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슬픔을 춤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11-22 01:16
Views
353

결혼식 피로연에서 춤을 춥니다. 신랑은 신랑 어머니와 춤을 추고, 신부는 신부 아버지와 춤을 춥니다. 몇 년 전 제 딸들이 차례로 본당에서 결혼식을 거행하고 피로연은 Vision Center에 있는 체육관에서 가졌습니다. 피로연 중에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춤을 추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춤을 추어 본 적이 없어서 얼마나 어색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딸은 그저 자기를 따라 움직이면 된다고 해서 저는 딸만 붙잡고 따라다녔습니다. 제대로 된 춤의 스텝은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다. 연습이 필요합니다. 헨리 나누엔은 ‘춤추시는 하나님’이라는 그의 책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곤경 속에 모셔 들일 때 우리의 삶은 혹 슬픈 순간일지라도, 기쁨과 희망을 딛고 섭니다. 하나님이 안무하시는 이 치유의 춤의 스텝을 통해 우리는 상처의 한복판에서 우아하게 미끄러져 나갈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상한 심령을 다시금 춤추게 하는 치유, 고난과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춤추게 하는 치유를 경험합니다.”우리 인생에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작년 3월부터 시작된 팬데믹이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우리의 삶이 팬데믹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근본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대면 예배, 온라인 예배, zoom meeting, 돌파 감염, 보복 소비 등등. 전에는 별로 사용하지 않았거나 새로 만들어진 단어들을 이제는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COVID-19 위협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거나 일부 지역에서는 오히려 확산되고 있습니다. 개스비와 식료품비를 비롯해 모든 물가가 계속 오르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현상이 있을 것인지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지금 어떠십니까? 아프십니까? 힘드십니까? 견딜 만하십니까? 현재의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까?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믿음의 주시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가 여전히 함께하신다는 점입니다. 금년에도 추수감사절은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감사는 믿음의 척도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대해 어떻게 감사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겠다는 초청입니다. 역경 속에서도 주님과 한번 춤을 추어보시기 않으시겠습니까? 어떻게 춤을 추는 것인지 시편 30편을 중심으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감사의 의미


‘감사’에 해당하는 우리말 표현은 ‘고마움’입니다. 은혜나 신세를 입어 마음이 흐뭇하고 즐거워함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구약에 나타난 ‘감사’라는 단어는 좀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감사하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는 ‘야다’입니다. 이 동사는 문맥에 따라 ‘찬양하다’(창 49:8) 혹은 ‘고백하다’(레 16:21)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잠언 31:28을 제외하면,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사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구약에 나오는 감사는 찬양과 신앙의 고백 혹은 죄의 고백인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믿음의 응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판단과 계산으로는 더 이상 희망을 찾을 길이 없는 상황에도 감사의 기도와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감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구약에서는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선포하고 있으며, 신약에서 감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증언합니다(살전 5:18). 찬송과 감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사와 찬양의 이유(1-3절) 


시인은 과거에 겪었던 환난을 회상하며 그 환난에서 구원받았던 체험을 서술합니다. 이 시편의 부제를 보면, ‘다윗의 시, 성전낙성가’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이 시를 썼는지 알 수 없기에 본 설교에서는 다윗 대신 ‘시인’을 주어로 사용하겠습니다. 이 시편은 감사의 고백과 그에 대한 이유를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시인은‘감사하다’라는 단어 대신에 ‘높이다’를 사용합니다. 감사를 하나님을 높이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높이는 이유를 세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그를 죽음에서 끌어내심으로 원수들이 기뻐하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끌어내다”의 본래 의미는 우물에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도저히 자기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마치 우물에서 물을 끌어 올리듯이 하나님이 도우셔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그의 병을 고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셔서 병을 고치셨다고 합니다. ‘부르짖다’라는 표현은 견딜 수 없이 위급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며 고치시는 능력과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셋째는, 그의 영혼을 스올과 무덤에서 끌어내셨기 때문입니다. ‘스올’이나 ‘무덤’은 하나님과 생명으로부터 단절된 곳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내려가다’와 ‘끌어올리다’라는 대조를 통해 하나님이 극적으로 구원하셨음을 강조합니다. 감사는 이와 같이 자신이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아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성도들을 향한 찬양의 초청(4-5절)


