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최상의 헌신 (막 14:3-9)

Author
Myung Myung
Date
2006-04-11 18:12
Views
6087
최상의 헌신 (마가복음 14:3-9)



마가복음 11장부터 16장까지는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주간에 있었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특별히 14장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하여 음모를 꾸미고 성공을 거두는 과정을 보여준다. 예루살렘 성은 유월절을 지키려는 수많은 무리들로 인하여 북적댑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해마다 맞는 평범한 유월절 같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무서운 음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430년간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나오게 된 것을 기념하는 유대인 최대의 명절입니다.  바로 이 뜻깊은 유월절에 하나님은 제2의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자기의 백성들을 구원하려고 하십니다.  출애굽 직전에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마지막 재앙을 내리시는데,  재앙을 내리는 천사가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의 처음 난 것은 다 죽이지만 흠 없고 일년 된 수양을 잡아 그 피로 집 문의 좌우 기둥과 문지방에 바른 집은 그냥 넘어갔다 하여 passover 즉 유월절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엄격히 말하자면 유월절과 무교절은 구분된다.  유월절은 유대의 월력으로 1월인 니산월 14일에 지킨다. 그리고 무교절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는 절기로서 니산월 15일에서 21일까지 7일간 지킵니다.  목요일을 유월절 양 잡는 날로 볼 때 유월절 이틀 전이면 화요일을 말합니다.  (레 23:5,6 ; 민 28:16,17)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며 즐거워하는 계절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모여서 예수를 '잡아 죽일‘ 계획을 꾸미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침을 듣고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성경을 잘 알고 예언의 성취를 알려야 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말씀을 들었지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과 귀머거리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자기들의 기득권에 위협이 된다는 생각에 예수님을 시기하며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밉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서둘지 않았으며 신중을 기합니다.  예수를 잡아 죽이되 유월절은 피하려고 합니다.  무리들이 알지 못하는 때에 은밀하게 예수를 제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공연히 소동이 일어나면 로마의 간섭을 받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지금까지 누려오던 특권이나 명예를 잃어버릴 것을 두려워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속적인 이익에 이끌려 장차 임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줍니다.  이미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실 것을 세 번씩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죽음/부활을 예언하는 동안 종교 지도자들은 어떻게 예수를 죽일꼬 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하는 행동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사단의 노예가 되어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를 통한 구속 드라마에 악역을 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에서 무서운 음모가 진행되는 동안 성밖 베다니에 있는 문둥이 시몬 집에 잔치가 벌어집니다.  시몬이 누구인지, 자기의 문둥병을 예수님이 고쳐주셔서 예수님을 위한 특별한 자리를 만들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초빙되어 함께 식사를 나눕니다.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향기로운 사건을 통하여 주님이 정말로 기뻐하시고 널리 전하기를 원하시는 참된 헌신자의 모습을 어떤지 살펴보며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들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자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한창 식사가 진행되는 중에 한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는 그 여인을 마리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오빠 나사로가 얼마 전 죽었다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났었습니다.  그 당시 남자들이 모여 식사할 때 음식을 나르는 여인 외에는 다른 여자들은 식사 자리 근처에 가까이 가지 않았는데 마리아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는 것이 아주 특이한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마리아를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으로 인한 부끄러움보다 더 컸기에 마리아는 기꺼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다가가는 마리아의 손에 값비싼 나드 향유를 담은 옥합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나드는 히말라야 산에 있는 식물의 뿌리에서 채취한 고급 향유로서 대개는 1회분이 알라바스터로 만들어진 작은 용기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 가격은 300데나리온이 넘었다고 하는데 데나리온은 그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금액으로 한 사람의 노동자가 일년 내내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았을 때의 액수입니다.  요즈음 노동자가 하루 50불씩 번다고 할 때 300데나리온 이상이면 15000불 이상이 됩니다.



