 있었습니다. 순간 밀려오는 창피함 때문에 얼굴이 화끈해져서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더웠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외국 학생들도 많은 학교 식당에서 일하면서 그것도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은근히 화도 났습니다. 이민자로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두 번쯤은 이런 경험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최근 들어 팬데믹 상황 속에 아시안 대상 인종차별과 증오범죄가 미국 전역에서 급증하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이 남녀노소 구분 없이 확대되고 있고, 가해자들도 백인, 흑인, 심지어 라티노까지 포함되어 있어 주의를 요합니다. 사법당국은 증오범죄를 목격하거나 피해를 당했을 경우 반드시 신고해달라고 당부하고 있으나 당하기 전에 스스로 주의하는 것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본문에는 세상적으로 볼 때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당시에 약자로 취급되는 여자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입니다. 남편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딸과 함께 외롭게 살아가는 single mom인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그 여인의 딸은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의 은혜와는 상관이 없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 여인이 한 유대인 남자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듣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런 말을 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런데 여인은 어떻게 딸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까? 주님을 기쁘시게 한 믿음이 과연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서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그 여인처럼 믿음에 굳게 서서 귀한 응답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24-26절)


갈릴리에서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무리가 몰려들어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무리를 피해 예수님은 게네사렛 지역을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셨습니다.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으며 시비를 거는 종교지도자들을 떠나셨습니다. 여기서‘떠남’은‘물러남’을 뜻하며 영어로는 ‘retreat’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논쟁은 사람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데, 그때는 조용한 공간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휴식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뜻을 헤아리는, 은혜로운 물러남이 있어야 합니다. 전에 전도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6:31)하신 예수님이 이번에는 본인이 물러나십니다. 우리도 때로는 일상에서 벗어나 재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왜 두로에 가셨는지 마가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했다는 것으로 보아 전도보다는 조용히 쉬려는 의도로 두로에 가셨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가가 1~23절까지 정결의 문제를 언급한 다음, 이어서 두로에서 일어난 일들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본문도 ‘정결’이라는 주제가 계속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행 10:28)이었으나 예수님은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이 방문은 구약에 예언된 두로와 다른 이방 민족에 대한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시 87:4). 정결 규례에 대해 언급하신 예수님이 이방 지역을 찾아가신 것은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이 무너질 것에 대해 암시합니다. 


 


“숨길 수 없더라”에서 ‘숨기다’라는 동사는 ‘알아차리지 못하게 피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모르게 홀로 있고자 하셨으나 그러실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등불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숨겨 둔 것은 드러나게 되고, 감추어 진 것은 나타나기 마련(4:22)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부터 그랬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더러운 귀신이 들린 자를 고치시자 그 소문이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고(1:28), 가버나움에 사는 베드로의 장모와 각양 병자들을 고치신 후에 가버나움에 들어가 집에 계실 때에도 소문이 났습니다(2:1). 또한 두로와 시돈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갈릴리에 계신 예수님께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3:8). 예수님께서 두로에서 머무셨던 한 집도 아마 그때 예수님으로부터 치유 받은 사람의 집일지 모릅니다. 성경에 기록돼 있지 않지만 아마 두로와 시돈 지방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수로보니게 여인 이야기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예수님이 자기 딸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는데, 마침 예수님이 두로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즉시 찾아왔습니다. ‘엎드리니’단순히 엎드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을 향해 달려들 듯 엎드러지다’라는 뜻입니다. 귀신 들린 어린 딸의 상태의 심각함과 그 딸을 고치려는 어머니의 간절한 열망을 행동으로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발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자비를 구하는 행위입니다. 마가는 그 여인을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으로 소개합니다. 보니게(페니키아) 지경이 행정적으로 시리아 지방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생지로 보나 문화적으로 보나 명백히 이방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된 정결 규례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올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인 데다가 그녀의 딸은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여인과 유대인이 접촉한다는 사실 자체가 경건한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간청하다’라는 동사에 미완료 시제가 사용된 것을 보면, 여인은 귀신 들린 딸의 치유를 계속해서 간청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죽어가는 12살 된 딸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비록 수로보니게 여인과 야이로는 민족도, 성도, 사회적 신분도 달랐지만 심각한 병에 걸린 딸을 둔 부모로서 예수님께 딸의 치유를 간청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당혹스러운 대답(27절) 


