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큰 기쁨의 좋은 소식

Author
Myung Myung
Date
2021-12-19 18:12
Views
317

2021년 12월 10일 현재 지구촌의 인구가 약 79억 명입니다. 인구증가율이 전보다 감소했지만 그래도 매년 8000만 명 이상씩 인구가 늘어갑니다. 아담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났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사건보다 더 위대한 탄생은 없습니다. 성육신 사건은 전에도 없었고 현재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독생자, 즉 독특하신 분이라 부릅니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하는 구절이 많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거나 유대 땅이 온통 잔치 분위기에 휩쓸렸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나심조차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인물들이 탄생 현장을 방문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구속 드라마 중 ‘탄생스토리’편에서 하나님은 세상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비중 있는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아기 예수를 영접한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던 목자들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역사하셨고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살펴보면서 성탄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 어느 때보다 뜻 깊은 성탄절을 맞이하기 바랍니다. 


  


요즘처럼 교통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8km 쯤 떨어진 베들레헴까지 가자면 보통 사람도 삼일은 걸리는데 더구나 만삭이 된 마리아를 이끌고 가려면 아마 며칠은 더 소요되었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하기는 하였지만 머물 곳을 미리 정하고 온 것이 아니었기에 빈방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있게 된 곳은 냄새나고 불결한 헛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낳았습니다. 세금과 징집을 위한 목적으로 인구조사를 하라는 로마 황제의 명령을 인해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베들레헴에 왔지만 결과적으로 700년 전 미가 선지자가 메시아가 탄생하실 장소에 대해 한 예언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미 5:2).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는 보통 사람들도 있기 꺼려하는 누추한 곳에서 나셨습니다. 죄악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특권과 영광을 버리시고 구유에 누실 정도로 자신을 낮추시며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처음으로 복음을 들은 목자들(8-12절)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다는 특종 뉴스가 누구에게 먼저 알려졌습니까? 로마의 황제도, 유대인의 왕으로 자처하는 헤롯도, 성전의 총책임을 맡고 있던 대제사장도 아니었습니다. 목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그들에게 성탄의 소식을 알려주셨습니다. 목자들은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멸시와 천대를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양들에게 먹일 꼴과 물을 찾아 계속 옮겨 다녀야 했기에 일반 사람들과 관계를 갖기 어려웠고 마을 사람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도둑으로 몰리기도 했습니다. 목자들의 말은 신뢰할 수 없다하여 재판정에 증인으로 설 수도 없었습니다. 낮에는 풀을 찾아 양떼를 끌고 다니고 밤에는 우리에서 양들과 함께 자야 하니, 그들의 삶은 언제나 고달팠습니다. 그날 밤도 목자들이 베들레헴 마을 밖 한적한 들녘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만일 목자들이 양들을 내버려두고 따뜻하고 편안한 곳을 찾아 마을로 들어갔다면 주의 사자를 만나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실하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찾아오십니다.  


 


주의 사자가 갑자기 목자들 앞에 나타나자 주의 영광이 그들 주위를 두루 비춥니다. 그 영광의 광채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의 표시입니다. 목자들은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를 직역하면 ‘큰 두려움으로 두려워하는지라’가 됩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큰 두려움과 큰 기쁨을 대조합니다. 천사는 무서워 떨고 있는 목자들을 안심시킵니다. 사가랴(1:13)나 마리아(1:30)에게 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라고 하면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을 그들에게 전해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앞서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좋은 소식’(1:19)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탄생에는  '큰 기쁨'이라는 수식어가 더 붙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아구스도는 온 세상에 기쁨과 평화를 주는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신격화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세상을 건지는 구원자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온 세상에 큰 기쁨과 진정한 평화를 주시는 분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전한 소식의 내용은 구원자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자가 ‘그리스도 주’라고 합니다. ‘주’는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헬라어 호칭입니다. 아기 예수가 하나님(1:46,58)과 동일한 칭호로 불리는 것은 그분의 신적인 신분을 암시합니다. 천사는 구원자 그리스도 주의 탄생에 대한 표적을 제시합니다. ‘표적’은 복음서에서 대부분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나타내며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표적은 ‘증거’라고 할 수 있으며 아기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세상의 구주이자 왕이 아주 비천하고 낮은 곳에 누워 계신 아기라는 사실이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역설이라는 것입니다. 낮고 천한 자리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의 모습은 그가 참으로 가장 낮은 데서부터 세상 모든 사람을 가슴에 품는 구원을 가능하게 하실 것임을 암시합니다. 복음은 낮고 천한 자들,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 아픔과 절망 중에 있는 자들에게도 임합니다. 