개인적인 구원 경험을 인해 주를 찬양하던 시인은 ‘주의 성도들’에게 여호와를 찬양하고 감사하자고 권합니다. 그런데 1-3절의 2인칭과는 달리 여기서는 하나님을 3인칭으로 부릅니다. 이런 인칭의 변화는 시인이 하나님께 직접 고백하다가 갑자기 청중을 향해 자신의 경험과 교훈을 설명하는 데서 기인합니다. ‘주의 성도들’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씨다브’는 은혜를 뜻하는 ‘헤세드’에서 파생된 것으로, 주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을 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과 신실함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에 그들을 초청합니다. 거룩함은 죄가 없으며 공의로우시며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 주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했지만 죄로 인해 하나님의 노여움도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깊은 체험에서 나온 고백을 합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개역 성경의 번역에는 감사하는 이유를 의미하는 접속사 ‘왜냐하면’이 빠져 있습니다. 짧은 문장에 4개의 대조가 나옵니다. 노염과 은총, 잠깐과 평생, 저녁과 아침, 울음과 기쁨.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를 또다시 하나님의 성품에서 찾습니다. 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잠깐이지만 언약백성에게 베푸시는 용서와 자비의 은총은 평생토록 이어진다고 하면서 진노와 은총을 대조시킵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잠시 머물지만 아침이 오면 어두움이 언제 있었는지 모르게 사라지듯이, 주의 노여움은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이 임할 때 기억에서조차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순탄하지는 않습니다. 때로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도 있습니다.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를 끌어 주시는 분이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의 삶에는 진심어린 감사와 찬송이 있습니다. 


 


역경 가운데서 도우심을 간구함(6-10절)


시인은 과거에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서 고통의 날을 경험했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삶이 형통하고 잘 풀리자 자신이 잘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앞으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잊고 자만심에 빠지자, 하나님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거두시고 근심과 고통을 주셨습니다.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 곧 시인에게 베푸시던 하나님의 은혜를 멈추신 것을 의미합니다. 형통할 때일수록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교만과 죄로 인해 고통과 죽음의 위기 상황에 빠진 시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여호와여’라고 외치며, ‘여호와께’부르짖고 간구했습니다. 9절에서는 3번의 수사 의문문을 사용해서 자신을 죽음과 같은 고통에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생명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는 자신의 무익함을 고백하면서 자기가 죽으면 더 이상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고 하나님을 전할 수 없게 된다고 하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10절에서는 더 강하게 간청하면서 ‘긍휼’과 ‘도우심’으로 응답하시기를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는 시인처럼 부르짖어 간구하며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역경 중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찬양과 감사에 대한 다짐(11-12절)


5절에서 언급한 회복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는지가 11절에 자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의 병을 고치시고 죄를 사하셨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셨고, 슬픔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를 띠우셨습니다. 5절과 같이 대조되는 단어들이 쌍을 이루어 나타나면서 다윗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회복이 얼마나 극적인 것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시인은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잠잠할 수 없어 자신에게 주신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리라고 다짐합니다. 자신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날마다 전하며 그의 증인이 되겠다고 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선물 받는 사람은 감격 속에 잠잠히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슬픔을 제거하실 뿐 아니라 춤을 추게 하십니다. 죽음에서 생명을 선물 받은 사람에게 그 삶은 바로 잔치가 됩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동사가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어 지속적인 찬양의 약속을 강조합니다. 은혜는 찬양과 감사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찬양과 감사는 끝없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감사의 이유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기 원하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바른 감사 생활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바른 감사생활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또한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를 구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죄의 종 되었던 상태에서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 감사드릴 것을 권고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모든 은혜 가운데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은혜만큼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 할지라도 죄와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지 못한다면 불행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언제나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불확실하고,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십니다. 사람은 변하고 친구는 혹시 우리 곁을 떠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출 때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의 방법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 전체가 향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것이 귀한 향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기도를 거룩하게 보시고 우리의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전심으로 부르는 찬양,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 행하는 금식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을 귀하게 보시고 교회와 이웃을 위하여 섬기는 봉사를 귀한 향으로 받으십니다. 오직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결한 자세로 하나님께 자기의 중심을 드리듯이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고 갚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위로가 아름다운 향을 올려드리는 성도들에게 임합니다. 우리가 피워드린 향기 나는 삶을 가지고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됩니다.  


