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연합의 은총(시 133)

Author
Myung Myung
Date
2006-04-30 19:28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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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133편 연합의 은총



요즈음은 자식들을 하나나 둘밖에 나지 않아 형제나 자매들이 별로 없지만 제가 자랄 때만 해도 서너 명 정도는 흔히 가졌습니다. 저희 친할머니는 무려 13명이나 나셨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정점으로 아버지 형제들, 그리고 저의 형제와 사촌들까지 합하면 무려 75명이 됩니다. 동기들이 너무 많아 힘드셨는지 저희 부모님은 둘만 낳았기에 저는 동생 하나밖에 없습니다. 동기들이 많다보면 그 안에서 생존경쟁이 벌어집니다. 미워하고 시기하고 말로 싸우고 치고받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렇게 싸우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기에 커서는 사이가 좋아집니다. 특히 집안에 큰일을 치를 때, 즉 상을 당하거나 결혼식이 있을 때 형제들이 많은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고 좋은지 모릅니다. 물론 같이 피를 나눈 형제도 때로 다투고 갈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물며 자라온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지내다보면 어찌 문제가 없고 갈등이 없겠습니까? 다투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하나 되는 것이 쉽지 않기에 시편 저자는 형제가 하나가 되어 함께 지내는 것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가 하며 노래합니다.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획일성을 뜻하는 uniformity. 개개인의 특성보다는 전체로서의 통일성을 강조합니다. 물론 군대와 같이 명령 계통이 필수적인 곳에서는 획일성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입은 군복을 uniform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모든 단체에서 획일성이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나친 획일성은 도리어 구성원들에게 부담을 주고, 일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의욕을 잃게 합니다.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하는 또 다른 단어는 연합하여 하나를 이룬다는 의미의 unity. 서로의 특성이 다른 것을 인정하고 각자의 기량을 발휘하면서도 어떤 명분 아래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 됨은 대개 unity를 가리킵니다. 자라온 배경이 틀리고, 성격이 틀리고, 사회에서 가진 신분이나 처한 환경이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이유만으로 주 안에서 한 형제, 자매들이 되어 서로 섬기면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룹니다. 참된 하나 됨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피를 나눈 육신의 형제자매보다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일년 만에 Dixon Lake에 와서 팔로마가족잔치를 가집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에 나와 예배와 교제를 통하여 주안에서 형제 자매됨을 확인하고 나누게 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교우들을 위하여 다채로운 게임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작년 가족잔치 때는 너무 더워서 그늘에만 있으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약간 흐리기에 활동하기 아주 적당합니다. 예배 후에 음식을 함께 나누고 행사준비팀에서 정성껏 준비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게임을 합니다. 아무리 친선 경기라 하여도 이기고 싶은 것이 모든 참가자의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가하는 형제나 자매들이 서로 격려하고 양보하고 서로를 세운다면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달라도 다르구나 하는 인상을 주게 됩니다.  



133편은 부제가‘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12지파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때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크게 나타났는지 그들 모두가 성령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이 시간 야외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들도 하나가 되어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성령의 기름부음을 충만히 체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이 구절을 들여다보면 형제나 자매들이 부대끼며 함께 지내는 것이 쉽지는 않다는 전제가 깔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한다는 것은 단지 한 가정의 형제들이 사이좋게 지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가끔씩 교회들이 갈등하고 분열하고 싸우는 모습이 신문에 보도되고 덕스럽지 못한 내용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을 줍니다. 그것은 결코 기름부음 받은 성도들의 성숙한 모습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어떻게 하여 열두 지파가 생겨났습니까?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왔을 때 작은 딸 라헬을 사랑했지만 라반의 계략에 말려 큰딸 레아와 먼저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자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하여 칠년을 더 봉사함으로 라헬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 결혼을 계기로 상처를 받은 사람이 레아입니다. 그가 남편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아들을 많이 낳아 남편의 관심을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라헬은 라헬대로 자신이 아이를 제대로 낳지 못하니 자신의 몸종 빌하를 주어 아이를 낳게 합니다. 이에 레아도 질세라 자신의 몸종 빌하를 남편에게 또 줍니다. 레이와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아들들을 출산했지만 하나님께서 이 열두 아들을 다 축복하셔서 이스라엘의 열두지파가 되게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같지만 네 명의 엄마들에게 난 아들들인지라 자칫하면 쉽게 나뉘어 질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이스라엘은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로 분열이 되었습니다. 시편 133편은 다윗의 시라고 하니 아직 그런 분열이 있기 전 상황입니다. 열두지파가 다 하나님의 성전에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하나 된 모임에 임하는 복이 무엇입니까?

