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11-07 16:01
Views
331

자기가 가진 동산이나 부동산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이름으로 되어 있으니 내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쯤은 얼마든지 뒤로 미루어도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주인은 자기 것에 대하여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우리에게 소유권을 주장하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면 아무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내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것입니까? 만약 하나님의 것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맡아 관리할 책임이 있는 청지기입니다. 순종과 헌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것을 잘 관리함으로 이왕이면 선한 청지기가 되어 훗날 결산하시는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으려는 사람들(13-14절)


예수님은 포도원의 비유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암시하셨습니다. 12절에 보면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버려두고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순순히 물러 간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사십일을 주리신 예수님에게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시험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누가복음 4:13을 보면,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동안 떠나니라.”이것이 마귀의 전략입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에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방심하다가 공격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정화 사건을 인하여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간의 갈등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물어 보았다가 예수님의 역질문에 밀려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고 물러섰던 지라 종교지도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까 궁리했습니다. 그러다가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람들을 보내어 유대인들에게 민감한 세금문제를 질문함으로써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계략을 꾸몄습니다. 바리새인은 누구입니까? 유대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파로 성문과 구전으로 된 율법의 가르침을 엄격하게 지켰고, 내세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약 6000명가량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헤롯당은 헤롯 또는 헤롯 왕조의 추종자들로서 로모 정부와 결탁한지라 바리새인들과는 도저히 어울릴 수 있는 부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손을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마가복음 3:6에 보면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이번에도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공동 목표를 가지고 손을 잡습니다.


 


‘책잡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신약에서 오직 여기에만 사용되는 단어인데‘덫을 놓아 잡다’라는 뜻입니다.  사냥꾼이 사냥감을 덫으로 잡아 꼼짝달싹 못하도록 만들 듯이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예수님의 말을 트집 잡아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의도를 숨기고자 화려한 칭찬으로 말을 시작합니다. 그들의 배후에는 예수님을 죽여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려는 사탄의 술책이 있습니다. 사탄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합니다(고후 11:14). ‘선생님,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십니다.’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다’를 직역하면 ‘사람에게 매어 있지 않다’입니다. 아주 진실한 분이시기에 사람들의 인기나 평가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선생님은 사람의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도를 참되게 가르친다고 합니다. 특히 예수님을 ‘하나님의 도’즉 진리를 말하는 율법의 참된 교사라고 부추김으로써 은근히 세금 내는 것에 반대를 하라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비록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사람들이 예수님을 칭찬한 것은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지만, 그 내용 자체는 옳습니다. 마가는 아이러니 기법을 사용해 예수님을 죽이려는 종교지도자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의 정체, 즉 그분이 하나님의 권위를 받은 대리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드디어 그들이 묻고 싶은 질문을 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예수님이 yes 또는 no 어느 쪽으로 대답해도 함정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질문을 만들어놓고 종교지도자들은 회심의 미소를 띠었을 것입니다. 로마 통치하에서의 조세는 이스라엘이 처한 정치, 사회, 종교적 상황 속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느끼고 있던 딜레마였고 동시에 미묘한 문제였습니다. 실제로 주후 6년 갈릴리인 유다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도 로마의 과세 때문이었습니다. ‘옳으니이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관점에서 이방 황제에게 충성을 표시하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입니다. 만일 세금을 바치는 것을 옳다고 하면 로마의 탄압 아래서 고통당하는 대중들에게 반발을 살 것입니다. 만일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의 법에 저촉되어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을 인정하시는 예수님(15-16절)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라고 한 것은 마치 그들이 예수님의 결정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려는 술책입니다.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불꽃같은 눈으로 그들의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외식과 시험하는 의도를 아시고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책망하십니다. ‘외식함’은 원래 배우의 연기를 가리키는 말이나, 비유적으로 ‘위선’이란 뜻이 되었습니다. “아시고”는 완료형으로 예수님이 그들의 속셈을 이미 간파하고 계심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가지고 오라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대응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의 질문에 대해 오히려 주도적으로 논쟁을 이끌고 가고 계심을 보여 주며, 독자로 하여금 예수님이 그 동전을 가지고 무엇을 하실지 궁금증을 갖게 합니다. 데나리온은 은으로 되어 있었고,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가치를 가졌습니다. “이 형상과 이 글”은 로마의 동전에 새겨진 황제의 초상과 글을 말합니다. 당시에는 Tiberius가 황제로 있었기에 주화 앞면에는 티베리우스의 화상과 함께 ‘신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티베리우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라는 라틴어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뒷면에는 황제의 어머니인 리비아가 올림피아의 홀을 쥐고 왼손에는 감람나무 가지를 들고 신들의 보좌에 앉아 하늘의 평화를 주는 인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 주화는 로마 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로마황제를 신으로 섬길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들에게 로마의 경제적 수탈과 정치적 압제와 종교적 우상숭배를 의미하기에 유대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주화에 있는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어 그들로부터 ‘가이사의 것’이라는 대답을 받아 내셨습니다. 이것은 17절에서 ‘가이사의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기 위한 의도적 행동입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나누시는 예수님(17절)