이 엄청난 거액을 예수님께 쏟아 부은 여인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을까요?  마가가 정확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자기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조차 내어놓아도 전혀 아깝게 생각지 않을 만큼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향유를 붓는 여인의 헌신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주님을 향하여 아낌없이 쏟아 붓는데 이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주변에 있었습니다.  가롯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은 마리아의 행위를 보고 감격하기보다 도리어 그의 행위를 '허비'로 규정하며 분개합니다.  무슨 의도로 향유를 허비하였는지 따지며 마리아의 행위를 비난합니다.  이것을 팔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을 텐데 그것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지 않고 다 부으면서 허비하였느냐?  지금 바깥에는 양식이 없어 굶주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쏟아버릴 바에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옳지 않느냐?  가룟 유다의 말은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문제는 구제 행위가 나쁜 것이 아니고 그런 제안을 하는 자가 어떤 동기를 그런 말을 하는가 입니다.  요한 복음에 의하면 가롯 유다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있는 것을 훔쳐 감이라” (요 12:6)  자신은 남의 것을 도적질하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여인의 한 행동을 인하여 왜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주지 않느냐고 혼자만 의인인체 목소리를 높입니다.  유다는 그 향유가 탐났습니다.  그런데 그 향유가 자기 차지가 되지 않고 예수님의 발에 부어지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돈을 챙길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 잇속이나 챙기면서 입으로만 가난한 사람을 구제를 이야기했던 가룟 유다의 신앙은 얼마가지 않아서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땀 흘리며 번 것을 자기를 위하여 쓰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자기의 삶 전체를 주님을 위하여 드립니다.  자신의 시간과 달란트를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귀한 분인지 알지 못하고, 주님께 드리는 헌신을 낭비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한 모든 경건한 노력을 우습게 여깁니다.  마리아가 주님께 드리는 ‘헌신'을 이웃을 향한 '자선'보다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웃에 대한 관심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관심보다 우선 할 수 없습니다.  여인은 향유를 부어 드리며 예수님의 죽음을 장사하는 좋은 일을 하였으나 비판하는 무리들은 예수님께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예수님에 대하여 좋은 일을 하는 여인을 비판합니다.  



예수님은 무안해하는 여인의 편을 듭니다.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을 좋은 일, 즉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을 비판하는 무리들에게 대하여 답변하십니다.   여인이 한 일이 자신의 죽음을 예비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죽음을 알고 했든 그렇지 않든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겼더니 결과적으로 놀라운 일을 한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기억하시고 칭찬하시는 헌신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1)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옥합을 깨뜨리고” (3절)

옥합에 담긴 나드 향유는 너무나 값진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오빠가 죽었을 때도 사용하지 않고 보관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비싼 향유가 담긴 옥합을 예수님께 식사 중이시던 자리에 가져왔습니다.  거기서 그 옥합을 깰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이는 것이 아니라 주저하지 않고 옥합을 깨뜨리는 결단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 당시에 향유는 긴 목이 달린 플라스크 같은 용기에 보관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용할 때는 용기의 목을 부러뜨려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세상의 경제 법칙이 통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니 그저 주고 싶고 아낌없이 베풀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옥합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보다 더 컸기에 마리아는 아낌없이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뜨릴 수 있었습니다.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오빠를 다시 살리신 것을 보았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이 단순한 선지자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경배가 무엇입니까?  자기에게 있는 가장 귀한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리며 예수님께서 자신의 경배를 받으실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향유를 붓는 것은 마리아의 예배이며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 향기 나는 찬양이 온 집안에 가득했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부으면서 말이 없었습니다.  말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비난하고 욕해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행동은 믿음의 확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모든 것이었기에 그 값비싼 향유조차도 아낌없이 주님께 부어드릴 수 있었습니다.    



2) 주님이 인정하셔야 합니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6절)

자기는 열심히 시간과 정성을 드렸는데 그 행동이 주님의 뜻과 상관없는 것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이 인정해주셔야 합니다.  여인은 옥합의 꼭지를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모두 부어드렸습니다.  향유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해집니다.  여인은 부을 자리에 제대로 부었습니다.  향유를 붓되 쓸데없는 곳에 부으면 냄새는 퍼질지라도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지는 않습니다.  메시야의 의미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메시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언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며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는 음성이 들리며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공생애 삼년동안 제사장이나 왕이나 어느 누구도 예수님에게 실제로 기름을 부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이 예수님께 기름을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행위를 기름부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이 기름부음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여인의 행위는 예수님께 좋은 일을 행한 것이라 하여 그 여인의 행한 일은 복음이 전파되는 어디에서든지 기념하라는 칭찬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주님께 부어 드려야 할 귀중한 것을 온전히 주님께 부어 드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경배를 드릴 대상은 우리의 왕이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십니다.  계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로 있기를 원하노라”  



