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참된 정결을 가르치신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6-27 15:25
Views
370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가 형성되면 하나의 공통된 가치관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부여하는 가치란 것은 상대적이며 시대적입니다. 환경이나 인식이 달라지면 가치도 변합니다. 전통적 가치관이 때가 되면 무너지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교회 내에 자리 잡은 종교적 전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어졌다가도 다시 생기거나 바뀔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의 투쟁은 교회 안에 있는 인간의 전통과 가치관에 기반을 둔 관습들을 정리하려는 노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는 끝임 없이 개혁되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그릇된 전통이 있지는 않은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문에는 ‘더럽다’, ‘깨끗하다’와 같은 정결과 연관된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과연 누가 깨끗합니까? 누가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다고 인정을 받겠습니까? ‘더럽다’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깨끗하게 될 수 있습니까?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을 계기로 제기된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참된 정결의 의미를 깨달으며 삶에 적용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며 언제라도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주님 앞에 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문제점 


- 사람의 전통을 하나님의 계명보다 중요시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고 예수께 항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이 자신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장로들의 전통을 침해하고 무시하는 것에 대하여 분노하였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이란 구약의 율법을 해설한 것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 전통은 원래 율법을 잘 지키도록 돕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율법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는 규례는 원래 구약성경에 없었습니다. 출 30:19에 의하면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물로 손발을 씻음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나아가야 했습니다. 레위기 15장에 의하면 피를 흘리면 부정하니 옷을 빨고, 몸을 씻고, 그릇을 씻을 것을 규정합니다. 나중에는 씻는 것이 전통 중의 하나가 되어 규례대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 정결하게 하지 않고서는 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외면적인 정결에 치중하다 보니 율법이 원래 의도했던 ‘하나님 앞에 거룩’이라는 내면적인 정결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장로들의 전통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자기들만의 울타리를 만들고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문제는 장로들의 전통을 따르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했다는 점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하면서 성경은 진실한 마음으로 부모를 공경할 것을 말하고 있는데 그들은 ‘고르반’이라는 전통을 만들어 부모 부양의 책임을 벗어버렸습니다. 고르반은 자기 재물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종교성을 과시하고 실제로는 자기 마음대로 재물을 쓰기 위하여 만들어낸 제도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였기에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는 위선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심(14-16절)


본문을 보니 예수께서 다시 무리를 가까이 부르십니다. 아마 무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몰려오자 잠시 뒤로 물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이 벌이는 논쟁을 들었을 것입니다. ‘불러’는 단순히 ‘부르다’가 아닌 보다 긴밀한 부름을 나타냅니다. 이는 특별한 가르침이나 중요한 교훈이 주어질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기 전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4:3-9)를 말씀하시면서 “들으라”고 말씀하신 것과 동일합니다. “듣고 깨달으라”에서 ‘들으라’는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깨달으라’는 기본 관념에 도전하고 새로운 것을 습득하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듣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잘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깨닫다’가 과거명령형으로 쓰여 깨닫기를 당장 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전달합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여기서 ‘들어가다’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은 사람은 부정해진다’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정해지기 않기 위해 음식을 먹기 전 손을 씻는 정결법을 철저히 지켰고, 일반 대중에게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 대신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십니다. 물론 정결 규례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은 유대교 전통이나 종교지도자들이 갖고 있던 정결규례의 틀 전체를 위협하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이 부정한 음식이며 무엇이 정한 음식인지를 가르치고(레 11장) 그 외에도 부정함과 정함에 대한 규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게 하거나 깨끗하게 하는 것은 그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선함과 경건함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17-19절) 