14절에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세금을 바치는 것이’라고 묻는데, 17절에서 예수님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대답하십니다. 얼핏 보면 같은 단어가 사용된 것 같은데 헬라어 본문에는 다른 단어가 사용됩니다. 14절에서 사용된 동사가 단순히 ‘주다’(14절)라는 의미인데 반해, 17절에서 사용된 단어는 ‘돌려주다’혹은 ‘빚을 갚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가이사의 형상과 글이 새겨진 주화가 가이사의 것이므로 가이사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로마 정부에 대한 납세를 인정한 셈이 됩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에서‘그리고’로 번역된 헬라어 ‘kai’는 ‘그러나’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문맥으로 볼 때 ‘그리고’보다는 ‘그러나’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이 구절은 정치와 같은 세속적인 영역은 가이사에게 돌리고, 교회는 영적인 일에만 집중하라면서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22:25-26에 의하면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하시면서 예수님은 타락한 지배세력에 대한 비판을 망설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치적 권위를 부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통치 하에서도 하나님이 섭리하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지만, 성도들은 세상의 어떤 통치자보다 더 충성해야 할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이 조세 논쟁을 통하여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시는 유일한 주이심을 보여줍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유대인으로 사는 것과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하는 이방인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기 때문에 양립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세금 납부가 황제가 요구했던 신격화에 복종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가이사에겐 세금을 거둬들일 권리는 있었지만 그들의 영혼을 소유할 권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 제국에 살면서 유대인들은 로마에의 복종과 하나님께 대한 책임이라는 이중적인 현실에 직면했습니다. 형상(icon)이라는 말은 창 1:26-27에 나오는 형상(image)과 같은 말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들이며,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진 존재이며,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존재들입니다. 주화에 새겨진 가이사 그리고 그 주화를 보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 모두 전권을 가진 엄위하신 심판주 하나님 앞에 세워 놓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속한 부분이 있음을 깨달아, 하나님의 것을 회복해야겠고 또 그것을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듣는 사람들을 매우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신 하나님 앞에 선 듯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과연 하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은 제대로 분별하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제대로 돌릴 줄 알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가 됩니다. 현재 우리가 예배드리고 있는 이 본당은 원래 warehouse 였습니다. 교회가 conditional use permit을 얻을 때 샌마르코스 시정부에서 실시하는 공청회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시정부는 교회도 사회기관의 하나로 생각합니다. 자기 커뮤니티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하는 관점에서 봅니다. 교회도 사회에 대하여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것은 만물에 대한 무한하고도 영속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합니다. 가이사의 것은 하나님의 것 안에서 이해되어야 할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것’에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사회나 국가에 대한 의무를 감당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의무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자세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섬기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음과 동시에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소유권을 하나님께 넘겨드린다는 분명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현재 사용하고 누리고 있지만 나의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삶의 주인인양 행세하게 됩니다. 청지기가 무엇입니까? 주인의 것을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곳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관리하다가 하나님이 쓰시겠다 할 때 언제든지 내어드릴 자세를 갖춘 사람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청지기가 됩니다. 세 가지 분야만 살펴봅니다. 


