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제자도: 하나 되게 하는 섬김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9-12 17:13
Views
311

2001년 9월 11일은 화요일이었습니다. 요일까지 기억하는 이유는 그 날이 노회 둘째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장로 총대였던 김성규 장로님과 월요일 저녁 첫날 회의를 마치고 노회장 근처에 있는 모텔에 자고 노회장으로 왔습니다. 모텔에 있을 때 TV를 보지 않았기에 아침에 무슨 일이 벌어진지 몰랐습니다. 아침 예배 시간에 어떤 장로님이 기도하시는데 지금 미국에 전쟁이 났으니 안전하게 지켜 달라고 하였습니다. 예배 후에 김 장로님과 저는 노회장을 슬그머니 빠져 나와 LA로 갔습니다. 평소 같으면 traffic이 엄청나게 심한 10번 Freeway에 다니는 차량이 별로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기는 했나보다 하고 Koreatown에서 송창대 집사님이 경영하는 진상 음식점에 가서 TV를 보았습니다. World Trade Center 쌍둥이 빌딩이 불타는 장면이 중계되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던 두 빌딩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식당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아’하는 탄성을 냈습니다. 그 사태로 인해 사망자가 3000명 가까이, 부상자가 6000명이 넘게 발생했습니다. 미국의 역사를 9/11 이전과 9/11 이후로 나누어야 한다고 할 정도로 한 획을 긋는 충격적 사건이었습니다.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나 그 상처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9월 11일이 올 때마다 그때의 장면을 떠올리며 여전히 안타까워합니다. 지난 8월 31일에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 철수했지만 테러와의 전쟁은 아직도 끝날 기미가 없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9䞇테러 20주년 기념 연설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국가에 대해 근본적인 존중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unity (하나됨)을 촉구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하나됨은 중요합니다. 우리 몸은 수많은 세포와 신경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 건물도 수많은 자재와 부품들로 지어졌습니다. part 하나하나만 보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그것들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것이 만들어집니다. 각자의 개성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 개성이 하나로 잘 융합될 때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하나 됨을 위하여 중보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본문에도 제자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사역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자신들의 테두리 안으로 제한하려는 제자들의 배타적인 태도를 지적하십니다. 또한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언급하시면서 하나가 되는 비결을 말씀하십니다. 가정이든 교회이든 주님의 제자답게 살면서 하나가 되는 아름답고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지체를 위한 섬김(38-41절)


요한은 귀신을 쫓아낸 사람에게 더 이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도록 금하였다고 예수님께 보고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르다’가 미완료시제로 되어 있으니 그 사람이 이제까지 계속해서 제자들 무리에 속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 외에는 자기들만 귀신을 쫓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니 당황했습니다. 더구나 제자들은 얼마 전 귀신들린 아이를 제대로 고치지 못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아이의 아버지로부터  “저희가 능히 쫓아내지 못하더이다”하는 창피스런 말을 들어 자존심이 몹시 상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만이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고 기득권을 주장합니다. 자기들은 하지 못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하는 꼴은 보지 못하겠다는 시기심이 있습니다. 요한의 발언은 앞 단락에서 ‘누가 크냐’라며 서열을 따지며 논쟁했던 것과 연결됩니다. 그 논쟁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공동체 안에서 권력 다툼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면, 여기서 요한이 제기한 문제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자신들의 공동체의 영역 안으로만 제한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요한의 배타적인 행동에 대하여 예수님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자신들만의 일로 만들어 버리려는 제자들의 잘못을 바로 잡으십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는 수용적 말씀이 마태복음에서는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12:30)는 배타적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차이는 그 말씀의 상황과 대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의 기적을 바알세불의 활동으로 돌리려는 대적들에게 주어진 것인데 비해, 마가복음의 말씀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지만 열두 제자 집단에는 속하지 않은 자들을 두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는’이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요한이 생각한 공동체의 기준은 자기와 함께 있느냐 하는 공간적인 개념입니다. 중심에 자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를 기준으로 삼으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관용과 연합과 교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독선과 아집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 방법이나 노선에 맞지 않는다고 성급하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자기와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다는 이유로 마음을 닫아서는 안 됩니다. 특권의식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사역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관용을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열두제자 그룹에 속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어느 편에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하는 편에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대적하는 편에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대접을 받기 위하여 높은 자리를 노리며 자신의 인기나 명예를 얻기 위해 분주합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싸움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진정으로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만이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크냐 할 때는 자기를 드러냅니다. 이웃을 경계나 경쟁의 대상으로 대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본받으며 이웃을 섬길 때는 사랑으로 대하게 됩니다. 겸손과 인내로 대하게 됩니다. 기쁨으로 대하게 되고 자기의 행동을 절제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경쟁과 남들보다 높아지려는 욕망에서 자유함을 가집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인 야망에 붙들려서 으뜸이 되고자 했던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제자도를 가르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제자들이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결국 ‘예수님을 믿는 자’를 뜻합니다. 누군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반드시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당시 중동 문화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 한 그릇을 주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섬김이었기에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상을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죄를 멀리하는 섬김(42-49절) 


