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1-11)

Author
Myung Myung
Date
2006-04-25 17:19
Views
3753
제가 3년마다 인용하는 신앙의 글이 있습니다. 매번 이글을 읽을 때마다 도전이 되고 다시 한번 저희 교회를 돌아보게 되고 제 사역을 돌아보게 됩니다. 전에 들어보신 분들도 있겠고, 오늘 처음 듣는 분들도 있겠는데 복음을 전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주님의 뜻인 것을 기억하며 들으시기 바랍니다.



Washington Cathedral에서 시무 하는 Wedel 목사가 쓴 인명구조소 (Lifesaving Station)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배가 자주 파선이 되는 어느 위험한 해안에 작고 보잘것없는 인명구조소가 있었습니다. 건물은 그저 움막 같았고 배는 한 척밖에 없었으며 헌신된 몇 사람들이 쉬지 않고 바다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일하는 열악한 환경에 대하여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파선이 되어 표류하는 자들을 열심히 찾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구조소를 통하여 구조가 되었습니다. 그곳은 점차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구조 받은 사람들 중의 일부와 인근 지역에 살며 그곳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 구조소에 참가하여 무엇인가 해 보려고 자기들의 시간과 돈을 들였습니다. 새로운 구조선들이 구입되고 새로운 구조원들이 훈련되었습니다. 인명구조소에 새로운 멤버가 된 사람들은 기존 건물이 너무 작고 초라하고, 가진 장비가 너무 빈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다에서 구조된 사람들을 위하여 좀더 안락한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간이침대 대신에 보다 좋은 침대와 가구를 들여놓았습니다. 인명구조소는 점차로 멤버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그곳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되었습니다. 그러나 멤버들은 바다에 나가 구조하는 일에 점점 관심이 없어지게 되었고 대신 사람들을 고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구조 업무를 수행하게 하였습니다. 인명구조소의 설립 취지가 새겨진 현판과 모형 구조선은 여전히 건물 안에 있었으나 그곳에서는 주로 각종 사교 활동들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바로 이때에 어떤 커다란 배가 해안에 난파하여 고용된 구조원들은 익사 직전에 있던 사람들을 잔뜩 구조소로 데려왔습니다. 그들은 추위에 떨고 옷은 물에 젖었습니다. 그들은 더러웠고 병이 든 사람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구조된 사람들이 인명구조소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였습니다. 흑인도 있었고 아시아인도 있었습니다. 우아하던 클럽은 갑자기 지저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관리자는 재빨리 클럽 바깥에 샤워하는 곳을 두고 구조된 사람들이 클럽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거기서 씻도록 하였습니다.  



다음 번 회의에서 멤버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멤버들은 해난 구조가 별로 유쾌하지 못한 일이요 클럽의 정상적인 활동을 하는데 장애가 된다 하여 이제 구조 활동을 그만두기 원하였습니다.  어떤 멤버들은 클럽의 주된 목적이 인명을 구조하는 것이라 주장하였고 아직도 이 장소가 인명구조소라고 불리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그 회의에서 소수의 주장이 부결되었고 만일 난파된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구하고자 한다면 그들만의 독자적인 인명구조소를 시작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소수의 그룹은 그곳을 떠나 새로운 인명구조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자 그 새로운 구조소도 전에 있었던 곳과 같은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그곳도 사교클럽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인명구조소가 근처에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그 해안을 방문한다면 그곳에 호화로운 클럽들이 해변을 따라 많이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안에서는 배들은 여전히 난파를 당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어 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됩니까? 인명구조소가 생긴 원래의 목적은 파선되어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많아지고 구조소가 커지고 각종 활동이 많아지게 되니 본래의 존재 목적, 인명구조소의 사명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곳은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시간을 보내며 즐기는 사교 클럽이 되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하는 것이 귀찮아지게 되고 물에서 건져진 사람들의 지저분한 모습이 자기들의 깨끗하고 우아한 분위기에 맞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이글은 사실 교회에 주는 메시지입니다. 개척 교회 시절이나 교회가 작던 시절에는 모이기를 힘쓰고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도 합니다. 점차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교회에 많아지게 됩니다. 자연히 취미가 같거나 배경이 비슷하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게 됩니다. 헌금이 많아지니 크고 좋은 건물을 짓습니다. 새로 지어진 건물 안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각종 행사들이 자주 벌어집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는 일에는 점점 관심이 없어지고 교인 상호간의 친목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목회는 기존교인 관리에 중점을 둡니다. 예배는 간단하게 빨리 보고 남은 시간에 여가 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자신들이 직접 물에 뛰어들기보다 고용된 구조원들에게 물에 빠진 사람들을 건지게 하듯이 전도나 사역은 사역자나 특별히 은사가 있는 사람들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들은 하지 않습니다. 잘 훈련받아 사역에 직접 참여하려고 하기보다 관망자가 되어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어느 교회든 이런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여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순절과 부활절을 보내면서 다시 한번 교회의 본질, 사역의 본질을 생각하며 우리 교회나 우리가 속한 목장이 혹시 위의 글에 나오는 인명구조소처럼 되려는 경향은 없는지 점검하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누구인지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어떤 일을 하기 원하시는지 깨닫기 원합니다.



