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버린 돌이 머릿돌로

Author
Myung Myung
Date
2021-10-31 16:30
Views
313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세월이 살같이 흘러 2021년도 이제 두 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교회적으로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할 때입니다. 신년도 표어를 만들고, 목장 편성, 제직부서 편성을 준비하고 어떤 행사를 할지 구상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금년에 잘 된 것들은 더 잘 될 수 있도록 개선하고 미흡한 것들은 보완하면서 새해에는 좀 더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지난 10개월 동안 각자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만족스럽습니까 아니면 아쉽습니까? 팬데믹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까?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이 맡겨 주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이 맡기신 것을 자기 것인 양 제멋대로 사용하거나 낭비하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는 악하고 게으른 청지기가 아니라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각자의 삶에 적용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뜻대로 살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권위에 도전하는 종교지도자들(11:27-33) 


마가복음 11장부터 16장까지는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한 주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적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성전에서 삼일을 보내시면서 불신과 외식으로 가득한 형식적 성전예배와 그 책임을 맡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을 보셨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시고 비유를 통해 가르치심으로 당신이 말세에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요 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아임을 드러내셨습니다. 마가복음 2장을 보면 친구들이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5) 하시면서 예수님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보이셨습니다. 전에는 짐승을 바쳐 제사를 드림으로 죄 사함 받았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직접 희생제물이 되셔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시대가 끝이 났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공동체가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전에 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신 예수님의 존재가 종교지도자들에게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본거지인 성전에 들어와 그런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다시 들어오셨을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와서 따졌습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에서 ‘이런 일’이란 성전을 정화하신 일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전에 예수님이 사탄의 힘을 빌려 이적을 행한다고 비방했는가 하면, 하늘로부터 오는 이적을 계속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성전과 관련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행한 행동을 자기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말씀과 사역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하게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눈이 어두운 종교지도자들은 구속 드라마에서 예수님의 대적자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시고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느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왔느냐 역으로 질문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무엇을 했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나님께 돌아서서 죄 사함 받을 것을 촉구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하신 행위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말씀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질문을 받은 종교지도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답변할 것인지 궁리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에게서 왔다면 왜 요한을 믿지 아니하였느냐고 하면서 백성들로부터 책망을 받을 것이요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백성들이 요한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여기니까 자칫하면 백성들에게 돌로 맞을 것 같으니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두려워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백성이었고, 그들이 붙잡고 싶은 것은 진리가 아니라 기득권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답해야 할 때 대답하지 못했고 인정해야 할 때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 (12:1-9)


“무슨 권위로 이런 일들을 하느냐”(11:28)는 종교지도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11:33)라고 하시면서, 대신 한 가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는 ‘포도원의 노래’로 알려진 이사야 5:1-7절과 유사합니다. 그런데 실패의 이유는 다릅니다. 이사야에서는 포도나무의 잘못 때문이고, 마가복음에서는 농부의 잘못 때문입니다. ‘포도원의 노래’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를 저버리고 좋은 포도 대신 들포도를 맺은 유다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언급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포도원을 맡은 농부들, 즉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일구어서, 울타리를 치고, 포도즙을 짜는 구덩이를 파고,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때가 되어서, 주인은 농부들에게서 포도원 소출의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개역성경에는 ‘농부들’이 한 번 기록되어 있는데, 헬라어 본문에는 강조를 위해 두 번 등장합니다. ‘농부들에게 보내서 농부들로부터 받으려고.’서로 반대되는 뜻의 두 전치사가 ‘농부들’과 함께 쓰이면서 명확한 대비 구조를 형성하고 이로 인해 ‘농부들’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이는 주인이 농부들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주인에게 소출 보내기를 거부합니다. 주인은 계속하여 종들을 보내지만 농부들의 횡포는 점점 더 심해집니다. 처음에는 빈손으로 돌려보내다가 나중에는 때리고 능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특히 4절에 “머리에 상처를 내고”라는 표현은 목 베어 죽임을 당한 세례자 요한의 마지막을 생각나게 합니다(6:28). 