3) 주님의 때에 드려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7절)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될 텐데 하는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가난한 사람들을 돌볼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한 섬김이 곧 하나님께 대한 섬김이 되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본문을 자칫 잘못 읽으면 가난한 자들과 예수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질문으로 발전됩니다.  여기서 대조가 되는 것은 ‘가난한 자’들과 ‘예수님’이 아니라 ‘항상 함께 있는 것’과 ‘항상 함께 있지는 않는 것’입니다.  always ... not always.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주변에 늘 있지만 주님은 이제 그들 곁을 떠나십니다.  항상 주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보다 이제 곧 떠나실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당연하지만 문제는 타이밍입니다.  여기서의 문제는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하느냐 아니면 가난한 자를 더 도와야 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실 것을 암시하시면서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예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여인의 행동이 가치 있는 것이었음을 말씀합니다.  여인이 예수님이 곧 죽으실 것과 죽으심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그와 같은 행위를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아주 소중하게 여기던 향유까지라도 아낌없이 예수님께 부어 드린 것이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한 것이 되었습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즐겨 하다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는 아브라함처럼 마리아는 그저 주님의 은혜가 감사하고 주님을 생각할 때 감격이 오고 그 기쁨을 헌신의 행동으로 표현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주님과 함께 있던 제자들도 할 수 없었던 엄청난 행동, 즉 유월절 어린양으로 인류를 위해 대신 죽으시는 예수님의 구속 드라마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헌신에도 때가 있습니다.  언제가 헌신의 때입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너희가 하려고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날이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4)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저가 힘을 다하여” (9절)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것은 자신의 많은 재물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힘을 다한다”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필요한 부분입니다.  주님은 양보다 질을 보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연보궤 앞에 계셨을 때 부자들이 많이 넣는 것보다 한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잎을 넣는 것을 인하여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체를 넣었느니라” (12:44)고 칭찬하셨습니다.  돈이 많다고 주님께 풍성하게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위하여 후하면서도 주님을 위하여 인색한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구원을 베푸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넘칠 때 힘을 다하여 드립니다.  그러나 그런 감격이 없이 신앙생활이 종교 행위에 그칠 때 모든 것이 인색해지고 그것을 감추려다 보니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그저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느낀 대로 감사하고 영광을 돌렸더니 결과적으로 그는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는 의미 있는 행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너무나 귀해서 자기 마음을 드리고 물질을 드릴 때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마리아는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주님께 대하여 힘을 다한 그의 헌신은 향기 나는 제물이 되었습니다.  



*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주의 일을 할 때도 반대나 방해는 있게 마련입니다.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4절)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면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는데 아깝도다” 하며 그 자리에 있던 어떤 사람들은 그 여자를 책망합니다.  어떻게 그런 낭비를 할 수 있느냐 너는 생각도 없느냐?  여인이 행한 일의 영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하니 여인이 쏟아 부은 향유의 물질적 가치만을 생각하며 여인을 비판합니다.  사실 그들은 평소에도 가나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인을 비판하려다보니 가난한 자들을 돕는데 관심이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내가 정성을 다하여 행한 것인데 쓸데없는 짓이라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판받아 본적이 있습니까?  그때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혹은 다른 사람의 섬김과 봉사를 보면서 자기는 하지도 않으면서 함부로 비판한 적은 없습니까?  대개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는 하는 사람은 별로 말이 없습니다.  일하는데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은 하지 않고 뒷자리에서 팔짱만 끼고 있는 사람들이 콩 놓아라 팥 놓아라 말을 많이 합니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마 7: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은 다 아십니다.  우리의 행위의 동기가 주님을 향한 사랑이라면 그리고 그것을 인하여 최선을 다한다면 주님은 반드시 기억하시고 그에 합당한 상급을 주십니다.  주님은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할 것은 부지런히  격려하고 위로하고 세워주는 것입니다.  판단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평가하기에 앞서 내가 무슨 동기로 그런 마음을 가지는지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남을 비판하기에 앞서 주님이 나의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실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의 형편에서 주님께 할 수 있는 좋은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칭찬하여도 주님이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의 시선만을 의식하고 헌신하는 자들을 주님은 변호해주십니다.  신앙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책망을 들은 마리아는 한 쪽에서 무안해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가만두어라“ 왜 너희들이 그 여인을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하시면서 여인의 행동을 옹호합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예수님의 죽으심을 준비하는 가장 귀한 일로 받으셨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의 의미를 온전히 알았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이 깜짝 놀란 만한 봉사를 하겠다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 대한 경배와 영광을 드렸습니다.  만약 마리아의 헌신이 없었더라면 이 잔치는 그냥 평범한 잔치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이 행동은 나사로의 다시 산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전야제의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 진정한 헌신에는 상급이 따릅니다.  