사도행전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사도행전의 수신인은 누가복음과 같이 데오빌로입니다. 데오빌로가 실제 인물인지 상징적인 인물인지 성경에 자세한 언급이 없으니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그 이름의 의미가 ‘lover of God’ 즉“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누구에게나 주시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쓴 글은 누가복음을 가리킵니다. 그 당시에는 인쇄술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였기에 두루마리의 크기에 제한이 있었습니다. 누가는 첫 번째 두루마리에는 누가복음을 기록하였고 두 번째 두루마리에는 사도행전을 기록하였습니다. 참고로 누가복음은 신약에서 가장 두꺼운 두루마리요 사도행전을 합치면 누가가 쓴 글이 양으로 볼 때 신약 전체의 1/4이나 됩니다. 비록 두루마리는 둘로 나뉘어져 있으나 누가가 쓴 두 책의 초점은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전편에는 공생애 동안 활발한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 후편에는 성도들의 삶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활발히 역사 하시는 예수님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는 예수님에 관한 중요한 내용이 모두 언급됩니다.

“예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때부터”(2절) - 공생애 시작

“고난을 받으신 뒤로”(3절) - 십자가

“자기가 살아 계심을”(3절) - 부활  

“예수께서 올라가실 때에”(10절) - 승천

“다시 오실 것이다”(11절) - 재림



탄생          공생애 시작         십자가      부활        승천     성령강림     재림

  |------⌇⌇-------|--------------------|-----------|-----------|-----------|-------------|

           30년                         3년               3일         40일                10일           ?



* 예수님의 사역은 계속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시고 가르시기 시작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고,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이 사도들을 통하여 성령으로 계속하고 행하고 가르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의 계속성을 강조합니다. 먼저 이 땅에서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신 후에도 그 사역이 중단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택하신 사도들을 중심으로 성령의 역사가 계속하여 일어났습니다.  

  

* 예수님은 승천하시기전까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해를 받으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종교당국자들에게 체포된 후 심문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많은 수난을 겪으셨다는 말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 다시 살아나셔서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나타나신 것임을 강조합니다. 사복음서와 고린도전서 등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께서 적어도 9번 이상 유대와 갈릴리에서 나타나심으로 자신의 부활을 증거 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고, 500여 형제에게 나타나시고 (고전 15:6), 동생인 야고보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이렇게 믿는 자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예수님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몇몇 제자들이 모여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합니다.



나타나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전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라 함은 지역이나 영토적인 개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말합니다.



눅 17:21,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궁극적으로는 우리 주님의 재림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만 현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 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 가운데 임한 것임을 말해 줍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아직 육신이 이 세상에 있다 할지라도 영생을 소유한 자가 됩니다. 주님은 물론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고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삶입니다. 현재는 어려움에 있지만 주님께서 건져 주실 것을 믿으며 소망 중에 주님의 위로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삶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그 큰사랑을 생각하며 찬송을 부를 때 감격이 오고 주님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올 때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삶입니다.  