 


이 비유에서 ‘보낸다’는 동사가 다섯 번 등장합니다. 이러한 반복은 주인과 농부들 사이의 대립 관계를 극대화합니다. “최후로 이를 보내며”‘최후로’로 번역된 단어는 ‘이’를 수식하는 형용사입니다. 직역하면 ‘최후인 그를’‘마지막인 그를’이라는 의미입니다. ‘최후’로 번역된 헬라어는 종말을 의미하는 단어이므로 예수님의 오심이 말세를 뜻합니다. 주인의 아들을 “사랑하는 아들”로 표현했는데, 이 표현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1:11), 산에서 변화하실 때(9:7)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스스로 말씀하신 것은 비록, 비유에서이기는 하지만, 여기가 처음입니다. 농부들은 상속자가 죽으면 자신들이 포도원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아버지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농부들이 종들을 죽였던 것처럼 아들도 죽였다는 것으로 농부들의 악함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을 보냈을 때 농부들이 그를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어떠한 고난과 죽음을 당할 것인지 예고합니다. 농부들은 자신의 신분과 주인에 대한 의무도 잊고 심지어 주인의 것을 자기의 것인 양 착각하며 주인의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그런데 칼자루는 그들이 아니라 주인이 쥐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물과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도록 사탄은 아담 이후로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계속해서 유혹했습니다. 


 


“주인이 ...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이 비유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잘못 행한 종들을 진멸하는 것으로 이 비유가 끝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포도원을 양도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이란 악한 농부와는 달리 주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주인의 것을 주인에게 바칠 사람입니다. 마태는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마 21:41)이라고 합니다. 악한 포도원 농부가 성전 체제의 대표자들인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키고, 다른 사람들은 성전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11:22-25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기도와 용서를 토대로 한 새로운 공동체의 규범으로 규정했다면, 여기서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려는 것을 새로운 공동체의 규범으로 정의합니다. 즉, 교회는 믿음, 기도, 용서와 헌신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건축자의 비유 (12:10-12)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던 지도자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행하신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라는 간접적인 시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시편 118:22 이하의 인용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새로운 성전을 지으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배척당해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높임을 받으신 사건과 관련해 초대 교회가 자주 사용한 구절입니다(행 4:11; 벧전 2:7). “우리 눈에 놀랍도다”는 사람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 혹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버림받음과 죽음을 통해 상상할 수 없는 놀랍고 기이한 일을 하십니다. ‘건축자들’이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인 악한 포도원 농부들처럼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려는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또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주로 말미암아’모퉁이의 머릿돌이 됐다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성전이 지어질 것을 가리킵니다. 교회는 산 돌이신 주님의 구속을 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새 성전입니다. 신약교회는 유대인의 남은 자들과 믿음으로 응답한 이방인들로 이루어집니다. 


 


12절은 3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순에 따라 직역하면 ‘그들이 그를 잡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은 무리를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두고 갔다’입니다. 예수님의 날 선 비판과 강한 꾸짖음으로 인해 무리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인 무리가 종교지도자들을 불신하고 분노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잡지 못하고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자신들을 가리켜 한 것임을 알았지만 그 뿐입니다. 그들은 뉘우치기는커녕, 예수님을 향한 증오심이 더욱 타올랐습니다. 마음이 완악한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노합니다. 불신자의 마음에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악한 자존심을 더욱 자극할 수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복음을 거부하게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의식하고 두려워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믿지 않는 자들에게 무서운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릅니다. 본문은 종교지도자들의 적의와 거절로 마무리 짓습니다. “예수를 버려두고 가니라.”예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한 절호의 기회에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낸 아들로 영접하지 못하였기에 영생의 문턱에서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 열매를 원하시는 분