1. 하늘의 신령한 복

성도의 하나 됨이 마치 아론의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그의 수염에 흐르고 그의 옷까지 흘러내림 같다고 표현합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되는 물건이나 하나님께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기름을 붓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리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때 사용되는 기름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방법대로 만들어야 합니다. 기름 만드는 법을 비밀로 하지 않은 이유는 기름 그 자체에 어떤 신비적인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출 30장에 보면 그 기름을 만드는 방법이 나옵니다. 제사장들과 제사에 사용되는 모든 기구와 그릇들에 귀한 향품들과 감람유를 섞어 만든 이 기름을 바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특별히 구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2절은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기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던 때를 묘사합니다.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니 그 기름이 아론의 머리를 타고 수염을 적시고 계속 흘러내려가 그의 옷깃까지 흘러내립니다.



기름은 신약에서 무엇을 상징합니까? 성령. 성령은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합니다. 죄악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모든 유혹과 시험을 이기게 합니다. 성령이 임할 때 능력 있게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나면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행 1:4,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말씀을 듣고 120명 정도가 다락방에 모여 베드로와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더니 기도한지 열흘 째 되던 날인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이며 성령이 임하자 그들은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였다. 이 장면을 본 무리들이 듣고 소동하고, 놀라며 의심하기도 하였습니다. 모여든 무리를 향하여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며 복음을 제시하니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성령의 충만할 때 우리의 인격이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과 은혜로 충만해집니다. 또한 성령은 하나 되게 하는 영이기에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주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성령의 기름부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도들의 아름다운 연합은 자기만의 이익을 위하여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세상의 모임들과는 구별되어 좋은 향기가 나며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일단 성령 충만을 받으면 그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은혜가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 충만이 지속적으로 사도들에게 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경건의 훈련을 쌓아야 성령 충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둘 이상만 모이면 누가 보스인가 파워게임을 벌이며 나뉘려는 세상에서 성도들이 주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강력한 전도의 기회가 됩니다.



형제 연합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생의 복을 주십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영생입니다. 그 은혜가 임하면 삶에 활력이 있고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2. 이 땅의 기름진 복

두 번째로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성령이 충만해지는 영적인 복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데 필요한 물질과 건강의 복도 주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될 때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것도 해결이 됩니다. 요삼 1:2,“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하며 요한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둔 사람들이 받을 복은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헐몬 산에서 시온 산까지 이슬이 내려오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헐몬 산은 이스라엘 최북단에 위치한 해발 9000ft의 산으로서 만년설이 덮여 있습니다. 이 눈이 녹으면서 수증기가 되어 올라가면 주위에 있는 산과들에 많은 이슬이 내립니다. 그 이슬의 양이 아주 많기에 주위에 있는 들은 충분한 수분을 공급받게 되어 곡식들이 자라고 과일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곳 남가주도 다른 때 같으면 누렇게 타버렸을 풀들이 요즈음은 늦은 비로 인하여 제법 푸릇푸릇한 색깔을 띠고 있어 보기가 좋습니다. 바짝 마른 팔레스타인의 사막에 내리는 이슬은 단비와 같아서 식물들을 소생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헐몬’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가장 높은 산이고 ‘시온’은 남왕국 유다의 산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면서 하나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형제간의 연합은 자신의 백성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잘 나타냅니다. 형제가 화목하여 하나됨을 이루는 것은 삭막한 세상에 청량제 구실을 하며 생명을 공급합니다.  