그런데 여인의 간구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뜻밖입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개들’로 번역된 헬라어 ‘퀴나리오이스’가 ‘작은 개, 강아지’라는 뜻이 있으니 그렇게 심각한 표현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사람을 ‘개’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이 이방인 독자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는 점과 이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구절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개’는 충성이나 애정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꺼리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이방인’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다른 유대인들처럼 그 여인을 부정한 대상으로 취급한 것입니까 아니면 하잘것없는 여인이기 때문에 유대인 남성으로서 그렇게 대하고 말해도 좋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평소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로우시던 예수님의 모습과 비교할 때 그 여인의 청을 거절하시는 듯한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유대인들을 목자 없는 양들처럼 불쌍하게 여기신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차갑게 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난 며칠 동안 무리에게 시달리고 종교지도자들에게 공격을 받아 짜증나서 그러십니까? 그녀의 믿음을 시험하여 더욱 큰 믿음을 이끌어 내려는 시도입니까? 


 


성경은 성경으로 푼다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스토리가 마태복음 15장에도 언급됩니다. 그녀가 예수님께 와서 간청할 때,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15:22)라고 말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다윗의 자손’(1:1)은 종말에 오기로 약속된 이스라엘의 목자 곧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즉 그 이방 여인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이해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종말에 이스라엘의 목자가 와서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그 구원이 이방에도 미친다고 예언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에스겔 34:23를 보면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따라서 예수님이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라고 하신 것은 인종차별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순서에 대한 언급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라고 한 것은 나중에는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도 열릴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선교 원칙도 동일합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이방인에게 구원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에게 ‘먼저’복음이 전파되고 그리고 나서 이방인에게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자들인데, 다만 구원 대상에는 순서가 있다는 말입니다. 떡과 물고기를 무리에게 먹이신 사건은 종말에 메시아가 베푸시는 잔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6장에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장면이 나오고, 8장에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사천 명을 먹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아직 천국 복음을 통한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흘러넘쳐 갈 때는 아니다’라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여인의 반응(28-30절)  


사람들이 모욕을 당하게 될 때 흔히 보이는 반응은 ‘그래 내가 그렇지, 내 주제에’라고 하며 자기를 비하하고 숨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반응은 자기를 모욕한 자에 대해 분노하고 대드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은 후 흥분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다고 이렇게 함부로 말합니까? 당신이 나를 언제 보았다고 나를 무시합니까?’자기의 자존심을 건드린 예수님에게 덤빌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여인의 대답은 본문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릅니다. 모욕적 발언을 듣고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예수님을 높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개’라고 천시하는 현실을 직시한 것입니다. 여인은 구원을 받는데 이스라엘에 우선권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놀라운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급식 이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또 정결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리나 제자들의 우둔함과 대조됩니다. 또한 그 여인은 자기의 요청을 사실상 거부한 예수님의 대답에 좌절하지 않고 겸손히 자비를 구하는 믿음을 가진 자라는 점에서 믿음이 없다고 책망을 받은(4:40) 제자들과 대조됩니다. 여인은 자신이 ‘개’임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개도 부스러기를 먹을 권리는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메시아의 복에 참여하길 원하는지 밝힙니다. 여인은 부스러기 은혜만으로도 자기 딸이 살아날 수 있다고 믿으며 딸을 고치겠다는 소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외에 자기 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역사를 전심으로 바라는 사람은 자존심, 체면 등 내려놓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가장 비참한 자가 될지라도 소망은 주님께만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라고 선포하십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를 직역하면 ‘이 말씀 때문에’인데‘말’로 번역된 단어는 단지 ‘말’뿐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행동까지 포함합니다. 즉 여인의 말과 행동에 나타난 믿음 때문에 여인의 딸이 치유 받는다는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좀 더 자세히 기록하는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녀의 지혜와 믿음에 놀라기까지 하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8). 한글성경에는 생략돼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감탄사 ‘오’가 두 번 나타납니다. ‘오 예수님이’‘오 여자여’그만큼 예수님이 이 여인으로부터 감동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냉정한 태도는 여인에 대한 믿음 테스트였습니다. 여인은 지혜로운 답변을 통해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에서 ‘나갔다’는 현재완료 시제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딸에게 귀신이 나갔고 그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인이 집에 돌아갔을 때, 딸은 침대에 누워 있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는 것을 발견하였을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에서 자유함을 얻은 딸을 보면서 여인이 얼마나 기뻐하였겠습니까? 비천한 자신의 간청을 들어주신 주님을 기억하며 딸을 부둥켜안고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베푸신 은혜에 감격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을 통하여 일어납니다. 본문에 나타난 여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기에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까?


