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외식을 지적하신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6-20 14:31
Views
483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는 크든 작든 그 나름대로 전통이 있습니다. 그 사회에 속한 사람들은 그 전통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기보다 전통을 그대로 지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가정에는 그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풍이 있고, 학교에도 전해 내려오는 독특한 학풍이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교단에 소속되었는지에 따라 교리나 예배 형식이 조금씩 다릅니다. 또 같은 교단에 속한 교회라도 담임 목사의 목회 비전이나 교인들이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었는가에 따라 예배 분위기나 사역에서 중점을 두는 것이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 사회에 전해 내려오는 종교적 전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전통을 어떻게 평가하셨습니까? 본문은 지금까지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했거나 배척했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시비를 거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통과 하나님의 말씀이 충돌할 때 어느 쪽을 따라야 합니까? 그 동안에 당연하게 여기며 지켜왔던 습관이나 전통을 신앙생활의 절대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금주와 다음 주는 이면적 정결과 내면적 정결, 즉‘정결’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형식주의나 율법주의를 버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정결한 삶과 사역을 사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한 열매를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문제 제기(1-5절)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중 몇 명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바리새인들은 앞서 두 번에 걸친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님을 대적했고(2:23-28; 3:1-6), 심지어 헤롯당과 더불어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의를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 역시 앞에서 예수님을 바알세불에게 사로잡혔다고 음해한 적이 있었습니다(3:22). 그런데 예수님을 대적하는 두 그룹이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종교지도자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모습 속에서 마가는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직면하게 될 도전과 수난을 미리 암시합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꼬투리를 잡아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려고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않은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정한 손’은 직역하면 ‘일상적인 손’이라는 뜻입니다. 평범해서 별로 가치가 없어 아무나 공유할 수 있기에 ‘더럽다’고 여깁니다. 이 어구 뒤에 ‘씻지 않은 손’이라는 뜻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진 것은 유대인의 관습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방인 독자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씻지 않았다’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정한 예법에 따라 씻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제자들이 당시의 정결법에 무지해서 그렇게 행동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 예법을 따르지 않으셨기에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행동했을 것입니다.  


 


마가는 이야기의 진행을 잠시 멈추고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문제가 된다는 내용을 삽입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손을 씻지 않으면 음식을 먹지 않는데 이것은 ‘장로들의 전통’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장로’는 교회의 직책이 아니라 ‘조상들’을 의미합니다. 곧 조상 때부터 계속해서 내려온 관습이라는 것입니다. ‘전통’은 문자적으로 ‘전해 받은 것’을 의미하는데 율법을 해석하고 물려주는 랍비들의 전문 용어입니다. ‘지키어’는 ‘힘껏 지지하다’라는 의미와 더불어 ‘통제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전통이 백성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장로들의 전통’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포로기에 접어들면서 에스라와 같은 학사들을 중심으로 율법을 해석하면서 생겼습니다. 그들은 특히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지켰던 거룩함에 대한 규례를 모든 백성이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한다고 확대 해석하여 ‘미쉬나’라고 부르는 일종의 규례집을 만들었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은 원래 율법을 보호하고 율법을 잘 지키도록 돕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이것을 ‘율법의 울타리’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울타리를 보다 견고하게 치려는 과잉보호와 보다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려는 열심이 율법의 해석과 적용을 무리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율법 자체보다도 ‘장로들의 전통’을 오히려 더 중요하게 여겼고 율법을 왜곡시키거나 과장했으며 심지어 율법에서 명령하지 않은 것들까지도 준수 사항으로 집어넣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보통 사람들이 이런 복잡한 정결법을 다 기억하고 지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종교지도자들은 그런 사람들을 걸핏하면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본문에서 마가가 언급한 정결 규례가 그 대표적인 실례입니다. 구약 율법에 보면 제사장들은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물로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출 30:19;40:12). 그러나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례는 율법에서 규정한 일이 없었음에도 ‘전통’의 하나로 만들어놓고 모든 유대인들에게 적용시켰습니다.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외면적 정결은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했으므로 그 종류도 ‘여러 가지’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에서 이방인들과 접촉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장로들의 전통’은 외면적인 정결에 치중되었고, 율법이 의도했던 내면적 정결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그 전통을 지킴으로 자신들의 거룩함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은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행동을 문제 삼아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보다 큰 주제로 대화의 이슈를 옮겨갑니다. 5절에서 ‘준행하다’라는 말은 ‘살아가다’라는 의미입니다. 곧 당신의 제자들은 왜 조상들의 전통을 따라 살지 않느냐면서 제자들을 빌미 삼아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합니다. 


