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율법에서 믿음으로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2-27 16:41
Views
260


예상했던 대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온 국민이 저항한다고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러시아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지정학적인 영향으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강대국에 의해 계속해서 시달려 왔습니다. 국력이 약하면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눌려 지낼 수밖에 없는 것이 약소국의 설움입니다. 지금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간섭 아래 우크라이나 사태가 빨리 종식되어 더 이상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지 않고 주권국가로서 안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팬데믹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이 좋은 것보다는 안 좋은 것이 많기에 우리의 마음이 착잡해집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는데 그 말씀대로 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은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셔야만 참된 평안이 있고 하나님이 주셔야만 참된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측할 수 없이,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고난을 ‘믿음의 시련’(약 1:2)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시련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강하게 하고 인내를 갖게 하고 성숙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고난이나 아픔조차도 사용하셔서 우리의 인생이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은 믿음만 가지고는 구원을 얻기에 부족하고 율법이 더해져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마치 율법이 믿음을 대체하는 것처럼 주장하였기에 바울은 3장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원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열린 새로운 시대에는 율법의 기능이 끝나게 되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가 됩니다. 험난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과 동행하며 믿음으로 헤쳐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율법의 역할과 한계(19-22절)


바울은 약속에 대해 말하다가 왜 율법이 약속 이후에 더해졌는지를 설명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법이기에 거룩하며 선하지만 구원의 방도로 주신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해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율법이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합니다. ‘범법하다’는 ‘발걸음을 잘못 내딛다, 법을 어기다’는 뜻을 가지며 선을 넘어가거나 옆으로 빠져 제멋대로 가는 잘못된 발걸음을 묘사합니다. 디모데전서 2:14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것을 언급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율법은 죄를 범하고도 그것이 죄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고 신령한 계명들을 통해 그 행동이 죄였음을 깨닫게 합니다. 둘째, 율법은‘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자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천사들을 통해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것을 뜻합니다.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고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강림하시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였고 사람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을 때에 아브라함은 혼자 있었고 모세 때와 달리 특별한 현상도 없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약속과는 달리, 중보자의 손으로 제정하신 것입니다. 셋째,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죄로 규정하는 수단일 뿐 죄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닙니다. 율법은 한시적인 것으로서 약속하신 자손이 올 때까지만 필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20절). 율법은 천사를 통해 모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주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짐승을 쪼개놓고 언약을 맺을 때 원래는 언약의 당사자들이 쪼갠 짐승 사이를 지나가야 하는데 아브라함은 지나가지 않고 하나님만 지나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을 세우셨고 약속을 받는 대상인 사람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해야 할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율법에는 중보가 있는데 어느 한 편이 지키지 않을 때 그것은 무효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양편을 위해 일하는 중보자는 한 분이신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언급하는 이유는 아브라함 언약의 우월성과 율법의 열등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은 과연 약속과 상충해 마찰을 일으킵니까?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합니다. 왜냐하면 약속과 율법 모두 하나님께 기원을 두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율법과 약속을 대립적 관계가 아닌 생명으로 이끄는 인도적 관계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율법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죄 없다고 핑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롬 3:19).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둔 것은 그들을 정죄하고 심판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율법은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을 합니다.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해주는 방법이 제시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사람들의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율법의 가둠에서 자유함을 얻는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율법(23-25절)


바울은 믿기 전에 죄인이던 우리의 상태를 율법과의 관계 안에서 다시 말합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혀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에’라는 표현과 ‘~때까지’라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들은 모두 특정한 시점을 기준으로 그 전과 후를 대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19절의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에서 ‘~까지’와 25절의 “믿음이 온 후로는”에서 ‘~후로는’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표현은 특정한 시점까지만 율법이 유효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오직 믿음으로만 성취됩니다.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믿음’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 믿음’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의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롬 10:4). ‘매다’로 번역된 동사는 ‘보호하다, 지키다’라는 뜻으로 파수꾼을 세워 지키고 보호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율법은 넘어가서는 안 될 선을 제시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율법의 긍정적 역할입니다. ‘매다’에 이어 바울은 ‘가두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선포하시기 전까지 사람들은 율법 아래 갇혀서 엄격한 규율과 여러 가지 계명들을 지켜야 했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했고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죄인으로 정죄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초등교사’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파이다고고스’를 번역한 것인데, 원래 헬라와 로마 시대에 유력한 가문의 아이를 돌보고 인도하는 노예를 뜻합니다. ‘초등 교사’라고 할 때 가르침의 의미가 강한데, 당시에 ‘파이다고고스’는 보호와 훈육에 더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아이를 학교나 체육관으로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일을 했지만 결코 그 아이에게 교과목을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를 성취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심으로 더 이상 ‘초등 교사’인 율법은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일에는 율법이 효력이 없지만, 우리의 행동 지침에는 유익하고 필요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켰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지만 윤리적인 측면에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의 감독적 기능과 노예로서의 열등한 지위와 아울러 구원사에 있어서 한시적인 기능을 강조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고 구원에 이르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율법으로 이를 수 없는 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는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율법의 행위를 좇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믿음 안에 있는 성도(26-29절)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율법의 종의 위치가 아닌 아들의 위치를 가진 자가 되었다는 것이며 유업을 이을 수 있는 약속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종에게는 유업이 없지만 아들에게는 유업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믿는 이들이 유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까지 사람들은 죄의 종노릇 하고 살았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종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그리스도 예수’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죄인이었던 우리의 신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가능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


