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Author
Myung Myung
Date
2021-11-28 15:05
Views
337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개역 개정판 성경에 3594번 나옵니다. 그 다음으로 많이 나오는 단어 중의 하나가 사랑입니다. 555번 나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시키려고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마침내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가 담당해야할 죄의 삯을 그에게 대신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기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나를 사랑하느냐”세 번이나 물으시면서 그를 회복시켜 초대 교회의 위대한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붙드시고, 이삭과 야곱을 붙드시고 베드로를 붙드신 하나님은 그 끈질긴 사랑으로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오늘부터 성탄절까지 4번의 주일이 포함된 기간을 교회력으로 대림절이라 부릅니다. 영어로 ‘Advent’인데 문자적으로는 ‘도착’이라는 뜻이며 의미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처음 오신 것을 기념하고 다시 오실 것을 소망하는 이 귀한 계절에 ‘위대한 계명’(Great Commandment)이라 불리는 구절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알고 그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연결시키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 마지막 주간에도 종교지도자들과의 논쟁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계속 증거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2장은 성전 안에서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이 벌이는 논쟁을 담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와서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하시자 그들은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사두개인들이 형사취수법을 근거로 부활에 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일곱 형제와 결혼한 여자는 부활 후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물었다가, 주님으로부터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 하시면서 그들이 절대 신뢰하는 모세 오경을 근거로 부활이 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28-30절)


사두개인과의 논쟁에서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에 감명을 받은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서기관은 율법사로도 불리며 처음에는 율법을 필사(筆寫)하는 일을 하였는데 점차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랍비로도 불리고, 율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율법을 해석하여 다시 세칙을 만들고, 이것을 종교생활과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예수님에게 적대적이었기에, 제사장들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서기관과의 대화는 여러 그룹과의 긴 논쟁에서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여기서 ‘첫째’는 순서상의 첫 번째가 아니라 중요성에서 첫째를 뜻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계명의 수는 613개입니다. 이 가운데 ‘...하라’는 긍정적 계명이 248개, ‘... 하지 말라’는 금지 계명이 365개인데, 이 조항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또 이 조항들을 총괄하는 대원칙이 무엇인지 이끌어 내려고 했습니다. 서기관의 질문도 그런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큰 것과 작은 것으로 구별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남들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하면서 막상 자신들은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에 천국에서 큰 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율법을 많이 알아서 가르치는 것보다 말씀 하나라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서기관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신명기 6:4-5을 기초로 답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히브리 원문은 “들으라”(쉐마) 하면서 시작되는데 유대인들이 이 구절을 하루에 두 차례씩 아침과 저녁으로 암송하며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애굽에서 구원하시며 광야에서 보호하신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아 들으라’라고 하시는데 ‘내가 너희를 택하여 불렀고 애굽에서 건져낸 여호와로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다하고’라는 표현이 반복된 것은 그분의 구원이 전적이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전심을 다해 드리는 예배와 순종과 사랑을 받으실 만한 분이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개역개정은 전치사구를 동사처럼 ‘다하고’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본동사는 ‘사랑하라’입니다. 이 구문을 직역하면 ‘너의 모든 마음으로, 그리고 너의 모든 생명으로, 그리고 너의 모든 뜻으로, 그리고 너의 모든 힘으로’


입니다. ‘모든 ~으로’와 ‘너의’가 네 번씩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모든’은 어떤 한 조각이나 한 부분도 떨어져 나가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우상이나 물질에 마음을 조금도 빼앗기기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은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을 말합니다. 다른 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며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목숨’으로 번역된 프쉬케는 ‘감정, 욕망’을 포함하는 ‘생명’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생명을 다하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뜻’으로 번역된 ‘디아노이아’는 원래 신명기 6:5에 없는데 새롭게 첨가된 것으로, ‘이해력, 통찰력’등을 가리킵니다. 올바른 지식을 갖고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힘’으로 번역된 ‘익수스’는 ‘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가리킵니다. 온 힘을 다해 봉사하며 재능과 물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힘’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전인격적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목숨 바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에게도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온 천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아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런 삶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입니다. 바울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2) 하면서 삶 전체로 하나님께 헌신하라고 권면합니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31절) 


‘하나님을 경외하라’‘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하나님과 기도와 말씀과 삶을 통한 신실한 관계를 가지며 하나님의 뜻에 철저한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우리의 가치관과 행동이 우리의 가정이나 대인 관계에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첫째 되는 계명을 물은 서기관에게 둘째도 말씀하십니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이 말씀은 레위기 19:18을 기초로 합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유대인들에게 이웃은 언약 공동체 소속인 형제들로 국한됩니다. 레위기 19:33-34에는 이웃의 범위가 확대됩니다. 이웃은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스라엘 땅에 거하는 이방인들을 향해서도 열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개념을 더욱 확대하셨습니다. 이웃은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도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의 개념을 수동적인 것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것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누가 이웃입니까? 모든 사람들입니다. 가깝게는 자기 가족들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우리의 이익의 대상이나 경쟁의 대상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원수나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예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이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함께 믿음 생활을 하는 지체들을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지금 주위에 있는 이웃을 위해 어떤 모습으로 사랑의 종이 되어야 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모든 제사보다 나은 두 계명(32-34절)


