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교회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1-02 14:36
Views
361

오늘은 신년 첫 주일입니다. 지금은 지난해까지의 삶을 돌아볼 뿐 아니라 믿음으로 새해를 달려가기를 결단할 때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말씀의 열매를 거두는 자들입니다. 말씀에 각자의 삶을 비추어보아야 하고, 말씀에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송구영신예배 때에 각 가정에 하나님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번에도 146가정에 드리는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매년 축복 성구를 기도하는 가운데 준비합니다. 교회의 신년도 표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년 8월부터 신년도 표어를 무엇으로 할지 구상하기 시작해서 10월말 정도에 결정합니다. 작년도 표어를 ‘주님과 동행하여 역동적으로 섬기는 교회’로 하면서 섬김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강해설교를 통해 섬기려 이 땅에 주신 주님을 살펴보았습니다. 금년에는 온 교우가 선한 청지기가 되어 한 마음으로 신앙의 경주를 하며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자는 취지로 표어를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교회’로 정했습니다. 오미크론 변종 바이러스로 인해 확진자가 계속 늘고 있습니다. 가족이나 친지 중에 확진자들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with Corona 시대입니다. 당연히 조심해야겠지만 그렇다고 두려움에 떨며 무조건 피하고 취소한다고 상책은 아닙니다. 팬데믹을 적극적으로 헤쳐 나가는 지혜와 대비가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임인년 호랑이해에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주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호랑이 같이 강하고 담대하게 감당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배경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가 어떤 복음을 전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 사함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믿고 그들을 중심으로 갈라디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이 교인들을 미혹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에다 율법을 더했습니다.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므로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야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합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행동을 하면 좀 더 확실하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거짓선생들은 바울을 비난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칭 사도요, 예루살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주워듣고 거기에다가 자기 것을 더하면서 변질시켰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눈이라도 빼서 주고 싶을 정도로 바울을 따르고 존경하였던 교인들 중에는 복음에 대한 기쁨과 열정을 잃어버리고 바울을 원수같이 대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붙여주신 양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4장을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의 태도를 인하여 섭섭해 하거나 낙심하기보다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해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많이 언급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율법입니다. 율법의 의미는 instruction,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주신 지침입니다. 지침대로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대로 살지 않고 도리어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다가 귀환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길을 새롭게 열어 놓으셨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할 뿐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일부 교인들이 생명의 법을 버리고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보장받으려 했습니다.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고 남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시선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때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업적, 학벌, 권세, 명예, 외모는 구원과 아무 상관없는 것들입니다. 그런 육체의 자랑을 늘어놓는다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의 참된 의미가 무엇입니까? 자기 안에 있는 죄스러운 본성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 10:16). 보이기 위한 할례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이미 3500년 전에 모세를 통하여 경고하셨습니다. 아무리 결단을 해도 우리 안에 있는 악하고 더러운 본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기에 우리 밖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할례를 통한 육체의 자랑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주와 실패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꺼려하는 그 십자가 때문에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제 우리는 거듭난 것으로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성령을 좇아 행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바울의 십자가 자랑(14-16절)


육체를 자랑하는 유대주의자들과 달리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바울 자신도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기에 할례에 관하여 그들보다 앞섰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것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후서 12장에 보면 바울은 천국에 다녀온 희한한 경험을 하였으나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처음에는 자기 몸에 가시가 있는 이유를 알지 못했기에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응답으로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약한데서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육체에 가시를 주신 것은 바울이 겨만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은혜에 머물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의 표시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록 기도한 대로 응답을 받지 못했으나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약함의 자랑입니다.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당시 십자가는 로마제국의 반역자와 노예들에게 부과되었던 형벌 제도였기에 전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사도 바울에게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은혜의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도 교회가 자랑하는 것이 예배당 규모나 교인 숫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얼마나 많은 봉사와 사역을 하는 지에 대해 자랑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오직 우리를 위해 세상에 오셔서 온전한 순종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뿐입니다. 날마다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찬양하고 예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모르는 영혼들에게 십자가를 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여기서 ‘세상’은 인간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의 삶의 원리’를 뜻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는 완료 시제 수동태입니다. ‘못 박힘’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전에 추구하던 삶의 방식과 단절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에게는 할례나 무할례가 하나의 관습에 불과할 뿐이며 중요한 것은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의 타락으로 첫 창조의 회복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새 창조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의 자녀 된 새로운 신분을 얻은 자에게는 옛 질서와 제도가 아닌 새로운 신분에 합당한 삶이 요청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죄 가운데서 구원과 새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언약을 잇는 참이스라엘이 되는 것은 육체의 할례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할례자들도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참이스라엘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새로운 규례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이 규례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 계명입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사랑을 이제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툼과 분쟁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을 세상에 드러내는 유일한 곳입니다. 만약 교회가 이 사명을 잃는다면 세상은 어두워질 것이며 희망이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흔적(17-18절)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면서 육체의 모양을 내는 자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하면서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이 바울의 사역을 방해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선언합니다. 직역하면‘어느 누구도 나에게 괴로운 일을 더하지 말라 왜냐하면 내가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입니다. 주름은 세월의 흔적이라 하지 않습니까? 흔적이 삶을 말해줍니다. 원래 ‘흔적’이란 단어는 종이나 짐승을 식별하기 위해 찍는 낙인을 의미했습니다. 바울에게 ‘예수님의 흔적’이란 예수님께 충성한 결과로 받은 핍박의 흔적이며, 고난의 상처였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인생이 그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유가 된 바울은 수많은 고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예수님의 흔적’은 복수형으로 되어 있어 ‘예수님의 흔적들’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대적들로부터 위험을 당하고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으며 죽을 고생을 하였는데 그 모든 표시가 예수님의 흔적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섬기다가 생긴 고난의 흔적을 자랑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자랑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십자가의 능력만이 우리를 세상의 헛된 자랑에서 자유하게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예수님의 흔적이 있으십니까? 혹시 예수님의 흔적이 아닌 세상의 흔적으로만 가득하지는 않습니까? 그 흔적은 세상과 타협할 때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시간, 달란트, 물질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섬길 때에 예수님의 흔적이 생깁니다. 주님을 인하여 손해를 보거나 고민하고 씨름해야만 예수님의 흔적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흔적은 괴로움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주님과 연합된 영광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애쓰며, 수많은 고통과 갈등 중에도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혈통이나 할례가 진정한 믿음의 표시가 아니듯, 외적인 직분이나 성취가 믿음의 표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 세상의 흔적을 지우고 예수님의 흔적을 새겨야 합니다. 율법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진리를 붙드는 자들에게 바울은 주님의 위로와 평강과 기쁨을 약속합니다.   