할례 자체가 언약 백성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그 믿음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요 할례는 언약 백성의 외적인 표시일 뿐입니다. 유대인들이 할례를 구원의 증표로 이해한 것은 할례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신 것은 그들을 통하여 구원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할례보다 중요한 것이 약속입니다. 그 약속의 표로 할례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 10:16).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는 것은 죄에서 자신을 분리시켜 마음의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하고 거룩한 자세를 취하라는 의미입니다. 즉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그분의 말씀에 불순종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란 표시로 할례를 받았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하는데 ‘합하여’는 ‘안으로’의 의미가 있습니다. 믿는 자들이 세례를 받을 때 아담 안에서 나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을 바울은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할례'란 문자적 의미로 '짧게 잘라 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더럽고 추악한 부분들을 다 잘라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전에 죄악에 살던 자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아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고 선언합니다. 바울은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주의 사역을 감당하다가 매에 맺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우리들은 어떠한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습니까? 바울과 같이 마음에 할례를 받고 그 표를 늘 기억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로마 시대는 인종, 계층, 성에 따라 사람을 달리 대우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 안에서 이런 구분이  사라졌다고 선언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오직 믿음만 요구되기 때문에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 민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던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은혜에 동참하게 된 것도 오직 ‘믿음에 의해’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인종, 계층, 성의 차별이 없습니다. 교회 밖에서 주인과 노예로 살지만, 교회에서는 주인과 노예가 ‘한 형제’가 됩니다. 세상에서 남편과 아내는 주종 관계를 이루지만, 교회에서는 남편과 아내는 동등한 인격을 가진 존재로 서로를 대합니다.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종 차별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구원받은 성도 한 사람을 묶는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를 하나로 묶는 우주적인 연합을 의미합니다.  


- 유업을 이을 자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유업을 이을 자는 아브라함의 몸에서 난 아브라함의 씨였습니다. 그 씨가 곧 유업을 얻을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씨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가 됩니다.


 


* 우리의 자세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가 되고 유업을 잇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하고 선합니다. 그 율법이 사람에게 주어진 목적은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 기준으로 볼 때 죄인지 죄가 아닌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류의 죗값을 대신 짊어지게 하시고, 그분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폐기된 것은 아니라 주를 영접한 자들에겐 여전히 선한 통치와 계시의 수단이 되고, 주를 거부하는 자들에겐 정죄와 심판의 수단이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구원받은 성도로서 날마다 말씀으로 점검받아야 합니다. 말씀 속에 담긴 주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회복하고, 말씀대로 살게 됩니다. 


 


- 새로운 신분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믿음은 율법이나 자신의 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을 이루며,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영적인 복과 유업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덧입게 됩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된 새로운 신분에 걸맞은 자부심과 영적 품위를 갖추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죄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의의 도구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야 합니다. 의의 병기로 드리는 삶은 우리의 죄악 된 욕망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는 삶입니다. 회개, 기도, 말씀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사는 삶 바로 그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삶이요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지체를 하나님을 위한 의의 도구로 쓰이도록 복종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경건의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민감하게 볼 수 있는 영안을 가져야 합니다. 문제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돌이켜 보면 우리 모두 나름대로 아픔도 있었고 상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었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기쁨을 주고 위로를 주는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치유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나가면서


율법의 기능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죄인인 것을 알게 해줌으로써 유일한 구속자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약속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지, 약속을 대체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만듭니다. 구원이 율법을 지킴으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최고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방법을 신뢰하고 그 은혜를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우리가 받음으로 우리의 삶이 충만하여지기를 원하십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가정과 섬기는 교회와 삶의 현장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면서 인생의 참 소망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능력 있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