“저를 기념하리라” (9절)

세상 일들은 시간 속에 파묻힙니다.  선행도 악행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옥합이 기억되는 까닭은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기억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한 일은 너무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고난당하고 죽으실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과연 예수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께 부어드린 향유는 시몬의 집을 온통 향기로 채웠지만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선행은 아름다운 향기를 품고 오늘도 전해집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 San Marcos에 있는 Palomar 한인교회에서도 마리아의 헌신이 증거되고 있습니다.  



주님께 우리의 옥합을 깨드린다는 것은 결코 허비가 아닙니다.  하늘 보고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크고 작은 옥합들로 채워져 있을 것입니다.  어린 소자에게 베푼 냉수 한 그릇도 있고 과부가 드린 두 렙돈도 있고 오늘 마리아가 깨뜨린 옥합이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내 것이 아닙니다.  빈손으로 왔기에 다시 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잠시 간직하고 있는 청지기들입니다.  내 것이 아닌 것들을 계속해서 붙잡으려 하다가 세월을 다 소비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면목없게 됩니다.  인생을 낭비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마 7:19-20)에 말씀하십니다.   얻은 자와 잃은 자의 차이는 내 마음의 보물이 어디에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옥합을 깨뜨리는 작은 헌신들을 기뻐하십니다.  주님께 나의 옥합을 들고 나아가는 시간이 나의 생애에서 주님 보시기에 가장 귀하고 향기 나는 시간들입니다.  나의 옥합의 향기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지라도 그 속에 담겼던 주님에 대한 사랑은 영원히 기억되고 기념됩니다.  



마리아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옥합을 들고 주님께 다가갔습니다.  마리아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했습니다.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음으로 예수님이 장례를 준비했습니다.  마리아는 그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여주었습니다.  마리아의 아름다운 헌신은 지난 2000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주 예수가 가장 소중함을 알고 그 앞에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는 마음으로 경배할 때 우리가 있는 곳은 향기로 가득할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헌신이 향기나는 제물이 되어 주님께 아름답게 올려져야 합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단이 있는 헌신, 주님이 인정하시는 헌신, 주님의 때에 드리는 헌신,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헌신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며 주님 보시기에 좋은 일을 많이 행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이 준비하신 상급을 풍성하게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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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장 모 임 교 안



1단계: 경배와 찬양 (Worship & Praise)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찬양을 통하여 주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2단계: 친숙해지기 (Ice Breaker)

  한 주일의 삶을 돌아보면서 감사하는 내용을 나눕니다.

  목자는 목장 식구들 간에 친밀한 의사소통을 가지도록 격려합니다.



3단계: 말씀 나누기 (Word)

막 14:1-9절을 읽습니다.

예수님이 기억하시고 칭찬하시는 헌신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1)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2) 주님이 인정하셔야 합니다;  3) 주님의 때에 드려야 합니다.

   4)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주의 일을 할 때도 반대나 방해는 있게 마련입니다.  

*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 진정한 헌신에는 상급이 따릅니다.  



* 본문 요약이나 읽은 본문을 통하여 느낀 내용을 나누거나 적용합니다.

  1) 선한 일을 한 것으로 오히려 남에게 비난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그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혹은 다른       사람이 사랑을 베푸는 것을 쓸데없는 것으로 생각하며 비판한 적은 없습니까?  





  2) 마리아가 왜 주님의 칭찬을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내가 지금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작은 헌신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3) 본문이나 설교의 내용 중에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있으면 나누어 봅니다.





  

4단계: 목표와 계획 세우기

1. 각자의 삶을 나누며 기도의 제목을 (가정, 사업, 교회) 교환합니다.  서로를 위하여 중보기도 합니다.

        BLESS 기도: Body, Labor, Emotional, Social, Spiritual

  





2. 후원하는 선교사를 위하여 기도와 헌금을 드립니다.



3. 전도 대상자를 (불신자나 아직 교회를 정하지 못한 분들) 위하여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