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보기를 원하나이다

Author
Myung Myung
Date
2021-10-17 15:12
Views
349

차를 타고 가다가 신호등에 정차하면 ‘돈이 필요하다’‘직업을 잃었다’는 표지판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외모도 멀쩡한데 구걸을 하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걸하는 사람이 가까이 오면 어떤 생각을 합니까? 돈을 모아 한 끼라도 사는데 도와야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모은 돈으로 마약을 구입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상황에 따라 돈을 줄 때도 있고 그냥 지나치기도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구걸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응은 비슷할 것입니다. 더구나 본문에 나오는 바디매오는 눈까지 멀었으니 당시 유대인들은 그를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자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단어였습니다. 


 


8:22절부터 10장은 ‘길 story'라 불리며, 예수님이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도중에 발생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단락의 첫 번째 이야기가 벳새다 출신 맹인의 치유 사건이었고, 마지막 이야기는 본문에 기록된 여리고에 사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치유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 사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차례에 걸쳐서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계속해서 편견과 무지와 탐욕을 드러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자들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길 story'를 마무리하면서 마가는 맹인 바디매오를 소개합니다. 바디매오와 제자들의 대조적인 모습이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제대로 섬기고 있습니까? 제자도의 의미를 깨닫고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주님의 참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 부르짖는 바디매오(46-48절)


본문은 이야기체로 되어 있기에 성경 속의 장면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려보면 훨씬 더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내가 실제로 그 자리에 있다면 어떻게 할까, 내가 감독이라면 이 장면을 어떻게 연출할까 하며 접근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이 가까워오자 많은 사람들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지나가십니다. 여리고는 어떤 곳입니까?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믿음으로 성을 돌았을 때 무너뜨렸던 성읍입니다. 히브리말로 ‘여호수아’가 헬라말로 ‘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여호수아가 활약하던 때로부터 1400년 후에 또 다른 여호수아인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려면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던 때나 예수님 때나 여전히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직도 믿음이 부족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유대 땅까지 여행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해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을 따라 내려오셔서 요단강을 건너시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시험산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공생애 마지막 때에 예수님은 같은 코스로 내려오셔서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요단강 서편에 위치한 여리고는 예루살렘의 관문입니다. 이번 여정은 십자가를 지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은 놀라고 무리는 두려워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 길을 앞장서서 당당하게 올라가십니다.  


 


마침 바디매오라는 맹인 거지가 길 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습니다. ‘바디매오’란 이름은 ‘디매오의 아들’이란 뜻으로, 아마 이름은 없이 그저 디매오라는 사람의 아들로만 불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가 언제 어떻게 맹인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니 구걸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디매오란 이름의 뜻은 명예, 영예입니다. 그런데 그는 오늘까지 ‘영예의 아들’이란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날마다 길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것이 그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날도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게 주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마 바디매오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디매오를 주목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시간에 그곳을 지나게 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들입니다. 


 


바디매오는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입니다. 아마 맹인이니 다른 사람들보다 청력이 훨씬 더 발달하였을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분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순간 그의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지치고 곤고한 심령에 소망이 생기고 생기가 돕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지릅니다. ‘소리 질러’로 번역된 단어는 원래 까마귀 울음소리를 나타냅니다. 앞을 보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가난하게 살던 바디매오가 까마귀가 울 듯 거칠게 예수님께 부르짖습니다. 허다한 무리 속에서 앞을 못 보는 자신이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소리 지르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나단의 신탁(삼하 7장)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다윗의 자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스겔 37:24에서는 이 소망이 보다 더 구체화되어서 하나님이 통치하실 종말에 다윗 계열의 왕이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것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가져올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는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시편에서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다윗의 기도를 반영합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신뢰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자기 앞을 지나 간다는 자체가 바디매오의 일생에 다시 올 수 없는 기회이기에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어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의 외침이 그저 시끄러운 소리로만 들립니다. 사람들은 평소에도 그를 무시하였기에 바디매오를 꾸짖습니다. 조용히 해. 아무도 그 맹인을 거지 이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꾸짖다’와 ‘소리지르다’는 미완료 시제입니다. 무리는 시끄럽다고 바디매오를 계속 꾸짖고 바디매오는 계속해서 소리를 지릅니다. 바디매오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더 큰 소리로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칩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간절함을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바디매오를 부르시는 예수님(49-50절)