- 겸손이 녹아 있는 믿음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으로 붙드는 자에게 임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졌으면서도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을 잘 지킨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밀어내고 위선적인 종교생활을 하였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의 의를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을 낫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을 뿐입니다. 참 믿음은 문제에만 집착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방인 취급을 받았을지라도 겸손하게 그 부스러기라도 얻으려는 여인의 태도와 자기들이 가진 기득권만을 주장하는 종교지도자들의 태도가 비교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 음식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여인은 이방인이었지만 정결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왔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하는 것처럼 출신이나 배경이 그 사람을 부정하게 하지 못합니다.  이방인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돌이켜 주님을 믿으면, 즉 속사람이 정결해지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인은 자기가 주님의 은총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주님 앞에 어떠한 자존심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겸손이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족과 무가치함과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겸손이 녹아있는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셨습니다.


- 인내가 담겨있는 믿음


예수님은 사역의 우선순위가 유대인이라고 하시며 여인의 요청을 일단 거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그 말씀을 듣고 실망하거나 예수님을 원망하지 않고 여전히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자신을 ‘개’로 비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힌 자기 딸의 치유를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딸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즉시 응답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믿음의 위기입니다. 응답되지 않는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고 침묵하신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여인처럼 인내를 가지고 응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은 예수님의 푯대를 보고 달려가는 과정, 예수를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경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각자에게 주신 목표를 향하여 초점을 맞추며 나아가야 합니다. 히 12:1을 보면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자”라고 권면합니다. 인내로 경주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시라는 확신을 갖고 기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현실적으로 눈앞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루어질 것으로 받아들이고 눈에 보일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간절함이 배어 있는 믿음


수로보니게 여인의 소원은 사랑하는 딸이 치유 받는 것이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에게서 자유케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자기 딸을 위하여 어떤 희생이나 수모도 당하고 체면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인을 둘러싼 상황이 절망적이었음에도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이었지만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며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잠시의 거절에도 쉽게 물러서지 않습니다. 부스러기만으로도 좋다는 겸손함과 믿음으로 가지고 주님께 매달렸을 때, 주님은 여인의 믿음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여인에게 부스러기가 아닌 풍성한 은혜가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은혜를 갈망하는 자들에게 나타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예수님께 대한 간청은 끈질긴 기도의 모델입니다. 주님께 간절하고도 끈질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나가면서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을 통한 구속 사건에 관해 명확히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절박한 상황에서 겸손하고 확고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구원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았고 이방인들에게도 열릴 구원의 복음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어도 여인이 가진 믿음이 그 모든 것을 넘어섰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한 말에 담겨 있는 믿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수로보니게 여인으로 하여금 장차 임할 이방인의 구원을 먼저 맛보게 했습니다. 날마다 정결례를 행하는 유대인이요 남자요 백성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죄악으로 자신들을 더럽힐 뿐이었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방인이요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그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와 소원대로 딸이 온전하게 되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마가가 전달하려고 하는 강조점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거룩함과 온전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은 바라기 힘든 가운데 바란 믿음입니다. 참기 힘든 가운데 참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려면 이와 같이 겸손과 간절함과 믿음의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현재 어떤 문제를 가지고 계십니까? 자기의 부족함, 연약함, 죄책감 등을 인하여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망설이지는 않으십니까?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낙심하고 주저앉을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하는 갈급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부어집니다. 주님은 자기를 신뢰하고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예수님은 만민의 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시지만 개인적으로 주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할 때 우리를 둘러싼 문제가 아무리 어려운 것일지라도 다 해결해주십니다. 치료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러운 귀신에서 자유함을 얻은 딸을 부둥켜안고 감격하는 여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까? 여인은 말씀을 이해하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문제 해결을 받으려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스러기라도 좋다는 겸손이 있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겸손과 간절함과 인내가 녹아 있는 믿음을 사용할 때 주님이 감격하시면서 놀라운 이적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만을 붙드는 믿음을 통하여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시고 받은 은혜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