 


예수님의 예리한 지적(6-8절)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에 대해 직접 대답하시지 않고, 그 질문의 근간이 되는 그들의 전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외식하는 자’로 번역한 헬라어 ‘휘포크리테스’는 원래 연극에서 여러 차례 가면을 써야 하는 배우를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음과 중심을 숨긴 채 단순히 연기하거나 말하는 사람’으로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위선’이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의 행동상의 불일치’를 뜻합니다. ‘부정한 손’이 정결예식에 따라 겉을 씻지 않은 손을 의미한다면, ‘외식’은 겉만 씻어 놓은 부정한 내면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삶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삶의 차이는 하나님을 향한 섬김의 마음이 담겼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종교지도자들의 태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에 그들의 섬김은 하나님 보시기에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29:13을 인용하십니다. 흥미롭게도 주전 8세기 시대에 활동했던 이사야가 당대 유다 백성의 위선에 대해 비판한 것을 예수님을 비판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해 직접 예언한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이사야는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에 대해 고발하는데, 여기서 ‘너희’는 이사야 당시 유다 백성들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가르치는 일을 담당했던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그렇다면 가르치던 ‘너희’가 역시 가르치는 일을 담당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잘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그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으면서도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했기 때문에 즉 마음과 입술이 불일치하기 때문에 위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사람의 계명’을 ‘하나님의 계명’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위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계명들’은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계명’은 단수 형태로 되어 있어 인간이 만든 여러 전통과 대비되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참 뜻’(신 6:4-5)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권위의 대명사였던 ‘장로들의 전통’을 하나님과 대립하는 세력인 ‘사람들의 전통’으로 깎아내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려는 목적으로 말씀에 근거한 전통을 만든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율법의 원래 정신을 놓치게 되었습니다. 구약은 장차 오실 메시아에 관한 책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율법의 진정한 의미와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들은 버린 채 사람들에게서 전해 내려온 것들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종교가 생명을 잃어버린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빈 들까지 따라 나왔다가 기적적으로 떡을 먹게 된 오천 명의 무리 역시 기적의 현장에서 떡을 먹을 때 손을 씻는 정결례를 행하고 먹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리는 바리새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부정한’사람들이었습니다. 마가는 무리를 부정한 자들이라 하지 않고 도리어 메시아와 함께 생명 넘치는 잔치를 벌인 것으로 기록합니다. 거기에는 치유가 있었고 회복이 있었고, 먹고 배부른 풍성함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29:13의 인용은 이사야 당시의 율법적인 신앙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왔듯이 지금은 껍데기만 남은 유대교에도 동일한 심판이 임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위선자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 위선자들의 예배는 헛되다는 것이 예수님의 결론입니다. 


 


위선적인 고르반 전통(9-13절)  