예수님은 자신에게 간절히 호소하는 바디매오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당장 그를 부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발걸음이 멈추실 때 무엇인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갈 때 예수님은 무리와 함께 가시다가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어 서셨습니다. 그때 12년 동안 혈루증 앓던 여인의 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를 부르라’는 것은 바디매오를 당장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꾸짖고 잠잠하라던 사람들의 태도가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갑자기 달라집니다. “안심하라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친절하게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이 우리의 존재는 물론 사람들의 시각도 바꾸어 놓습니다. 


 


바디매오는 오늘날까지 기뻐하려야 기뻐할 것이 없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에 주님께서 등장하시니 완전히 달라집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이 걸치고 있던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이 모습은 시몬과 그의 형제, 그리고 세배대의 아들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배와 그물과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거지에게 겉옷은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신명기는 가난한 자의 옷을 전당물로 취했다면 해 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줄 것을 명합니다(24:12-13). 왜냐하면 그에게 겉옷은 추운 밤에 이불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부르시자 겉옷을 내버리고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이러한 모습은 많은 재물을 포기할 수 없어서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던 부자 청년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바디매오가 겉옷을 내버린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린 것과 같습니다. 바디매오는 가장 귀한 것을 발견하였기에 재산목록 1번도 버릴 수 있었습니다. ‘버림’은 제자가 되기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 중의 하나입니다. 주님께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습니까? 아직도 집착하는 옛 사람의 것이 있습니까? 보다 귀한 것을 얻기 위하여 덜 중요한 것은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말로만 듣던 예수님 앞에 섰을 때 바디매오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벅찬 감격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요? 서서 기다리시던 예수님은 바디매오가 다가오는 모습을 주욱 지켜보셨을 것입니다. 거지인지라 더럽고 냄새도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오는 자들 모두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바디매오(51-52절)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야고보와 요한에게도 하셨던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의 소원이 무엇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의 직접적인 고백을 통하여 자신의 현재 처지를 깨닫고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해주기 위함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한 수난을 거듭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엉뚱한 요구를 하면서 절호의 기회를 낭비했습니다. 바디매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을까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그의 요청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솔직하고 거침없습니다. “눈 뜨게 하소서”라 하지 않고 “보기 원합니다”라고 합니다.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응답은 항상 풍성합니다. 보기를 요청하였을 때 바디매오는 원하던 것보다 더 큰 것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이제부터 볼지어다 라고 말씀하지 않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보게 되는 것만도 감격스러운데 자기의 믿음을 인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듣습니다. 이런 칭찬을 들은 사람은 마가복음에서 바디매오와 혈루증을 앓던 여인 둘뿐입니다. 구원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치유의 의미가 있고 영적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바디매오는 앞을 보게 됩니다. 그는 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받았습니다. 지금 누가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까? 제자들도 그런 칭찬을 예수님으로부터 듣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신 이유는 바디매오뿐 아니라 제자나 무리들도 믿음이 있으면 주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바디매오는 눈뜬 제자들이나 무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랬더니 바디매오는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주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마가는 이야기를 마치면서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길에서 따르니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줄곧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이야기하실 때마다 그들은 영적 무지와 함께 속에 품은 야망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결국 주님과 함께 이 여정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다 도망갑니다(14:50). 그런데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고 있었고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인해 치유를 경험하고 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길에서 따릅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뤄진 것입니다. 전에 길가에 앉아 있던 자가 이제는 길 가운데 나와서 예수님을 따릅니다. 제자도의 핵심단어가 부름, 버림, 따름입니다. 바디매오는 부름을 받았고 버릴 것을 버렸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야말로 열두 제자들보다 더 참 제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참 제자가 되려면


