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열매를 찾으시는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10-24 16:22
Views
335

뉴욕에 사는 제 친구 이야기입니다. 그가 처음 이민 와서 샌드위치 가게를 인수했습니다. 인수하기 전에 매상 check를 활 때는 장사가 너무 잘 되었는데, 막상 인수하고 보니 매상이 뚝 떨어졌습니다. 전 주인이 몇 달  동안 할인쿠폰을 엄청나게 뿌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용을 줄이고자 종업원들을 내보내고 두 부부가 난생 처음으로 직접 샌드위치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장사를 하면 할수록 적자가 누적되어 할 수 없이 가게를 처분해야만 했습니다. 그 때의 억울함, 배신감 때문에 친구 부부는 오랫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살다보면 이런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 떄문에 수없이 실망하셨습니다. ‘포도원의 노래’라고 알려진 이사야 5장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저버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사 5:2-6) 하나님의 말씀대로 북쪽의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남쪽의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정신을 차렸을까요? 예레미아 선지자가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도적의 굴혈’이라고 말한 지 60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그들은 여전히 자기 조상들과 같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적 회복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배척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전통과 아집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지와 어리석음을 드러냈습니다. 우리는 다릅니까? 우리도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통한 다이내믹한 신앙생활을 하기보다는 타성에 젖고 형식적인 종교 행위에 빠지기 쉽습니다. 영적으로 나태해져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이 되어버리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감격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열 받으시겠습니까? 열매를 찾으시는 주님 앞에 무엇을 내어 놓으시겠습니까?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며 열매 맺는 성도,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11-14절)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 많은 무리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메시아로 기대하며 자기들의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열광적으로 외쳐 대었습니다.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하는 무리들의 함성을 들으시며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이 구문을 직역하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안의 성전 안으로 들어가사’가 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예수님이 가신 최종목적지임을 나타냅니다.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예수님은 성전 경내를 샅샅이 살피셨음을 나타냅니다. 성전 안에는 소나 양의 울음소리, 구구대는 비둘기 소리가 어우러진 가운데 장사꾼들은 제물로 사용될 짐승들을 파느라고, 돈 바꾸는 자들은 성전에서만 통용되는 화폐로 바꾸어 주느라고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소나 양들을 매어 놓은 뜰에선 짐승들이 똥을 싸서 냄새도 났겠고 지저분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둘러보시면서 폭풍 전 고요와 같이 한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날이 저물자 예수님은 죄악이 관영한 예루살렘 성안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아마 밤새 예수님은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타락한 성전,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성전의 현실을 보시고 깊은 통한에 빠지셨을 것입니다. 


 


12절은‘이튿날’하며 시작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때를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니까 이튿날은 월요일입니다. 베다니에서 나오실 때 예수님께서 시장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와 같이 슬퍼하기도 하시고 배고픔을 느끼기도 하시는 인간임을 보여 줍니다.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십니다.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다가가셨지만 잎사귀만 무성할 뿐 열매는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무화과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라고 저주하십니다. 마가는 분명히 ‘무화과의 때’라 아니라고 밝히는데, 어째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까? 배고프면 역정을 내는 분이 있는데 예수님도 그런 분이십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주님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무화과나무는 몇 차례 열매를 맺는데, 건기가 시작되는 4월에 맺는 첫 번째 열매를 ‘파게’라고 합니다. 그러나 ‘파게’는 맛도 없고 볼품도 없어서 가축 사료로 사용되거나 가난한 자들, 혹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온 여행자들이 허기를 달래는데 사용됐습니다. ‘파게’이후 4-5차례 열매가 맺히게 되고 나서 8-9월에 맺히는 무화과 열매를 ‘테헤나’라고 하는데, 이때 열매가 맛이 좋다고 합니다. 그때는 유월절이니 양력으로 3월 말에서 4월 초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이 찾으신 무화과 열매는 ‘파게’인데 그 ‘파게’마저 없습니다. 그런데 ‘파게’가 없다고 그 나무를 저주까지 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사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비유적 행동입니다. 그러면 무슨 뜻을 전하려고 하신 것입니까? 13절에서 ‘무화과의 때’란 계절적 의미에서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란 뜻이 아닙니다.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카이로스’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라는 뜻입니다. 마가복음 1:15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라고 예수님이 선포하셨을 때 그‘때’도 ‘카이로스’즉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뜻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을 때에는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번영하였지만,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길 때 그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로 비유되며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렘 8:13). 그렇다면 ‘무화과의 때가 아니다’라는 말은 ‘지금은 이스라엘의 때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특히 다음에 나오는 성전 정화 사건을 연관 지어 볼 때 결국 ‘이스라엘 성전의 때는 지났다’라는 뜻으로서 성전 체제에 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는데 보신 것은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의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삶이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말하고 성전에서 예배를 드린다 하면서도 그들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삶의 변화도 없는 모습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14절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화과나무를 향해 하신 예수님의 저주를 들었다고 합니다. “듣더라”는 미완료시제로 지속적인 제자도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시내를 거쳐 성전에 들어가면서 ‘성전 심판’을 알리는 예수님의 상징적 행위를 ‘보고 또 듣게’된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15-19절)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예고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성전 안에 들어가셔서 보이신 말과 행동은 성전 제체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세를 내기 위해 돈을 바꾸는 일, 제의에 사용할 비둘기를 파는 일 등은 성전 당국의 허가를 받고 이루어진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성전 예배의 핵심은 희생 제사입니다.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흠 없는 짐승을 바쳐야 했습니다. 흠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는 제사장이 보고 판단합니다. 만약 흠이 있다면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제사를 바치는 사람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성전에서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팔았습니다. 물론 직접 가져오는 것보다 훨씬 더 비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를 드려야 죄 용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싼 돈을 주고 제물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의자를 엎으신 것은 돈벌이 장소로 타락한 성전, ‘강도의 소굴’로 전락한 성전에 대해 심판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이미 광야 시대부터 하나님은 20세 이상 성인 남자들은 부자든 가난한 자든 반 세겔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성전세를 납부할 때는 환전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이 지배했기에 일상생활에서는 이방 황제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담당한 사람이 돈 바꿔 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상을 둘러엎으실 때 쫘르르 하며 동전들이 쏟아졌을 것입니다. 또한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물건’은 제사에 사용하는 그릇들을 말하는데, 예수님이 이 그릇들을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한 것은 성전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타락한 성전의 시대가 끝이 났음을 보여 주시기 위해 상징적 행동으로 일종의 시위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56:7과 예레미야 7:11에 근거로 그들을 향해 매섭게 질타하십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성전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곳이기에 마땅히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셔야 합니다. 성전은 유대인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 만민을 위한 곳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 동안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거룩한 민족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이방인들을 경시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모든 매매 행위가 ‘이방인의 뜰’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십니다. 이방인들이 나아와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특별히 정해 놓은 장소에서 장사를 하고 있으니 이방인들은 성전에 있으려야 있을 곳이 없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요? 