37절은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문제를 42절은 소자를 실족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이 두 말씀은 세상적으로 무가치해 보이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소중하다는 원리를, 전자의 경우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후자의 경우는 부정적인 관점에서 언급합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내어 쫓는 자를 금지한 제자들의 행동과 관련해서 실족하게 하는 죄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한다면 그는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연자 맷돌’을 직역하면 ‘나귀가 끄는 맷돌’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가정에서 쓰는 손 맷돌보다는 훨씬 크고 무거운 것입니다. 여기서 ‘작은 자들’이란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아직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죄짓게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리조’는 ‘걸려 넘어지게 하다’라는 뜻으로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는 돌밭에 뿌려진 씨에 해당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들입니다(4:17). 여기서도 배교나 믿음을 저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믿음이 성장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후자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사람들은 능력이 많아 그 능력으로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가 실족시키지 않는 것이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누가 작은 자들을 실족케 합니까?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 가운데서 만나게 되는, 특히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만나게 되는 ‘작고 미미한 자’처럼 보이는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손과 발이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눈이 범죄하게 하거든 빼 버리라고 하십니다. 손과 발과 눈이 죄를 범한다는 것은 그 신체 기관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손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 섬기라고 지어졌는데, 오히려 남의 것을 빼앗거나 해치는데 사용된 경우를 말합니다. 발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고 복음을 전하라고 지어졌는데, 오히려 세상의 욕망과 쾌락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 위해 사용된 경우를 말합니다. 눈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들과 사랑의 눈빛을 나누라고 지어졌는데, 오히려 세상의 부귀영화만 바라보고 악독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보는데 사용된 경우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물론 문자적인 적용을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 손이나 발을 찍어 내도, 눈을 뽑아내도 범죄는 얼마든지 계속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육신은 상할지라도 영생을 얻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던져진다’는 요한계시록에서 짐승들, 거짓 선지자들, 마귀들, 나아가 사망까지도 불 못에 던져질 때도 사용됩니다. 천사가 용(사탄)을 잡아 무저갱에 던져 넣는다 할 때도 같은 단어가 사용됩니다(계 20:3). ‘지옥’으로 번역된 헬라어 ‘게헨나’는 원래 ‘골짜기’를 뜻하는 ‘ge'와 ‘힌놈’이 합성된 히브리어로 ‘힌놈의 골짜기’혹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는 가나안의 신 몰렉과 바알을 숭배하던 곳으로, 자녀들을 불에 살라 바치거나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했습니다. 요시야 왕이 종교 개혁을 할 때 이 힌놈의 골짜기에서 이뤄진 우상 숭배를 금지했습니다. ‘게헨나’는 예수님 당시에 모든 악한 자들이 불의 심판을 받는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공관복음서에도 ‘게헨나’라는 단어가 11번 나오는데 모두 예수님이 언급하셨습니다. 게헨나에 온 악인들의 몸을 구더기가 파먹는데, 그 구더기가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습니다. 유사한 묘사가 이사야 66:24에도 나옵니다.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예수님이 이 구절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다면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들을 죄짓게 하는 일이 하나님께 패역한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손과 발을 잃고 불구자가 되어서라도 ‘영생’을 얻는 것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고 했는데, 눈을 주제로 말씀하실 때는 ‘영생’대신에 ‘하나님 나라’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옥’의 반대말이 ‘영생’혹은 ‘하나님의 나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불구로 들어간다는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불구의 상태로 천국에서 살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그곳은 아픈 곳이 다시 있는 곳, 진정한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계 21:4). 이 땅에서 불구인 사람이라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온전한 몸을 갖게 됩니다. 가르침의 핵심은 신체의 일부를 베어 버리는 것과 같은 강한 결단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죄를 근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 단락과 연결시킨다면 근절해야 할 죄의 목록에 믿는 자들에 대한 편협한 생각과 시기심도 포함될 것입니다.