예수님은 무리에게 비유를 통하여 부정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씻지 않은 손 때문이 아니라 씻지 않은 마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 밖에서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을 때 무리가 알아들었까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처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물론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무리를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비유의 의미를 묻습니다. ‘묻자온대’는 미완료 시제로 제자들이 계속해서 물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막상 비유를 듣고 깨달아야 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열린 사람만이 그 의미를 더 알고자 하나님께 묻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무리’와 ‘제자’를 명백하게 구분합니다. 무리는 예수님이 베푸시는 이적을 보고 그를 통해 혜택을 얻을까 하여 다가오는 자들입니다. 반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본받기로 결단하며 따르는 자들입니다. 물론 제자들도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비유의 의미를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시며 그 비유를 자세히 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무리에게 했던 말을 의문문의 형태로 바꾸어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그 내용을 상기시킵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그 이유는 먹는 음식은 배로 들어가 소화되고 남은 것은 배설되는 것이므로 어떤 음식이든지 그 자체가 부정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주로 의지와 지각을 나타내는 곳,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솔직한 내면’을 의미합니다. 음식은 깊숙한 ‘마음’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마음으로 들어가야 할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씻은 손으로 먹든 그렇지 않든, 음식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사람을 깨끗하게 하거나 더럽게 하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음식물은 깨끗하다”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음식 정결법을 폐지하는 말씀으로, 당시로서는 혁명적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음식법과 관련해서 이같이 분명한 태도를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구약성경과의 연관성 속에서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주제였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총회에서 이방인 신자들이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야 하는 문제를 놓고 적지 않은 시간을 토론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하는 것이 유대 율법에 반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베드로에게 하나님은 세 번씩이나 환상을 보게 하십니다(행 10:28). 그러자 베드로가 가진 고정관념이 바뀌면서 이방 고넬료를 만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는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자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했다가 사도 바울로부터 책망을 받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음식물을 통해 정결한 삶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롬 14:17).


 


비유의 의미(20-23절)


예수님께서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고, 몸 안에 머무르지 않고 뒤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음식법을 지킨다고 해서 죄의 더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 실제로 음식이 그들을 더럽게 하기 때문에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분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이방의 악한 문화와 종교로부터 구별되기를 원하셨던 것으로, 음식 자체가 죄의 근원일 수는 없었습니다. 모든 음식은 몸에 필요한 영양소를 주고, 필요 없는 것은 배변을 통해 몸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어떤 음식이든지 그 자체가 부정한 것은 아니기에 음식은 우리의 몸을 더럽게 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속에서 나오는 죄의 성향과 그 행동들이 우리를 더럽게 합니다. 


 


‘악한 생각’이라는 표현은 뒤따라 등장하는 열두 개의 악한 행동들과 태도들을 포괄하는 표현입니다. 21-22절에 열거된 ‘마음속에 있는 악한 것들’은 십계명(출 20:1-17, 신 5:1-21)에 근거합니다: 살인(6계명), 음란과 간음(7계명), 도둑질(8계명), 속임과 비방(9계명), 탐욕(10계명).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등은 마음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이런 것들이 밖으로 표출될 때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같은 행위로 나타납니다. ‘음란’은 ‘간음’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 성적 부도덕에 관한 일체의 행동을 말합니다. ‘악독’은 악한 본성과 악한 행동들을 말합니다. ‘질투’는 문자적으로 ‘악한 시선’을 뜻하는데, 물질에 대해 인색하고 남을 도울 줄 모르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비방’은 문자적으로 ‘더러운 말’로 하나님을 향할 때는 ‘신성모독’을 사람에게는 ‘중상과 비방’을 뜻합니다. ‘우매함’은 어리석거나 생각이 없는 행동들을 말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몸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예민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자기 몸이 부정해지지 않도록 막기 위한 지나친 율법주의가 문제였습니다. 요즘은 이른바 건강을 위하고 외모를 가꾸는 것에 과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형식과 외모 이전에 그 속에 있는 중심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내장에 문제가 있으면 입에서 냄새가 나듯이, 심령이 부패해 있으면 영혼에서 풍기는 악취를 숨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열하신 악한 것들을 하나하나 읽어봅시다. 어느 것이 지금 내 마음 속에 역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마음에 이런 것들이 가득하고도 얼마든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할 수 있습니다. 위선적인 종교 행위로 얼마든지 자기 마음을 감출 수 있습니다.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정말 자신이 경건하다고 확신하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약함을 보시고 보혈을 흘려주셨습니다. 또 성령을 부어 주셔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시고 그분의 뜻을 이루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악한 생각’들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자세