*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제자들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주와 함께 죽을 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하던 베드로는 불과 몇 시간이 못 되어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주님을 배신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좀처럼 믿지 않으려다가 책망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정죄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붙드심으로 그들의 심령을 깨어나게 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입니다. 깨어 있을 시간에 깨어있지 못하고 영적인 잠에 빠져 실패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으로 다시 모였습니다. 그들을 회복시키신 주님은 주님의 뒤를 이어 감당할 사명을 주십니다.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는 주님의 끈질긴 사랑이 지금도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주님의 사역을 계속해서 수행할 자들로 부르십니다. 주님의 그 사랑을 본받아 주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사랑을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8절)

8절은 사도행전 전체의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이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증인; martus, 이는 자기가 보거나 듣거나 아는 바를 그대로 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헬라단어에서 martyr라는 영어단어가 나왔습니다. martyr는 순교자, 즉 증거하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예레미아가 선지자로 부름 받을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신약시대에도 적용됩니다.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너를 구원하리라” (렘 1:7-8) 모든 성도들은 성령을 받고, 능력을 선물로 받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행 1-7장에는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8-9장은 유대, 사마리아 지방에서, 10-28장까지는 가이사랴에서 로마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사역은 즉흥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들에게 준비된 사역을 시키십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세상을 떠나자 갑자기 이스라엘의 인도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모세 밑에서 철저한 지도자 수업을 받았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기에 하나님은 그에게 가나안 정복의 임무를 주셨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400년간 하나님의 음성이 이스라엘에 들리지 않다가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그 400년은 암흑시대 같았으나 하나님은 쉬신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제대로 전파될 수 있는 여건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00년 동안 세계 정치, 경제, 문화 판도를 바꾸셔서 택하신 종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증인들로 활약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여건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1) 언어의 통일

강력했던 페르샤 제국이 멸망하고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헬라 제국이 유럽과 소아시아 지역을 점령하면서 헬라 문화가 온 지중해 연안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등장으로 로마가 정치적으로는 지배했을지라도 문화적으로는 헬라 문화가 우세하였기에 헬라어가 라틴어와 더불어 공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삼차에 걸친 전도 여행을 통하여 많은 전도의 열매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가는 지역마다 대부분 헬라어를 사용하였기에 요즈음처럼 선교지에 가서 그곳 언어를 배우고 익히느라 시간이 지체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2) 도로의 발달

로마제국은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모든 길은 로마로” 하는 말이 생길 정도로 도로을 잘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은 이 도로들과 항로들을 이용하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교통의 요지인 대도시를 선교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복음의 일꾼들을 세우면 그들이 자기들의 고향이나 그 주변 지역에 복음을 전함으로 복음이 다른 지방으로 쉽게 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소아시아의 수도인 에베소, 마게도니아의 수도인 빌립보, 아가야의 수도인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다가 나중에는 로마제국의 심장부인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다.  



3) 정신적인 혼란 상태

로마의 외적인 번영에 비하여 뚜렷이 내세울 만한 국교가 없었습니다. 헬라 문화는 다신교 숭배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로마는 각 정복지에서 그 지역에 있던 종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펼쳤으므로 잡다한 종교들이 로마제국에 범람하였습니다. 이러한 여건에 기독교에 강력한 대적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동방의 신비 종교요 또 하나는 유대교였습니다. 특히 유대교의 추종자들은 복음이 전파되는데 앞장서서 방해를 주도했던 세력이 되었습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분위기에서 기독교는 헌신된 주님의 제자들이 있었기에 온갖 박해 가운데 퍼져나가 예수님이 오신지 400년 만에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모든 여건을 만드신 후에 사역하시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도 준비를 명합니다. 제자들이 지난 삼년동안 예수님과 같이 지내면서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사역을 보고 배웠는데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다시 들으니 마치 시험을 앞둔 학생들이 총정리 하듯이 복음 전파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자들 스스로 사역하면서 복음을 효율적으로 전파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성장시키기에는 아직도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2. 사명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유대인의 메시아 왕국관은 메시아가 오심으로 유대인이 지배하는 지상의 왕국이 수립이 되고 옛날의 신정 정치가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때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로마의 압제에서 정치적으로 구원하고 해방시킬 것을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메시아 왕국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리고 실망과 허탈에 빠졌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습니다. 제자들이 감람산 산에서 예수님과 마지막으로 모였을 때에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이스라엘의 정치 회복을 간절히 바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때와 기한은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에 속하니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요, 너희들은 주님이 원하시는 사명만 감당하면 된다고 하십니다. 오순절 이후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회개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들어가는 영적인 나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의 징조: 지진, 전쟁, 기근, 사랑이 식어짐, 사람들의 왕래가 빨라짐 등을 볼 때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우리가 그날을 예측할 수도 없고 또 안다 하더라도 주님을 맞을 준비가 안 된 자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뒤를 이어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것을 전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도록 죽음까지 각오해야 합니다.