서기관은 그동안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를 수없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이 드려지는 제사와 삶 속에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채 드려지는 제사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라는 말씀에 대해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라는 말로 되받습니다. 서기관이 사용한 이런 표현은 신명기 4:35이나 이사야 45:21에 나오는데, 모두 이스라엘의 구원자요,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주요 절대 권세자이시며,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십니다. 또한 서기관은 율법의 중심 사상을 요약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나으니이다”는 문자적으로 ‘훨씬 더 많은’인데 ‘탁월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이야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최상의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희생제사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은 이미 구약에서도 언급되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주목할 만한 것은 성전 제물에 대한 서기관의 말이 예수님의 성전 멸망 예고 후에 기록되었다는 점입니다.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과 상징적 성전 심판 행위에서 나타났듯이 성전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성전 권력자들과의 충돌에 대한 결론으로써 유대교가 예수님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새롭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지혜 있게 대답한 서기관에게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다고 하시며 칭찬하십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분의 은혜 속에 살아가기에 부족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자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임을 보여주십니다. 비록 서기관이 성전의 주인이자 앞으로 성전을 대체할 제사의 제물이 되시고 그 제물을 친히 드리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그런 제사를 드리실 것을 은연중에 말한 셈이 되었습니다. 이제 서기관이 할 일은 예수님을 믿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마가는 서기관이 이후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는지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과 서기관과의 대화 이후에 아무도 감히 예수님께 더 이상 묻지 못했다고 언급합니다. 그만큼 이 대화는 무리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음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는 권위가 모든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를 능가하는 권위임을 결론적으로 언급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자세


예수님은 모든 계명 중에 가장 중요한 계명을 하나님 사랑이라 하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격적으로, 전심을 다해서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자신과 똑같이 관심을 가지며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떤 여행자가 강도를 만나 옷이 벗겨지고, 두드려 맞고, 가지고 있던 것은 다 털리고 길가에 버려져 거반 죽게 되었다는 비유가 나옵니다. 강도 만난 자 곁을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갔는데 그들은 외면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에게 있어 부정하다고 취급받는 사마리아인이 그를 불쌍히 여기고, 가까이 가고, 붓고, 싸매고, 태우고, 데리고 가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 물으셨습니다. 비유의 초점은 강도를 만난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에게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였던 이 사마리아인이야말로 진정한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신앙, 사회적인 배경과 상관없이 곤경을 당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이며 이웃 사랑은 그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이웃이 되려면 이웃을 보고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를 다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도 어느 한 사람의 필요는 채워줄 수 있습니다. 칭찬을 많이 하며 격려해 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는 것이 물론 중요하지만 그와 더불어 실천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원하는 성도의 삶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우리를 위해서만 사용한다면 그것으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웃을 찾아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말로만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실제적으로 돕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이웃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요나는 유대인들만이 자기의 이웃인줄 알았기에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고 유대인들만 자기들의 이웃인줄 알고 예루살렘과 유대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다가 스데반의 순교로 박해가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사마리아와 팔레스타인 지방을 넘어 전도의 지경을 넓혔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의 전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지 않는 선한 행위는 단순히 자선행위에 불과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자상한 배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의 몸을 아낍니다. 건강해지려고 음식을 조절하고, 운동을 합니다. 몸에 좋다는 것을 골라 먹습니다.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고 아끼듯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 관대한 태도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은 여지없이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은 정당화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관대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려면 이웃을 자기처럼 여기며 섬겨야 합니다.


- 신속한 섬김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그것을 얻으려고 얼마나 부지런하고 행동이 빠른지 모릅니다. 추수감사절 세일, Black Friday sale에 이른 새벽부터 밤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립니까?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잠 3:28). 이웃에게도 자신에게 대하듯 동일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 적극적인 대접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이는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흔히 ‘황금률’이라 불리는데, 행동으로 표현되는 이타적인 사랑에 대한 요구입니다. 


- 끈기 있는 사랑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 모든 것을 참으며 ...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합니다. 자신을 인내를 가지고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끈기를 가지고 사랑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나라입니다. 율법은 그 사랑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행동 지침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 땅에 오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셔서 복음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힌 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삽니다. 하나님 사랑이 넘쳐흘러 이웃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발전이 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예배하는 자는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 주신 것처럼 자기 이웃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율법의 핵심이요 또한 율법의 완성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신다 할 정도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의 사랑이 피부에 와 닿습니까? 이제부터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느끼며 그 강권적인 사랑에 이끌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코비드 바이러스의 새로운 변종이 나타났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이제는 팬데믹이 완전히 끝난 시대는 당분간 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물가가 뛰고 집값이 오르고 우리의 삶이 점점 팍팍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어둠은 빛 되신 주님을 만날 때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주님만이 주시는 참된 위로를 받으시고 그 위로를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빛 되신 주님을 기다리는 거룩한 계절, 고통당하고 멸시받는 우리의 어둠을 빛으로 이기실 주님을  만나는 성탄절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