주인이 포도원을 조성하고 세를 준 농부들에게 소출을 요구하듯이, 하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의로운 열매를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학과 불공평의 열매만 맺었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이나 성전 정화사건도 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농사를 지어 소출이 많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어디다 둘까?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겠다. 내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을 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그때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우리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소유권을 잘못 이해합니다.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 물질, 건강, 달란트를 맡겨 놓으셨는데 그것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거나, 원하시는 분량만큼 열매를 거두지 않을 때 하나님은 소유권을 주장하시면서 그것들을 거두어 가시든지 다른 사람에게 넘겨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나의 포도원’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열매를 얼마나 드렸는지에 따라 주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던진 것과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 오래 참으시는 분


한 종을 보내니 (2절),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4절), 또 다른 종을 보내니 (5절) 또 그 외 많은 종들 (5절)을 보냈고 나중에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의 악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들을 징계하지 않으시고 계속 종들을 보내 그들이 행할 바를 자발적으로 하도록 기회를 제공하시면서 오래 참았습니다. 포도원의 상황 묘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반영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언약은 일방적으로 맺는 것이 아니라 양방이 합의를 해야 합니다.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창 17:9) 하시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이행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출 2:24).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들을 계속 보내셨습니다.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회개하기는커녕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약을 파기한 대가를 치를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겔 16:59). 벧후 3:8-9에 의하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거부하면 결국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끈질긴 사랑으로 죄악 된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 심판하시는 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시험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시험하다가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은 앗수르에게, 남쪽의 유다 왕국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나라 없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비유에도 보니 수많은 종들을 보내며 농부들이 듣지 않자,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며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회개는커녕 그마저 죽였을 때 포도원 주인은 그 농부들을 심판하시고 그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어도 하나님께 여전히 불신앙과 불순종의 모습을 보이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심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유대인들은 정죄되고, 이방인들이 구원받게 된다는 비유의 내용이 역사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인내하시는 분이지만 죄를 용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종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믿는 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 상황을 반전시키시는 분


현재의 나의 형편이나 처지에 낙심합니까? 나이 많다고, 건강이 안 좋다고, 가진 것이 없다고 해도 주님께 쓰임 받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평가에 지나치게 민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영생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은 나를 몰라주어도 주님이 알아주면 된다는 담대함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은혜를 베푸시면 우리는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주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야구에는 9회말 투아웃부터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 여정에도 주님을 인해 역전승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서는 쓸모없는 돌로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역사 속에 중요한 머릿돌이 될 수 있다는 믿음과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종교지도자들같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거침돌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삶의 주춧돌이요, 머릿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것을 감사하며 할 일이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기 싫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EM에서는 금요일과 토요일 San Telmo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을 두고 가버린, 심판받을 자가 되지 않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거침돌이 되지 않도록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은 그릇된 권위주의에 빠져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 삼는 종교지도자들을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비유의 핵심은 이 땅의 청지기들이 자신이 맡은 하나님 나라를 사유화하려 할 때 하나님이 직접 심판의 칼을 드신다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하나님은 포도원을 만들고 그것을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멀리 떠난 주인으로 묘사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인생이라는 포도원과 그 안에 온갖 은혜로운 선물을 주셨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원이라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생들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할 소출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는 삶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과 순종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나님은 지금도 사람들을 당신께로 초청하십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계속하여 부르십니다. 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구원과 은혜의 선물이 주어집니다. 그와 함께 기억할 것은 우리에게 맡기신 시간과 달란트와 기회 등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허비하거나 자신만을 위하여 쓰지 않고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며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자기가 법이 되어 불법을 행하고 자신은 천년만년 살 것같이 인생을 낭비하다가는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하실지 늘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는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그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는 선한 청지기가 되어 주님을 기쁘시게 할뿐더러 내가 만난 주님을 삶 속에서 보여주는 복된 성도, 주님 앞에 섰을 때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