 


감사의 시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저녁과 아침으로 향을 사르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있음을 인정했고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감사생활도 지속되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속적인 감사의 삶이 우리의 의지만 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0-21). ‘감사한다’, ‘복종한다’는 문법적으로 분사입니다. 본동사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입니다. 결국은 성령 충만한 성도가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를 지속적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언제나 감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감사자가 되려면 


-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시인이 주의 성소에서 주의 백성과 함께 드리는 찬양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응답을 받으면 문제가 해결될 뿐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병을 고치시고 그를 원수들로부터 보호하시고,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분임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하나님께 간구할 때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할 뿐 아니라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 6:3).


-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형통의 때에 겸손하고 고통의 때에 회개함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시인은 형통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선 줄로 생각할 때에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혹이라도 교만으로 인해 고통의 때가 올 때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용서받고 회복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고난은 성도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의 노여움은 잠깐이요, 은총은 평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잘못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불순종과 교만에서 돌이키기만 하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주의 은총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어떤 순간에도 교만해서는 안 되고 어떤 자리에서도 미끄러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죄에서 돌이키고 회개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은총을 삶 속에서 경험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나가면서 


오늘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지금부터 401년 전인 1620년 12월 11일 영국에 있던 청교도들이 Mayflower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Plymouth에 도착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왔지만 그들에게 혹독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첫 겨울을 지나면서 함께 온 102명 중 거의 절반이나 되는 46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얼어붙은 땅을 깨면서 사랑하는 자들을 땅에 묻을 때 그 슬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들은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농사를 지었고 가을이 되었을 때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도와준 인디언들을 초대해 그해에 거두어들인 옥수수, 콩 등의 농산물과 들에서 뛰어다니던 칠면조를 잡아 나누어 먹으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입니다. 청교도들은 낯선 땅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떨면서도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환경을 초월한 성숙한 감사의 모습입니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법궤 운반 행렬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자 다윗은 법궤 앞에서 힘을 다해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아내 미갈은 왕으로서의 체통을 지키지 못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이에 다윗은 자신을 선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신 그 은혜와 섭리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기에 얼마든지 여호와 앞에서 뛰놀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표현과 작은 몸짓조차 체면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보다 크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미갈에게는 인간 왕 다윗의 체통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이 아무리 낮아져도 부끄럽지 않다는 다윗의 고백을 우리는 되새겨야 합니다. 교우들 중에 김명신 권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백세까지 사셨습니다. 그야말로 구구팔팔이삼사의 삶을 사셨습니다. 백세까지 건강하게 사시다가 잠깐 아프신 후 주님 품에 평안히 안기셨습니다. 그분은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셨습니다. 언제나 감사하셨습니다. 언제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춤을 출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잔치 때 찬송가를 부르면 그분은 일어나 팔을 올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추셨습니다. 기쁨이 충만하여 춤을 추시던 권사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도저히 감사를 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청교도들처럼 추수감사주일에 다시 한 번 감사생활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감사를 드려야 할 구체적인 이유들을 우리의 삶에서 찾아보고 우리의 입술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인생의 가장 어려운 고비를 지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면서 감사의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한 해 동안 수고한 가족이나 교우들, 이웃들에게 감사를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감사하는 마음이 항상 지속되기를 구해야 합니다. 감사의 씨를 뿌리는 자들이 더 많은 감사의 열매를 거두기 때문입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그 은혜 감사하여 주님과 함께 춤을 추시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