 


* 우리의 자세


-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와에게 다가온 사탄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동산 중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너희도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했습니다(창 3:5).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주인이 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사탄은 오늘도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주인이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분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신뢰를 얻어 주인의 것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또한 주님이 허락하신 시간과 재물과 건강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예수님이 종말에 각 사람을 판단하시는 기준은 하나님의 청지기로 이 땅에서 얼마나 충성스럽게 살았는가 입니다. 맡은 일의 크기나 중요도에 상관없이 주어진 일을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은사를 가지고 봉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말하며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봉사해야 합니다(벧전 4:10-11).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 맡은 직분에 충성함으로써 교회 공동체의 결속을 공고히 해야 합니다.


  


- 한 마음으로 신앙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3). 자기를 부인하려면 무거운 짐, 전에 좋던 세상 것들을 버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대함으로 각자에게 주시는 약속을 붙잡으시고 믿음을 가지고 기도함으로 구체적인 목표와 추진력을 얻어야 합니다. 신앙의 경주를 하면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히 12:2). 바울은 복음의 영광과 썩지 않을 상급에 참여하기 위해 열정과 최선을 다했습니다. 바울은 신앙생활을 운동 경기에 비유해 선수들이 상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그렇게 달음질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고전 9:24). 세상의 경주를 하는 사람들은 썩어 버릴 승리자의 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절제하며 최선을 다하는데,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을 위해 당연히 위해서라면 더욱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이 성령을 통하여 감당할 힘을 주십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의 아름다운 경주의 모습을 하나님께 증거하실 것입니다. 그럴 때 귀한 상급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믿음의 경주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하는 경주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함께 달리는 경주자들입니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달려 나아가야 하는 신앙의 동지들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으로 상처받은 자의 상처를 싸매 주고 힘들어하는 자들을 격려하여 더불어 나아가야 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3-14).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세상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문제는 그런 정체성을 가진 자로서 사느냐, 아니면 그 맛을 잃고 빛을 가려 버린 채 사느냐 입니다. 빛과 소금은 성도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빛과 소금이라 말하지만 성경을 보니 순서가 있습니다. 무엇이 먼저입니까? 교회가 먼저 세상의 '소금'으로서 세상의 부패를 막고, 상처를 치유하며,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파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8-9). 바울은 구원받는 것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겨오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을 '빛의 자녀들'이라고 부릅니다. 빛의 자녀다운 행동은 '빛의 열매'로,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복에 초점을 맞추면 교회는 산 위의 도성이 될 수 없습니다. 은과 금은 있을지 몰라도 세상으로 하여금 일어나 걸으라는 능력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착한 행실들’로 ‘소금과 빛’노릇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또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세상은 정의, 화평, 자유, 친환경적 삶, 건강이 확대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성도들의 '착한 행실들'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돌아옵니다. 이것이 교회가 '빛' 노릇하는 길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즉 거룩한 영향력을 세상에 끼치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나가면서


2022년도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금은 결단의 새아침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가정, 직장, 교회에 어떤 뜻을 정하고 주님께 순종하기 원하십니까? 믿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인하여 기다렸다는 듯이 그럴 줄 알았다고 비난하거나 빈정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만 알아주시면 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 일이 크든 작든 상관이 없이 충성해야 합니다.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충성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제는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닌 주님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이 주님이 함께 하는 삶이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이요,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는 삶입니다. 2000년 전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이 오늘도 우리들과 함께 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고 영광받기 원하십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오늘날도 만물의 창조자께서 온 땅을 두루 살피시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을 찾으십니다. 헌신은 우리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맡아 잘 관리해야 하는 청지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재물 뿐 아니라 시간과 달란트도 잘 관리하고 주님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각자를 향한 사명을 회복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함으로 주님이 베푸시는 놀라운 능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아름다운 팀웍을 이루며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감에 불타는 인생은 이 세상의 것들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될 때 주님의 흔적이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성령 충만하여 생명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춤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하는데 앞장을 서시는 주역들이 되고 맡겨진 사역을 새해에 충실하게 감당하면서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교회로 함께 지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