 


천군 천사의 찬양(13-14절) 


개역개정에는 “그 천사들과 함께”로 되어 있으나 헬라어 원문에는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한 천사가 수많은 하늘 군대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찬양의 내용 중 ‘지극히 높은 곳’과 ‘땅’, ‘하나님’과 ‘사람’, ‘영광’과 ‘평화’가 각각 짝을 이룹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것이 하나님께는 영광을 가져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만족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속죄 사역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백성은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된 평화를 얻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보혈로 씻김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과 화목하고 화평을 누립니다. ‘사람들’사이에 당연히 이방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당시 로마황제들은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실현하는 것이 그들의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평화는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힘으로 빼앗는, 로마 입장에서만 보는 평화였습니다. 침략을 당하고 빼앗기는 나라 입장에서 볼 때는 고통과 슬픔과 좌절을 느껴야만 하는 허울뿐인 평화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참된 기쁨과 평화를 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평화가 이 땅 가운데 이뤄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매일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주님을 찬양하며 높여야 합니다. 


 


목자들의 반응(15-20절) 


누가는 15-20절에서 일곱 개 동사를 연이어 사용함으로써 목자들의 반응을 생동감 있게 묘사합니다. 


-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합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전해준 말을 듣고 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천군천사의 찬양을 들으면서 어떻게 할 것인지 상의합니다. “베들레헴으로 가서”라는 말은 베들레헴에 가려면 상당한 시간과 수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런 수고가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에서 ‘알리다’는‘들추어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감추어진 구원의 비밀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이루어진”은 완료분사형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이루셨으며 지금도 변함없이 이루고 계심을 나타냅니다. 목자들은 빨리 베들레헴으로 가서 일어난 그 일을 보자고 하면서 지체하지 않고 달려갑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의심하거나 진짜인가 확인하기 위하여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믿었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고 싶어 합니다.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 합니다. 사실 천사는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이나 태어난 곳이 어딘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게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표적이 될 것이라고만 말해주었습니다. 만약에 아기 예수가 왕궁이나 성전에 계셨다면 목자들은 뵐 수 없었을 것이지만, 헛간에 있는 구유에 계셨기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성탄절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고 그분이 하신 일을 알고 싶어 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바울도 알고 싶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빌 3:10). 신앙의 경주를 잘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기 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알기 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어떻게 동참해야 할지 알기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믿은 지 오래될수록 신앙생활이 타성에 빠지기 쉽습니다. 왕년에 교회일은 할 만큼 했어 하면서 지금은 섬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게을리 합니다. 오히려 열심 내는 사람에게 몇 마디 툭툭 던지면서 시험 들게 합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주님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나이에 상관없습니다. 신앙의 연륜에 상관없습니다.  