 


- 물질의 청지기


성도들은 주인이 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물질을 바르게 관리해야 합니다. 물질의 청지기 직분을 잘 감당하는 표시가 바른 헌금 생활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십일조 할 때 세금 떼기 전의 십일조인가 아니면 세금 떼고 난 후의 십일조인가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물어보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십일조 내기가 아깝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삶의 기준인 율법에는 십일조를 드릴 것을 명합니다. 율법은 은혜의 복음이 오기까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최소한의 법으로 주신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의 하한선이지 꼭 그것만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 외에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이 있습니다. 요즈음으로 따진다면 감사헌금, 선교헌금, 건축헌금 등등. 신약성경에도 예수님이 십일조를 내라는 말이 있습니까?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 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눅 11:42). 율법에 규정된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실천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신약시대 기준은 구약시대의 기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하나님이 쓰시겠다하니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드렸습니다.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31). 은혜시대를 사는 물질의 청지기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물질을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수입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니 나머지 아홉은 내 마음대로 쓰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가진 물질 전부 하나님의 것인데 잠시 내게 관리하라고 맡겨 주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필요하실 때,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가진 물질을 언제든지 돌려드릴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물질의 청지기가 됩니다.


  


- 시간의 청지기


구약 시대 물질을 드리는 기준은 십일조입니다. 물질의 1/10은 하나님께. 시간를 드리는 기준은 안식일입니다. 시간의 1/7은 하나님께.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주일에 엿새 동안 못하고 밀린 일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엿새 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주일은 자기를 위해 쉬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일의 주인이신 주님이 주일에 밀려납니다. 또한 주일은 주님의 날이라 하여 거룩하게 지키고 나머지 엿새는 내것이니 내 마음대로 쓰겠다는 생각을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가진 시간도 사실은 전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의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를 사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어진 시간을 쓰지만 주께서 쓰겠다고 하실 때 내어 드릴 자세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Sunday Christian이 아니라 everyday Christian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시민으로 살려면 지금부터 천국시민으로 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즉 종말론적인 시간관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은 나의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오라고 하시면 가야합니다. 오늘이라도 주님이 오실 수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지금은 영원과 이어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산다면 지금 내 생명이 끝나도 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습니다. 따라서 주어진 시간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데에 거룩하게 사용할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시간의 청지기가 됩니다.


 


- 말의 청지기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니라”(잠 25:11).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말하는 기술보다 더 귀한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잘 들어줄 수 있는 기술입니다. 순수하지 못한 동기로 말하거나, 다른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하여 거짓말하지는 않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뼈 있는 말, 가시 돋친 말, 남을 무시하는 말, 시비를 거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짓을 버리고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엡 4:25). 그리고 악한 일에 휩쓸리지 않도록 주님의 인도함을 구해야 합니다. 누구를 해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든든히 서야 합니다. 요즘 새벽기도 시간에 욥기를 다룹니다. 욥은 자신을 위로하려고 방문한 친구들로부터 위로는커녕 오히려 아픔을 더 크게  겪었습니다. 엘리바스는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욥 5:8)고 말했습니다. 만약 엘리바스가 욥과 같은 상황을 실제로 맞이했다면 과연 자신이 말한 대로 쉽게 행동했을까요? 특별한 이유 없이 하루아침에 자녀와 소유를 모두 잃고 몸에 병까지 들어 고통 중에 있다면 순순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갔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일체의 질문도 없이 그저 하나님의 선한 뜻만을 구하며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을까요? 고난 중에 있는 사람에겐 위로자가 필요합니다. 위로자는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태도와 내용으로 말을 해야 합니다. 설령 그가 잘못을 범해 고난의 상황을 맞게 되었더라도 일방적인 훈계나 책망은 공감을 얻지 못합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자신의 말을 절제하고,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칭찬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섬길 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의 청지기가 됩니다.


 


나가면서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는 비록 분리되어 있지만 모두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나라의 평안을 통해 교회를 보호하십니다. 하늘의 시민권자인 그리스도인은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세상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2:42에 의하면,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라고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주님의 마음에 합한 청지기를 찾으십니다. 열매를 요구하시는 주님을 믿으며 종말론적인 신앙관을 가진 물질의 청지기, 시간의 청지기, 말의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것을 믿음으로 잘 관리하며, 주님께서 원하실 때 언제든지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순종과 헌신의 삶을 통하여 이 귀한 은혜에 동참하시고 나누시고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