하나님이 명하신 율법을 더 잘 지키겠다는 의도로 만들어 놓은 전통이 실제로는 하나님의 요구를 피해 가도록 만드는 장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요구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점점 더 사람들의 전통에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점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무너뜨리고자 했던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이 붙들고 있는 전통 뒤에 숨겨진 교활함을 폭로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다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예로 ‘고르반’을 언급하십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라는 제5계명, 그리고 이와 관련된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7)라는 규례입니다. 고르반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율법(민 30:2)에 기초한 것으로, 하나님께 바칠 특별한 돈이나 제물을 가리킵니다. 원래 ‘고르반’이란 ‘만일 ... 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재앙을 내릴지어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바치겠다는 맹세’란 뜻입니다. ‘고르반’이라 불리는 제도는 그 맹세가 취해진 재물은 하나님께 드려지도록 구별되었기에 다른 목적으로 사용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가진 재물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면 그 재물을 가지고는 부모를 위해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르반 제도에 함정이 있습니다. ‘고르반’으로 구별된 재물이 즉시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드리기는 드리는데 언제 드린다는 기약이 없기에 그 재물을 계속해서 소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르반’은 자기 재물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과시하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분으로 부모에 대한 부양 의무를 합법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낸 제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계명으로 다른 사람들이 지키는지 살피며 신앙을 핀단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장로들의 전통을 “너희의 전한”전통이라 하시면서 종교지도자들이 수동적으로 그 전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죄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폐하며’는 ‘백지화시키다, 권위를 무시하다’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참히 지워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부정한’손을 갖고 있습니까? 제자들입니까 아니면 종교지도자들입니까? 전통을 내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일은 고르반 이외에도 당시 유대 사회에서 적잖이 시행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자신들의 전통을 섬깁니다.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금하면서 더러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는 관대합니다. 주님은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짓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더 의식하며 종교적으로 거룩해 보이고 열심을 내며 겸손한 듯이 처신하는 것이 종교지도자들의 특징입니다. 


 


우리의 자세


어떻게 하면 외식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가질 수 있습니까?


- 형식적 종교 행위가 아닌 참된 믿음을 가집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붙들어야 할 것은 그림자인 율법이나 제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라는 실체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아무리 정결하려고 노력해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완전할 수 없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를 내고 주일을 지키고 여러 가지 봉사 활동을 하는 그 자체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공로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오직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은 나무의 생명이 뿌리에서 줄기를 지나 가지에게 흘러가듯 예수님께 믿음의 손을 뻗을 때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 속으로 흘러들어 갑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행위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와야 합니다.


 


- 사람의 전통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듭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종교적 정결 의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철저하게 말씀을 지키는 듯 행세했지만, 실제로는 율법에 기록되어 있지도 않은 것을 지키면서 자신을 깨끗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잘못은 현대의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충실히 공부하지 않고 그저 껍데기만을 붙들면서 ‘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교회 내에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태도를 갖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본질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구약의 율법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의 원리와 본질을 이해하고 충실하게 이행해야 합니다. 참된 정결은 전통을 맹목적으로 따르는데 있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서 나옵니다. 


 


- 진정한 고르반을 드립니다 


진정한 고르반은 나 자신 전체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고르반은 나에게 속한 어떤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전부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내게 있는 시간, 재물, 달란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범사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법의 지배를 받고,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르게 됩니다. 우리의 일부를 고르반으로 드리는 수준을 뛰어넘어 우리 전부를 고르반으로 드려야 하는데, 그러려면 예수님을 매순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고르반의 롤모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를 위한 고르반으로 오셨습니다. 이 땅에서 오셔서 온전한 섬김의 본을 보이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하나님께 드려진바 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온전한 고르반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는 제자의 삶입니다. 


 


나가면서


역사적으로 종교가 타락할 때 정치와 결탁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이기적인 욕망에 편승하여 부패하는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전통이라는 틀에 묶여 전통이 가진 원래의 의도를 잃게 될 때 사람의 생각을 묶어 버리는 고정관념이 되어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일단 그 속에 빠져버리면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진리를 찾아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말씀보다 전통적인 관례나 법을 가지고 마치 그것이 신앙의 표준이 되는 것처럼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구실로 이용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기 부모를 섬기기 싫어하여 고르반을 선언하였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 고르반 같은 것이 있지 않습니까? 비본질적인 관습과 형식에 얽매여 사랑과 긍휼의 계명을 저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위선자가 되지 않게 입술만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우리의 삶과 생각을 비춰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사모하며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귀중하게 보십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말씀을 사모하는 것과 형식을 따르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며, 기쁜 마음으로 봉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씀을 사랑하지 않아도 동일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공경하지만 마음은 내게서 멀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 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대적한 종교지도자들은 살인죄, 간음죄 등 악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라기보다 믿음의 무늬만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체이시기에 우리들과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였습니다(롬 1:9). 가장 중요한 정결은 손을 씻고 안 씻고가 아니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느냐 안 드리느냐에 달렸습니다.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딤후 1:3) 우리가 먼저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