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복음의 진리를 따라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1-30 16:42
Views
296

사탄의 역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돌아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 와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그의 메시지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갈라디아를 떠난 지 얼마 후에 거짓 선생들 곧 유대주의자들이 가만히 들어와 온전한 구원을 얻으려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다른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서 전해 받은 복음에서 할례와 율법의 의무를 제거하며 복음을 변질시켰다고 공격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적지 않은 교인들이 영향을 받아 바울을 대적하고 교인들 사이에 사랑의 관계가 깨어지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게 된 바울은 편지를 써서 자신이 전한 복음을 정리하며 그들을 은혜 가운데 굳게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고,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의 진리 위에 굳건히 서지 못하면 ‘다른 복음’이 들어왔을 때 분별하지 못하고 휘말릴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복음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구원 받은 자답게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가 살펴보고 어떻게 하면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 수 있는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벗어난 외식(11-14절)


베드로가 언제 그리고 왜 안디옥에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안디옥과 예루살렘을 수시로 왕래했으며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이방인들과의 식탁 교제를 한 경험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세 번에 걸쳐 부정한 짐승을 잡아먹으라는 환상을 본 후 이방인인 고넬료 가정을 방문했고, 그가 말씀을 전할 때에 그 집안에 있던 이방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며 일제히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예루살렘교회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무할례자와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베드로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이라며 반박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사건 이후 이방인 선교에 대해 더 open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구성된 안디옥 교회를 방문했을 때 자연스럽게 그들과의 식탁 교제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초대 교회의 기둥 같은 사도가 자신들과의 식탁 교제에 참여한 것이 큰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안디옥에 도착했는데 베드로가 그들을 왜 두려워했을까요? 40-50년대 유대 지방에는 열심당의 활동이 활발했고 유대 민족주의가 고조되었으며, 이방인에게 우호적이거나 협력하는 유대인들을 향한 적개심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왕래가 잦았던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이 이방인 신자들과 식탁 교제를 하는 것이 유대주의자들에게 어떻게 비쳐질지 우려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염려한 야고보가 안디옥교회에 사람들을 파송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떠나’와 ‘물러가매’는 문법적으로 계속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미완료형 시제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신자들과 식사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식사 자리에서 떠나 물러갔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 신자들과 점차로 식탁 교제를 나누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위협적인 공회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던(행 4:19) 베드로답지 않은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바나바마저도 이방인과의 식탁 교제를 피했고, 다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도 따라 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됨을 깨뜨리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행위를 복음의 진리에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했으며, 베드로와 대면해 그의 외식과 위선을 책망했습니다. ‘책망하다’는 동사는 ‘유죄 판결을 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만큼 바울이 베드로의 행위를 심각한 범죄로 간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음식법과 정결법을 보면 유대인은 할례를 받지 않았거나 율법을 알지 못하는 부정한 이방인과는 함께 식사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전제가 있어야만 합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탁 교제를 하지 않게 된 것은 ‘나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부정한 이방인과 함께할 수 없는 신분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방인 신자들에게 유대인처럼 살도록 요구하는 행위였습니다. 또한 그런 행위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신앙만 가지고는 안 되고 유대인처럼 살아야 합법적인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진리를 무너뜨리는 위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연륜으로나 교회적인 위치로 볼 때 베드로가 바울보다 신앙의 선배였고 바울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지만 바울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불필요한 오해와 다툼을 피하기 위해 지혜롭게 처신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양보와 타협은 전혀 다릅니다. 복음의 진리는 결코 타협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저지른 행동은 단순히 개인적인 실수가 아니라 복음의 핵심과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바울이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책망한 이유는 이 일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교훈하고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의롭게 되는 길(15-16절)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개념을 처음으로 언급합니다. 그는 자신도 유대인임을 의미하는 말로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라고 하면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합니다. 유대인도 이방인과 다를 바 없이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율법 아래 있으면서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의롭다 함을 받으려 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나 율법을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주신 적이 없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정죄와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의롭다고 선포하는 법적인 선언입니다. 여기서 ‘의롭게 된다’는 말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는 법을 잘 지키고 도덕적으로 선하고 양심대로 살면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런 삶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합니다. ‘율법의 행위’는 할례와 모세 율법 준수와 같은 유대적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17-21절)