- 받은 은혜를 나누고 싶어 합니다 


목자들은 들은 그대로, 본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태어난 아기가 구세주요, 메시아요 주님이시라는 것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하는 말을 듣고 놀라기만 할 뿐 시큰둥합니다. 믿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한다고 합니다. 미완료 시제로 사용된 ‘새기어’는 마리아가 목자들의 말을 지속적으로 마음에 두고 깊이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특히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잉태와 출산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기에, 목자들의 말이 그녀에게는 유달리 싶은 감동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마리아와 같이 말씀을 듣고 그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어떤 상황에 있어도 나를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사람, 함께 아파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서로 격려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을 때 신앙생활은 상승작용을 일으켜 더욱 풍성하여집니다. 고난을 헤쳐 가는 비결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과 성도의 교제를 통한 격려와 위로입니다. 목장이 그런 사역을 수행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합니다. 목장이 삶을 함께 나누며 고민하는 성숙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자연히 믿는 사람들과 주로 교제하게 되고 불신자들과 만날 기회가 점점 적어집니다. 교인들끼리 교제를 나누는 것을 편안해 합니다. 누가 가장 효과적인 전도자입니까?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가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믿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찾아오셨습니다. 전에는 주님을 몰랐으나 이제는 주님을 믿습니다. 전에는 내 마음대로 행하였으나 이제는 주님 뜻대로 행하려고 애씁니다.’이런 간증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듣기 원하시는 말이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기 원하시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를 바꾸신 경험이 바로 ‘나의 이야기’(my story)입니다. 그 ‘나의 이야기’를 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연관되어 실제 일어난 이야기에 끌리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을 높이고 싶어 합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전한 소식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을 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갑니다. “영광을 돌리고”와 “찬송하며”는 모두 현재 분사로 행동이 지속됨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드리는 가장 귀한 행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 목자들은 그 밤에 양떼를 지키면서도 피곤하지도 않고 신세타령도 않고 기쁨으로 감당하였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쁨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야합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 찾고 일할 때 열심히 일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보여주어야 하는 신앙생활의 참모습입니다.  


 


* 우리의 자세


우리 모두 목자들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초대를 받은 우리가 성탄절에 어떤 자세를 가져야할까요?


-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말세는 예수님이 처음 오신 때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의 기간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말세의 징조들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7). 주님이 언제 다시 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언제 오실 지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주님을 맞이할지를 알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잘 준비한 사람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천국잔치에 참여할 것이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버림을 당하고 영원한 멸망에 빠질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땅에서의 삶이 저 곳에서의 삶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재림의 준비는 어느 정해진 기간 동안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토록 해야 합니다. 그 날에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려면 지금 땀을 흘려야 합니다. 심는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여 주님 앞에 설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따라서 성탄절은 이미 오신 주님을 인하여 감사할 뿐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제대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현재의 신앙생활을 점검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 주님께 우리를 드립니다


만민의 구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다는 것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 소식은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모든 민족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생명의 복음입니다. 성탄절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자칫하면 주님이 빠진 성탄절을 보낼 수 있습니다.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절기가 될 수 있습니다. 성탄절의 화려한 행사나 선물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 진심으로 주님을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통한 구원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드려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2:2에서 우리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성탄절은 우리 자신을 드리는 날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시간, 물질, 달란트를 주님께 아낌없이 드리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 주님을 전합니다


첫 성탄절은 우리 주님이 하늘을 떠나 땅으로 오신 날입니다.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이 바로 구유에 나신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성탄절의 초점은 우리를 목숨 바쳐 사랑하신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성탄절은 온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믿고 영접해드릴 뿐 아니라 기쁨과 영광의 찬송을 하나님께 돌리고 성탄의 신실한 증인으로 살기를 다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나실 때는 천사들이 그 소식을 알려주었으나 이제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전해야 합니다. 전도는 예수님에 관한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목자들도 천사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한 것을 사람들에게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에게 전했습니다. 그들은 최초의 복음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 믿을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목자들이 누렸던 충만한 기쁨을 우리도 누릴 수 있습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동네도, 태어나 뉘었던 장소도 초라한 곳이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시골처녀인 마리아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보잘것없는 목자들을 통하여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 원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고 그것도 구유에 누워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 중에 그야말로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낮아지심은 우리를 높아지게 하심이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찾아오셔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들어오신 날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며 자신들이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본질입니다. 목자들은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구도자들이었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도자들이었고,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자들이었습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들도 하나님을 알기 원하고 그 경험을 나누기 원하고 그 하나님을 높이기 원해야 합니다. 이런 자세를 가질 때 우리는 성탄절을 축하할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 중에 바라보며 축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자들과 같이 우리 모두가 영적인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서 이 기쁜 소식을 듣기 원하십니다. 전하기 원하십니다. 경배를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로마 제국의 영화는 역사 속에 사라졌지만 구유에서 나심으로 시작한 예수님의 역사는 이천년이 지난 오늘도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고 이 시간 우리도 주님의 나심을 기념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들에게는 가장 크고 좋은 소식이요 기쁨이 됩니다. 주님의 나심을 기념하는 이 계절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누리는 그 평화를 누리시며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의 찬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