  

3.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려면 전도 전략을 세워야 하고 인적, 물적 자원을 충분히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충만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마귀와의 영적 전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초대 교회가 성장하고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 소아시아, 그리스를 거쳐 로마에 이르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기에 ‘성령행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 (눅 1:35)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눅 2:40) 어렸을 때도 성령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며 나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셨다 (눅 3:22)고 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 이끌리시며” (눅 4:1)  예수님은 탄생 때부터 사역하시는 동안 철저하게 성령에 인도된 삶을 사셨습니다. 부활하시고 난후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요 20:22)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기사와 이적을 많이 행하였습니까?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 때문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사역하셨기 때문입니다.



열심만 가지고 성급하게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능력에 힘입어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도 성령의 역사가 왕, 제사장, 선지자와 같은 특수한 사람들에게 임하기는 하였으나 일시적이요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의 성령의 역사는 보편적이요 영구적이 되는데 그러한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선물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보혜사는 ‘함께 있도록 부름 받은 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믿는 사람들과 함께 계신 보혜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떠나시면 성령님이 대신 오셔서 믿는 자들 안에 함께 계시면서 주님을 전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가질 것을 말씀하신 것은 오순절 이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증인의 삶을 살려면 예수님처럼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제 성령의 권능을 입은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요, 하나님의 선교하는 백성입니다.

1) 선교는 세상적인 여건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선교하는 데는 사회적 신분/빈부/남녀노소의 구별을 받지 않습니다. 선교는 풀타임 선교사, 목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증인입니다. 선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크리스천들을 God's Missionary People (하나님의 선교하는 백성들)이라고도 부릅니다. 예수님이 이방인 땅인 거라사에 가셨다가 거기서 군대 귀신 들린 청년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 청년이 예수님과 함께 가려고 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막 5:19) 그 결과가 어떠하였습니까?  나중에 예수님이 데가볼리 지역에 가셨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사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막 8장) 이방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까요? 바로 귀신들렸던 그 청년이 예수님이 자기에게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열심히 간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청년은 자기를 흉악한 귀신들에게서 자유케하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도 크고 놀라 왔기에 감격 가운데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전하였을 뿐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만나고 경험한 예수를 전할 수 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가정주부도 학생들도 비즈니스맨들도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2) 선교는 시간이나 장소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선교를 하기 위하여 반드시 외국에 있는 선교지에 나가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런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나가야 하지만 각자의 삶의 현장이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선교의 현장입니다. 작게는 자기의 가정에서부터, 학교, 자기의 일터,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 어디든지 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증인이 되도록 부름 받은 자들, 온 유대에서 증인이 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 사마리아에서 증인이 되도록 부름 받은 자들, 땅 끝까지 가서 증인이 되도록 부름 받은 자들처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능력 주시는 대로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증인의 사명을 맡은 하나님의 선교하는 백성들입니다. 선교하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는 영혼구원에 초점을 맞춥니다. 선교하는 성도들이 모인 목장은 친교만 나누는 장소가 아니라 아직 믿지 않거나 교회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웃에게 주님을 소개하는 좋은 전도의 장소가 됩니다. 21세기에도 하나님은 택하신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넓히기 원하십니다. 우리 각자가 성령 충만 받고, 능력을 받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영혼구원이라는 소중한 사명을 깨닫고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저희 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인명구조소의 사명을 감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사명을 깨닫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아 헌신하시며 많은 전도의 열매, 주님이 기억하시고 감격하시는 열매를 거두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