바디매오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등장합니다. 그만큼 성경이 중요하게 취급합니다. 그가 보여준 참 제자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 믿음으로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이적, 능력 있는 가르침 등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나사렛 예수가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마가복음에 소개된 예수님의 정체성은 선생님, 선지자, 그리고 메시아였습니다. 이제 바디매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의 네 번째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다윗의 자손’바디매오는 당장에라도 예수님을 찾아가고 싶었으나 앞을 보지 못하기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그분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자기 곁을 지나가고 계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무리의 웅성거림 속에서도 예수님은 바디매오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멈추어 서서 그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바디매오가 앞에 나올 때까지 예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을 찾는 자들을 기쁘게 맞아 주십니다. 언제까지 방황합니까? 언제까지 자기가 원하는 길만을 가려고 합니까?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인데 천년만년을 살 것 같이 주님과 상관없는 삶을 이제는 그쳐야 합니다. 지금 주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 뒤를 따르라고. 주님이 주시는 사명을 감당하라고. 주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고. 그러면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 믿음으로 예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다가도 분주함을 핑계로 기도하는 것을 서둘러 마칠 때가 많습니다. 약간의 방해거리만 있어도 기도를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장 기도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기도하지 않고 걱정만 하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바디매오처럼 기도를 방해하는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부르짖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예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을 결코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바디매오를 무시했으나 예수님은 그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던 발걸음을 바디매오를 위해 멈추셨습니다. 지금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 중에 바디매오와 같이 절박한 심정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까? 바디매오는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반복해서 부르짖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할 때 작은 소리로 기도한다고 주님이 듣지 못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절박한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강청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됩니다 하는 자세로 응답이 임할 때까지 매달려야 합니다.  


 


-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눈을 뜨게 되자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고난당하시고 죽으실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바디매오가 예수님처럼 고난의 길을 걷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49절에서 ‘부르다’라는 단어가 세 차례나 반복된 것은 단순히 바디매오의 눈을 고쳐 주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니라 바디매오를 제자로 부르셨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을 뜨게 된 것은 큰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우리의 질병이 치유되고 어려움이 해결되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가 중요합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걸어가는 것이 참된 제자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눅 9:62).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자는 땅의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방해가 되는 이 땅의 것을 아낌없이 버립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 길이 바로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가면서


 


 


마가가 예수님과 바디매오의 만남을 기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분, 부르시는 분, 기다리시는 분, 들어주시는 분, 고쳐주시는 분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망가진 것이나 mess-up된 삶을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바디매오는 영안이 밝은 자, 믿음으로 주님을 붙드는 자, 믿음으로 버릴 것은 버리는 자,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디매오처럼 주님께서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주님께 바디매오와 같은 심정으로 자기의 문제를 진지하게 주님 앞에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바디매오와 같이 구체적으로 구할 바를 자신 있게 그러나 주님의 뜻에 합하게 구해야 합니다. 더 이상 자기의 부족함이나 약함을 자책하지 말고 믿음의 눈을 떠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확신하면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럴 때 바디매오와 같은 응답을 받게 됩니다. 주님은 지금도 제2, 제3의 바디매오를 찾고 계십니다. 주님은 성도들의 부르짖는 간구를 들으시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우리 각자를 위하여 시간을 내시고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의 소원을 들으십니다. 믿음으로 나와 주님의 마음에 합한 간구를 하는 자들에게 응답을 주기 원하십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그럴 때 문제가 해결될 뿐더러 영혼의 구원까지 체험합니다. 이제 주님의 능력을 경험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근본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주님을 그들에게 소개해 주어야 합니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주님이 부르신다’는 사랑의 메시지를 담대하게 전해야 합니다. 주님이 베푸신 구원의 능력을 인하여 둘러싼 문제들이 해결될 뿐 아니라 닫혔던 영의 눈이 열려 주님의 역사를 보고, 막혔던 영의 귀가 열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이 열려져 주님과 교통하며, 입이 열려 주님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감격 속에 주님을 따르는 참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