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제자도: 버림과 따름

Author
Myung Myung
Date
2021-10-03 14:08
Views
330

한국에서 경제사정이 어려웠을 때 생겨난 단어들이 많습니다. 이태백 (20대 태반이 백수), 삼팔선 (38세 즈음에 퇴직), 사오정 (45세 정년), 오륙도 (56세까지 일하면 도둑) 등등. 취업난이 심각하니까 대학가에서도 많은 단어들이 만들어졌는데, 그중에 ‘낙바생’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어렵듯 취업이 어려운 졸업예정자를 가리킵니다. 낙바생이란 단어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본문을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올 때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달려와서 꿇어앉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떠날 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습니다. 예수님께 올 때와 갈 때의 모습이 왜 이렇게 다릅니까? 자기가 붙들던 것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자칫하면 인생에 진정한 의미를 제공하지 못하는 허상을 붙들거나 엉뚱한 것을 붙들기 위해 애쓸 수 있습니다. 본문 앞절을 보면 안수를 받겠다고 아이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꾸짖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들의 것이니 그들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부모를 절대 의존하고 부모가 준 선물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베푸신 은혜를 인정하는 것이 천국백성의 모습입니다. 본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붙들며 누구를 따라가야 합니까?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버릴 것은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가르치신 바른 재물관과 구원관을 삶에 적용하며 영생을 확신할 뿐 아니라 주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부자 청년의 질문(17-20절) 


그 동안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은 질병에 걸리거나 귀신에 들리는 등 문제가 있고, 사회적으로도 신분이 낮거나 소외된 계층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이 청년은 그들과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입니다. 같은 사건을 마태복음 19장과 누가복음 18장에서도 다루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재물이 많은 청년으로, 누가복음에서는 관리로 소개됩니다. 세 복음서를 종합해보면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은 부자 청년이요 관리입니다. 젊은 나이에 어떻게 많은 재산을 가지게 되었고 관리까지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세상적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더구나 그는 그저 세상의 것만을 목표로 삼고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보통 젊은이들과 달리 영생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율법을 열심히 지켜도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까 고민을 하던 차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마침 예수님이 근처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 달려 나와 꿇어앉으며 겸손한 자세로 묻습니다.  


 


사실 청년은 예수님을 그저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며 좋은 일을 많이 사람정도로 알았기에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이 질문을 보면 청년은 영생을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다는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공적을 쌓는 것이고 그렇게 쌓아 영생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을 반영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이 말씀은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만약 선하지 않으시다면 예수님은 죄인이요 예수님이 죄인이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청년이 생각하는 선함의 의미가 주님의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선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완전성’을 의미하며 하나님께 적용되는 형용사입니다. 예수님은 관심의 초점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며, 그분 앞에서 겸손하심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십계명 중 다섯 번째 계명에서 열 번째 계명까지를 열거하십니다. 말씀하시는 것을 얼핏 들으면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행위 구원’을 지지하시는 것 같습니다. 청년은 자기가 행한 것을 인해 주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었는데 마침 자기가 어릴 때부터 잘 지켰다고 자부하는 십계명을 언급하시니까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지 모릅니다. 율법의 본래 의미는 instruction, 지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주신 지침입니다. 그 지침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계명을 행하라는 것과 계명을 행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진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선악과를 먹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영원토록 살았을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지킬 수만 있다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다는 점입니다. 율법의 규정된 계명을 대부분 지키고 한 가지만 못 지켜도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우리 속에는 아담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죄성이 있기에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염두에 둘 것은 무엇을 행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과 얼마나 올바른 관계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영생은 인간의 노력이나 재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부자 청년의 고민(21-22절) 


영어가 편한 Young adult들과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Overflow Ministry가 요즘 부흥하고 있습니다. 자주 단기선교를 갑니다. 모이기를 힘쓰고 모이면 기도하고 찬양하고 열심히 성경공부 하며 활기가 있습니다. 청년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전도도 열심히 하고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을 보면 얼마나 기특한지 모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나온 부자 청년이 영생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계명을 잘 지켰다는 말을 들으면서 예수님은 그를 아주 대견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그를 사랑하셨다고 마가는 기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지적하십니다. 만약 계명을 잘 지키는 것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수님은 그에게 더 노력해서 계명을 완벽하게 지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명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의 영적인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십니다. 그에게 있어 ‘부족한 한 가지’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 합당한 처방을 주십니다.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그분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며 따르지 않고서는 영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단지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먼저 가야 합니다. 이웃에 다가가야 합니다. ‘판다’는 과거명령형입니다. 네 소유를 당장에 다 팔라는 뜻입니다. ‘주라’도 과거명령형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당장 나누어 주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나서 나를 계속해서 따르라고 하십니다. ‘와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제자로 부르시는 결단의 요청입니다. 지금까지 청년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제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일’로 전념해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은 8:34에 언급하신 제자도를 정확하게 반영합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라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합니다. 