참된 정결을 우리의 삶에서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신앙의 본질에 충실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전통적으로 술이나 담배 등을 금해 왔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악이 그것들을 통해 드러나는 경우가 많기에 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곡되어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이 신앙인양 여겨지고, 이 때문에 신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결국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전통이나 규례보다 진리와 본질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손이나 몸을 씻는 규례를 정하신 본래의 의미를 말씀하십니다. 그런 규례를 주신 이유는 손이나 발이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고 자신들의 부정함을 깨달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죄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은 인간의 마음과 상관이 없는 외적인 것들을 씻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속사람이 나날이 새로워지지 않는 한(고후 4:16), 외면적인 정결은 아무리 장로들의 전통을 철저하게 지킨다 하여도 무익할 뿐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집 정원에서 기르는 박하와 운향과 채소의 십일조까지 일일이 챙겨서 드렸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지향하는 공의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외면적인 치장에만 열중했기에 예수님은 그들의 행위와 외식주의를 가차 없이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음식물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더럽게 하는 근원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음식을 먹어야 하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 문제에 얽매이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아무리 율법에 규정된 정결한 음식을 먹었어도 형제를 미워하고 비판한다면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그동안 음식을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나눔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구분하는 기준을 삼았는데 이제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시점에서 더 이상 그러한 율법의 규례를 가지고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타성에 젖어서 하는 미적지근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을 통한 주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지속적인 열심이 있고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무늬만 크리스천, 명목상의 크리스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외식을 버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참된 성결의 삶에 충실해야 합니다. 


 


- 정결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용서를 받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고 그들에게 이미 경고하셨습니다. 용서 받기 위한 전제조건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용서함을 영원히 얻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회개해도 용서를 받지 못하는 큰 죄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들의 죄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하나님께 용서해달라고 구하지 않아 죄사함을 받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자신의 완전한 부패함과 구원하기에 스스로 무능력한 것을 깨닫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정결케 할 수 있습니까? 진실된 마음으로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밧세바와의 간음으로 선지자 나단의 책망을 받은 다윗이 철저하게 회개하며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0,17). 하나님은 상한 심령, 통회하는 마음을 기뻐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마음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한 채 드리는 가식적인 제사가 아닙니다.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세리처럼 가슴을 치며 죄인임을 고백할 때 하나님은 인도하심으로 우리 죄를 사해 주실 것입니다. 깨끗한 마음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때만 하나님을 보는 복을 받게 됩니다(마 5:8). 그러려면 날마다 마음을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혈로 덮어야 합니다. 바울은 무엇이든 더러운 것은 없고 더럽게 생각하는 마음이 문제라고 했습니다(롬 14:14). 내면으로부터 거룩함과 온전함이 흘러나오도록 날마다 우리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들이라고 하심으로써 새로운 정결과 부정의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모든 음식물이 깨끗하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구약의 정결규례와 음식법 전체의 유효 기간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구별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세우는 중요한 도구인 정결법을 폐지하신 발언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유대인만의 메시아가 아닌 이방인의 메시아도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친히 대속제물이 되어 인간의 모든 불의와 부정을 속죄하고 정결하게 하실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선언입니다. 불의하고 부정한 세상 가운데서 거룩하고 정결한 백성으로 불러 주셨는데, 나는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마음을 지키며 살고 있습니까?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9,10)   


 


‘거룩’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거룩하고 교회 밖은 거룩하지 않고 성직자는 거룩하고 평신도는 거룩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거창한 의식 속에 진행되는 예배는 거룩하고 우리의 삶으로 드리는 예배는 거룩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장소, 사람, 의식 자체가 거룩하거나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부정하게 하는 것은 타락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참된 정결은 의식적으로 무엇을 지킨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깨끗한 삶을 사시면서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 받으며 이 땅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풍성한 위로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