 


화목을 위함 섬김(50절)


48절이 종말에 있을 불 심판을 가리킨다면, 49절은 정결케 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한다는 것은 구약에서 제물을 드릴 때 소금으로 정결케 하는 과정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레 2:13; 겔 43:24). 제자들이 소금으로 치듯이 희생 제물 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육체 일부를, 혹은 자신 전체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심정으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50절은 소금이라는 모티브로 전체의 결론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말씀하신 후 서로 화목할 것을 교훈하십니다. 이 화목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 됨입니다. 소금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이루는 제사에 사용되는데, 제자들이 바로 세상의 소금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화목을 이루는 도구로 부름을 받았기에 성도는 서로 사랑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생명을 주심으로 믿는 자들의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도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섬김의 삶을 살며 화목하길 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골로새서 4:6에서 성도의 언어생활이 은혜로 가득 차야 한다고 말합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지금까지 살펴본 8:27부터 9:50까지 정리해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질문들을 각자에게 할 수 있습니다.


- 예수님에 대한 나의 이해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 무엇을 하셨는지 바로 아는 것이 신앙생활의 첫 출발입니다. 그래야 그분을 바로 믿을 수 있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다양한 메시아상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들은 다른 유대인들처럼 육신적인 메시아, 영광의 메시아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고난 받는 메시아상은 그들의 기대와 다른 것이었고,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8:32; 9:32).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으면 참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바로 알고 그분의 삶을 본받을 때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됩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고 있습니까?  


참 제자는 십자가의 길을 방해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 자신도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거듭된 가르침에도 그 길을 따르기보다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을 높이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며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며 섬김의 삶을 살지 않으면 주님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 삶은 결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자원해서 주님이 가신 길을 가야 합니다.


- 공동체 안에서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습니까?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서 그분을 위해 살아갑니다. 교회가 그분의 것이라면 그 지체인 성도들을 잘 섬겨야 합니다.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은 자신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한 영역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활동을 막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사실만으로 물 한 잔 대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관용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관용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독선과 아집은 피해야 합니다. 다른 성도를 존중하고 최선을 다해서 섬기려고 합니까? 아니면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고 정죄하며 실족시킵니까? 자칫하면 우리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 타인을 실족케 할 수 있는 행위가 있지는 않습니까?  


영생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받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받아 누리기 위해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특히 형제나 자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화목을 위해 힘쓰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범하는 죄는 손, 발, 눈 등 육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 손이 형제자매를 아프게 하면 찍어 버리고, 내 발이 형제자매를 나쁜 곳으로 인도하면 찍어 버릴 것이며, 내 눈에 형제자매의 잘못만 보인다면 눈을 뽑아 버리는 게 낫다고 하셨습니다. 그 정도로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서로 사랑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물론 죄에서 완전히 떠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과정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얻게 될 영생은 상상치 못할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줍니다. 교회가 나뉘고 반목하는 모습을 보시면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과 배려를 통해 우리는 세상에 예수님의 제자로 알려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며, 세상을 구원의 길로 이끕니다.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은 결코 자연스럽게 드는 마음이 아니지만, 사랑하기로 결단하고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하나님은 죄의 문제를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실족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려 주시면서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반목과 질시와 배척은 대적을 만들 뿐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입니다(롬 12:18).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지금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그분이 친히 심판하시고 개입하심도 믿을 때 지체들에게 관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화목을 이루고 막힌 담을 허무셨던 것처럼 우리도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화목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요, 교회를 아름답게 세우는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셔서 복음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힌 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삽니다. 주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신다 할 정도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의 사랑이 피부에 와 닿습니까? 팬데믹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테러의 위협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기후 변화로 인해 폭염과 가뭄도 있습니다. 말세의 징조들이 분명히 나타나는 상황에서도 우리의 시선은 여전히 주님께 고정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강권적인 사랑에 이끌려 관용과 화목을 실천하면서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