죄인인 인간은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이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말씀합니다(롬 3:10).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죄인에게 의인이라는 신분을 줄 뿐 아니라 또한 죄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돌아가게 되면 다시 죄인으로 나타나게 되고 또한 죄를 범하게 됩니다. 유대주의자들은 믿음으로만 살면 방종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를 죄짓게 하는 분이시냐? 그럴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박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참된 구원을 얻는 사람들은 자유 함으로 얻었다고 자기의 삶을 아무렇게나 세상에 내맡기며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 얻은 성도들이 다시 율법에 얽매인 삶을 살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복음을 믿는 자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범법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자기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헐어버린 것은 무엇입니까?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유대교의 가르침입니다. 베드로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저지른 행동도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모든 의식적인 유대교의 율법을 다 허셨고 바울도 그것을 헐었는데, 자기가 헌 것을 다시 세운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범법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심한 이후로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포기하였습니다. 율법을 따라 살면 우리는 다시 죄인이 됩니다. 바울은 그것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나는 ~에 대해 죽었다’는 표현은 ‘나는 더 이상 그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의 숙어적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므로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고 율법과 더 이상 관계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이제는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됩니다.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삶’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며, 새 시대에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산다’는 것은 죽었던 자가 생명이 있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나 음식법이나 안식일 그리고 율법 준수 같은 ‘율법의 행위들’은 더 이상 새 시대의 하나님 백성의 신분과 행위를 주관하는 원리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옛 시대를 지배하던 율법은 새 시대에 그 효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의인’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은 자들은 이제부터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율법의 요구나 할례에 대해 자유함을 강조한 것은 그가 율법에 대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복음 진리를 위해 강하게 섰던 것이나 많은 사람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약 시대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이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혔으므로 우리는 율법에 대해 완전히 죽은 것입니다. 죽으면 더 이상 그 법의 효력이 없어집니다. 죽음으로 율법에서 벗어납니다. ‘못 박혔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완료시제로 되어 있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과거의 행동이 현재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 과거의 ‘나’는 죽고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뜻입니다. 지금 살아있는 ‘나’는 새로 태어난 ‘나’입니다. 새로 태어난 ‘나’는 내가 만든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나’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각, 의도, 결심, 감정,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 것은 다 내려놓을 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함이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실 수 있습니까? 당연히 우리 자신이 먼저 죽어야 합니다. 스스로 주가 되었던 생활을 포기하고 그리스도께 그 자리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그분의 능력을 신뢰한다면 그분은 우리가 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담당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육체 가운데 산다’고 말합니다. 옛 사람인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나’는 이제 육체 가운데 산다는 것입니다. 새로 창조된 ‘나’는 옛 창조인 육체 안에 있지만 육체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셨음을 확신할 때 우리는 이 세상과 육체의 소욕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지혜와 능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 가운데 살지만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삽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은혜는 삯과 대비되는 말입니다. 삯은 일한 대가로 주어지는 반면 은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주어지는 호의요 선물입니다. 만일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 하면 거기에 걸맞는 노력과 행위가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것은 은혜입니다. 지금 우리가 율법의 요구에서 해방된 것도 우리가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지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죄책감과 공로주의에 사로잡혀 다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면 이는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죄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이루셨으므로, 우리는 이제 죄의 책임을 지고 사는 자가 아니라 은혜에 빚진 자로 살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믿는 자의 삶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이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 자들은 죄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더 이상 죄에 종노릇하며 살지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세상으로 향하는 나의 의지와 욕심, 부정적인 생각, 죄 지으면서 살아온 부끄러운 과거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의 것을 내려놓습니다. 이러한 자기 포기의 가장 대표적인 본을 보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 보좌를 떠나 이 땅에 육신을 입으시고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 막는 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은 성령님이 주관하시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을 사는 성도는 마땅히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빛의 자녀들처럼 지혜 있게 살아야 합니다(엡 5:15). 그러려면 지혜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염려가 있습니까? 미움이나 질투가 있습니까? 침체되고 눌리는 것이 있습니까? 두려움이 엄습합니까? 불확실한 세대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은 성령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주님과 교제를 가지면서 우리 자신이 변화되고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 우리의 자세


복음의 진리에 따라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당시 중세 교회는 교회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나 형식과 의식 중심의 신비적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구원이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공로가 연합하여 완성된다는 신인협동의 구원을 주장하였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전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원리를 왜곡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변질된 구원관은 당시 사람들에게 공로사상을 부추겨 여러 가지 미신적인 종교행사와 신비주의가 난무하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노력과 공로가 구원의 수단이었고, 그 결과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개념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중세 교회의 모습은 갈라디아서 2장에 등장하는 바울 당시 유대주의자들의 모습에 이미 나타났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습니까? 복음의 진리 위에 온전히 서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복음을 이해할 때 예수님이 누구신가 알게 되고 예수님이 무엇을 행하셨는지 알게 되고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바울이 언급한 ‘믿음으로 의롭게 됨’, 즉 ‘칭의’는 사람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무죄하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적 행위를 지칭합니다. 이 칭의는 사람의 ‘신분'(status)의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신자들은 자신이 받은 구원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를 해야 하고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는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만 말하지 않고 이제 하나님의 백성답게 ‘믿음으로 살아야 할’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성화는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면서 삶 속에서 우리의 죄 된 본성을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어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행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바울 서신도 언제나 행위와 생활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로마서 12장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11장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구원의 도리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12장부터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하면서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이 산 제물이 될 것을 권면합니다.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거저 구원받은 사람이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고마워서 보답하는 마음으로 자원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훗날 하나님 앞에 설 때 상급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급은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다기보다는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나가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셔서 복음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힌 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포기하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세상으로 향하는 나의 의지와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성도들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임합니다. 성도들을 통해 은혜의 복음이 이 땅위에 힘 있게 전파되며 하나님 나라가 날마다 확장되는 귀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