 


예레미야 7:10-11에 의하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예레미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 들어와서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은 가증한 일들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들이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렸으니,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보는 것이 아니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을 비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죽일까 하고 꾀하니”예수님의 언행은 종교 지도자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킵니다. 자기들이 가진 기득권이 침해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막대한 이권이 걸린 성전 내 비즈니스를 포기할 리가 없습니다. 앞서 예수님은 당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8:31)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는데, 그 예언처럼 예수님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지적을 받고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자기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고 분노합니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예수를 죽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무리가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기고 그 말씀을 받으니 즉시로 자기들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합니다.  


 


가르치시는 예수님(20-25절)


이른 아침, 즉 화요일 아침 다시 성안에 들어오다가 어제 예수님이 저주하시던 그 무화과나무를 지나칩니다. 불과 하룻밤 사이에 나무는 뿌리째 완전히 말라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말합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가 말랐나이다.”무화과나무가 잎사귀는 많았지만 열매가 없었다는 사실처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은 있으면서도 사리사욕을 일삼으며 참 신앙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운명은 장차 이스라엘에 일어날 특별히 예루살렘과 성전에 일어날 심판을 상징합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은 서기 70년에 Titus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에 의하여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철저히 파괴가 되어 성전 제사는 그치게 되었고 200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성전 제사는 회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22-25절만을 읽으면  믿음의 기도에 관한 교훈으로 들립니다. 의심 없이 구하는 믿음이 강한 믿음이고, 강한 믿음으로 구하면 반드시 무엇이든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맥을 보면 무화과나무의 뿌리가 말라 버렸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예수님이 믿음과 기도와 용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심을 주목해야 합니다. 23절에 언급된 ‘이 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서 있던 성전산을 가리킵니다. 감람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사해가 보입니다. 성전산이 던져지는 것은 성전에 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고 기도하는 곳이며, 죄 사함과 화목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성전 제사는 더 이상 죄 사함의 효과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기도로 세워질 공동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게 됩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전은 필요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심판으로 인해 야기될 새 영적 원리와 질서에 대한 가르침으로써, 제자들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종말론적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옛 성전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옛 성전에서 드린 제사와 비교가 안 되는 ‘모든 사람의 대속물 되신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신다고 합니다.  


 


우리의 자세


예수님은 기존의 예루살렘 성전을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으로 대신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전입니다(고전 3:16). 우리 각자는 성령의 전입니다(고전 6:19) 어떻게 그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합니까? 


-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거라사에 가셔서 군대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실 때 군대귀신들은 돼지들에게 들어갔고, 그 돼지들은 바다에 빠졌습니다(5:13). 이것은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셔서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 나아가 이방 지역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지는 일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심판이자 동시에 구원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역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믿고 그분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에게, 또 맹인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5:34; 10:52). 믿음이 이적을 낳습니다. 바울도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과 기도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받은 줄로 믿으라”. 즉 기도할 때 이미 응답이 됐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길 바라시고, 우리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참다운 기도는 기도를 드리는 자와 기도를 받는 대상과의 신뢰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신자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될 것을 기대하지만, 경험적으로 볼 때 기도하고 구하는 그대로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구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다양하게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한 것을 거부하실 수도 있습니다. 주면 해가 될 수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한 것 이상으로 주십니다. 하나님은 풍성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한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이 더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하지 않아도 주십니다. 하나님은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구하기만 하면 간구하는 것마다 다 주십니다. 


-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 응답의 확신이라는 주제를 용서라는 주제와 연결합니다.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는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만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용서하신 것을 전제하며, 이 용서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이를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아직도 자신이 받은 용서의 깊이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기도의 새로운 공동체가 기존의 성전 체제를 대체해 죄 사함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서로 용서하며 하늘 아버지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열매를 찾으십니다. 우리의 교회에게 열매를 찾으십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말씀과 기도가 풍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인 활력이 생깁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합니다. 신앙생활의 능력은 건물이나 예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표현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를 통해서 나옵니다.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죄 사함과 의로움과 거룩함을 구해야 합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지속적인 교제를 나눌 때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됩니다. 그런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세상에 거룩함을 나타내며 영적인 권위를 회복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시간과 물질과 달란트를 이미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주님은 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와 회계하십니다. 보여 드릴 열매가 없을 때 우리는 주님께 면목 없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악하고 험한 세대 속에서도 믿음의 공동체, 기도의 공동체, 용서의 공동체를 실현해야 합니다. 성전을 둘러보시며 비통해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면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열매를 찾으시는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열매를 풍성하게 맺음으로 주님의 칭찬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