* 교회가 하나 되는 비결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 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됨에 대하여 그의 서신중의 하나인 에베소서에서 말씀합니다. 자신이 계시를 통하여 깨달은 비밀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방인들에게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베풀어졌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교회가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의 모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 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도 원만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의 연합과 관련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2)  권면합니다.  



1)  겸손

겸손은 마음을 낮춘다는 의미를 가지며 1세기에는 종들이나 가져야할 자세였으나 예수님이 직접 낮아지신 후에 모든 성도들이 다 가져야할 자세가 되었습니다. 잠 13:10,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바울은 빌 2:3에서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라고 하며 겸손의 본보기를 예수님에게서 찾습니다.  2:7,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 겸손의 극치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아가페의 사랑가운데서 형제자매를 대하는 것입니다.



2)  온유

영향력이 크고 존경을 받던 위대한 지도자들이 지녔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마음이 온유하다는 것입니다. 온유는 그저 부드러운 성격이 아니라 자신의 성품을 하나님께 의지하며 자신을 콘트롤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이 가진 권리를 기꺼이 포기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대인관계에서 쉽게 노하지 않고 자신을 제어할 줄 압니다. 가족간에도 대화가 단절되고 가까운 친구 사이에도 벽이 생기며, 불신 풍조가 날로 깊어가는 요즈음 따뜻한 마음, 열린 마음, 자기를 다스리는 온유함을 가진 성도들이 더욱 필요합니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것이 바로 온유한 주님의 모습입니다. 겸손과 온유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분리할 수 없습니다.



3) 오래 참음

오래 참음은 분노를 일으킬 만한 상황에서도 참는 것을 말합니다. 고전 13장에 언급되는 사랑의 속성 중에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오래 참음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열매를 언급할 때도 오래 참음이 언급됩니다.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오래 참기가 쉽지 않으나 성령의 도움으로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오래 참음 역시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4) 서로 용납

주님의 일을 잘해보려는 열심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다른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생기는 갈등이나 의견 차이를 잘 해결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함께 몸을 맞대고 사는 부부들도 살다보면 갈등이 계속 생기는데 더구나 살아온 배경과 환경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서 갈등과 긴장이 없을 수 없습니다. 서로 용납한다는 것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상대방의 약점과 허물을 포용하며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자세를 의미합니다. 서로 포용함이 없이 화평하게 될 수 없고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먼저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품으려는 노력을 보여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의 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궁극적인 목표는 만유를 통일하는 것 즉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 되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바벨탑을 쌓을 때 사람들은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창 11:4) 하며 인간들끼리 하나 되려는 모습을 보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하되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하여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서로 용납함이 필요합니다. 이것들은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은 어떠합니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자연스럽습니까 아니면 어색하십니까? 사소한 이유로 마음을 닫아 교제하기를 꺼려하는 형제나 자매들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가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그 사랑에 감격하여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물론 껄끄러운 말이나 무례한 행동으로 부담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남에게 실례가 된다는 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그런 행동을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을 나누기 힘든 사람들도 실상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껄끄러움과 서먹서먹함을 극복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인간관계로 일어난 상처들이 치유가 되고 서로 용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높아지기 위하여 낮아져야 합니다. 얻기 위하여 포기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역설적인 것처럼 보이는 기독교의 진리를 우리의 삶에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을 알고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서로를 알고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그럴 때 이웃과 하나가 됩니다. 그 결과 기쁨이 충만하여 집니다. 주안에서 서로를 남을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의 뜻을 존중하여 서로를 섬기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가 되고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전 4:12,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이 자리에 있는 팔로마교우들은 하나님께서 신앙생활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붙여주신 믿음의 동역자들임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한 몸으로 허락하신 것을 깨닫고 영적으로 잘 자라도록 서로를 격려하고 잘 세워가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은 형제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야 합니다.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성령 충만을 받을 뿐 아니라 가정과 사업과 사역 위에 아름다운 열매가 많이 맺어지고 향기를 발하며, 헐몬 산의 이슬처럼 삶 속에서 싱그러움과 활기를 마음껏 드러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