 


주님을 만나면 위로를 받고 치유를 받고 삶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혈루증 걸린 여인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 병을 치료받았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주님이 찾아가시니 다시 살아났습니다. 사람의 낯을 피해 뜨거운 낮에 물을 길던 수가 성 여인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새롭게 인생의 의미를 깨달으며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왔던 아버지는 주님을 만나고 나서 믿음을 가지게 되고 자기 아들은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기는커녕 도리어 마음에 부담을 안고 주님 곁을 떠나간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 하나가 됩니다. 재물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여전히 재물을 붙들고 있을 것이냐의 기로에서 재물이 많기에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나가 버립니다. ‘슬픈 기색을 띠다’의 원래의 의미는 ‘진노하다, 충격을 받을 정도로 놀란다’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에 그 청년은 깜짝 놀란 것입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어린아이처럼 절대적으로 주님을 의존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 청년은 영생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는 하였으나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는 자기의 재물을 포기하면서까지 영생을 얻으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영생의 길을 마다하고 예수님 곁을 떠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가지 말라고 붙들지 않으십니다. ‘힘든 요구를 해서 미안하다. 너를 놀라게 할 생각은 없단다. 네가 소유한 모든 것을 팔 생각이 없다면 얼마까지 포기할 수 있겠니?’라고 설득하지 않으십니다. 영생을 얻는 것은 토론이나 타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에 해당합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지만,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 때문에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부자와 천국(23-27절)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간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러보시면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랍니다. 당시 부자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들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낙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는다’(17절)고 한 것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25절)고 표현하고, 제자들은 그것을 26절에서‘구원을 얻는다’라고 합니다. 모두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낙타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장 큰 동물이고 바늘구멍은 아주 작은 구멍을 말하는 것으로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선순위가 그 사람의 가치관을 반영합니다. 그 청년은 자신에게 재물을 주신 하나님보다 재물 자체에 더 높은 가치를 두었습니다. 


  


재물과 하나님의 나라가 양립하기 어렵다는 점은 이미 산상수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는 교훈을 통해 지적된 바 있습니다. 낙타의 비유를 들은 제자들이 아까보다 더 놀랍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 제자들이 가졌던 구원관이 흔들립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구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존뿐입니다. 그러나 청년은 재물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하나님이 세우신 메시아를 의존하지 못했습니다. 구원은 사람의 소유나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주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헌신과 보상(28-31절)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렇다면 우리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제자들이 갑자기 불안해합니다. 그때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보소서”증거가 너무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라는 말을 통해 자기들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을 버리지 못해서 주님을 따르지 못하였는데 그와 달리 자기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자기들은 확실히 구원받았다는 것을 보장 받고 싶어 합니다. ‘버린다’는 비유적 표현으로 소유권을 하나님께 이전하거나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뜻에 둔다는 의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맡기신 사역을 제일 우선시하고, 그 일을 위해 가족과 소유를 뒤로 하고 떠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버리는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되는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따르는 사람들에게 어떤 약속이 주어집니까?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현세에 백배나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제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받았습니까? 예수님은 혈연관계를 넘어서 성도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가족’이 많아지는 것을 의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열두 명의 제자들로 시작되었는데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는 120명이 됐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다가 오순절에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외치니 하루에 3000명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행 4:3에는 믿는 남자의 수가 약 5천이나 되었다고 하면서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놀랍게 늘어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인 영적 가족입니다. 주님을 믿고 산다고 고난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치러야 할 희생에 비해 주어지는 복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재물에 대한 탐욕이든, 자기 의에 대한 집착이든 주님을 따르려면 다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의 상급과 영생의 선물이 결단코 제자들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다 버렸을 뿐 아니라 주님을 먼저 따랐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믿었으니, 더 일을 많이 했으니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지 주님의 판단 기준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 동기와 언어와 행위 등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다 보시기 때문에 우리의 판단에 따른 먼저와 나중이 많이 뒤바뀐다는 것입니다. 현실에 안주하거나 보상에만 마음을 빼앗긴다면 먼저 헌신한 사람일지라도 뒤처질 것입니다. 온전한 헌신은 현재 진행형이어야 합니다. 헌신에는 은퇴도 없고 안식년도 없습니다. 그것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보상은 내세에서 영생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버릴 것은 버릴 줄 알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며 영생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올바른 재물관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온 부자 청년은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영생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재물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이 주신 재물을 이웃과 더불어 나누지 못했습니다. 청년이 이해한 영생의 가치는 그의 재물보다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였습니다. 물론 부자 청년에게 하신 명령이 모든 부자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그의 경우는 재물에 대한 집착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데 걸림돌이 되었기에 그것을 언급하셨을 뿐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재물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재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돈을 버는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돈 때문에 신앙생활이 뒷전으로 처지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10). 결국 주신 재물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사용하는 가가 영생에 들어가기 위한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이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재물뿐이 아니라 시간이나 달란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을 잘 관리하는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 올바른 구원관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원자요, 심판자이십니다.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고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산 장사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서라도 얻어야 하는 귀한 분입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늘의 보화를 소망하며 이 땅에서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영생의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고, 만약 재물이나 세상 것이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 올바른 동기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들어보면 베드로의 말 속에 보상에 대한 기대가 들어 있음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버릴 때 그 동기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바른 동기를 가지고 모든 것을 버리고 제자의 길을 걸어간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진정한 보상이 뒤따릅니다. 그 보상은 현세적인 것과 아울러 내세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상과 함께 핍박도 받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방해하거나 지체시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됩니다. 부자 청년의 경우는 그것이 소유욕이었습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때 주님과 동행하게 되고 비로소 영생을 소유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좇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보다 가치 있고 영원한 것을 놓치는 어리석음이 없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가 부요한 자입니까? 많은 것을 소유한 자입니까? 많은 것을 누리는 자입니까? 주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입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주님을 따라가는 자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으로는 우리의 심령을 만족스럽게 다 채울 수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편안한 삶을 살아도 우리의 마음이 평안이 없을 수 있습니다. 열심히 채울지라도 여전히 허전한 곳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와 같은 영적인 공허함은 하나님의 말씀, 위로, 사랑에 힘입지 않고는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며 ‘아직도 부족한 한 가지’가 무엇인지 찾으시기 바랍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아름다운 사명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분명한 구원의 확신 속에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며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을 감격시키며 상급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