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원대로(막14: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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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Date
2006-04-11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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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원대로 (마가복음 14:32-42)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면서 기도를 합니다. 이웃이 어려움을 겪을 때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특별한 문제가 있는 교우들을 위하여 교회에서 특별 릴레이 금식기도를 합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라는 것을 모르는 성도는 없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의외로 많은 분들이 제대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평소에 새벽기도 나오지 않는 교우가 새벽에 뒷자리에 와서 앉아 있으면 목사는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저 교우가 무슨 문제가 있어서 나오지 않든 새벽기도를 나왔는가? 설교를 하면서도 나름대로 생각에 잠깁니다.
기도하지 못하는 두 가지 대표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피곤해서/바빠서. 이일저일 쫓아다니고 잠이 부족하다 보니 피곤해서 기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한두 번 피곤할 수 있지만 피곤이 계속해서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너무 벌려 놓은 일이 많아 바쁘기 때문에 기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한두 번 분주할 수 있지만 분주함이 계속해서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계속 피곤하거나 혹은 계속 바빠서 기도를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그 일을 그만두든지 바꾸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
본문에도 보니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38절)
“그들은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이다.” (40절)
1) 바빠서
자기 하고 싶은 것을 다하려고 할 때, 기도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세운 목표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을 낼 때 자연히 기도 시간이 줄게 됩니다.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마르틴 루터는 너무 바쁘기 때문에 자기는 기도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물질은 잃어도 다시 찾을 수 있다. 건강은 잃어도 다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잃어버린 시간은 찾을 수 없습니다. 한번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실상은 시간을 줄이는 방법입니다. 기도하면 분별력이 생깁니다. 집중력이 생깁니다. 따라서 기도는 시간 낭비가 아니라 시간을 버는 비결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2) 피곤해서
새벽기도에 가려고 하다가도 막상 일어나려고 하면 좀더 자자, 좀더 눕자, 오늘만 날이냐 하는 생각에 다시 잠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누가 새벽기도 만들어가지고 하는 불평을 저도 여러 번 하였습니다. 새벽기도를 오래 했지만 아직도 얼람이 없으면 저절로 일어나지 못합니다. 사실 새벽기도를 드리려면 전날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늦은 밤까지 시간을 보냈는데 어떻게 아침에 일찍 일어나겠습니까? 또 어떤 분은 안하던 새벽기도를 하면 골이 띵해진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새벽기도 체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새벽기도 체질로 바뀌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집니다.
기도하면서 두 손을 모르고 눈을 꼭 감고 기도합니다. 때로 주여 소리를 치며 기도하기도 합니다. 자, 기도하면 힘을 쓰게 마련입니다. 기도하면서 그나마 있던 힘까지 쏟는다. 그런데 기도하고 나면 힘이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새벽기도 올 때는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기도하느라 에너지를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가벼워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눅 22: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힘이 들고 피곤할지라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힘을 주신다.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일하는 것마다 성령께서 능력을 주신다. 이래도 기도 안하시겠습니까?
이번 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한주일 동안 특별새벽기도회가 있습니다. 아무리 특별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나는 새벽기도 체질이 아니라면서 여전히 새벽기도에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직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물론 직장 때문에, 아이들 학교 보내는 준비 때문에 새벽기도에 못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작정하고 한번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중에 도저히 시간이 안 되거든 토요일 한번은 나오시기 바랍니다. 새벽기도에 들인 시간이나 에너지 이상의 것을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 기도해야 하는 이유
1)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이 도망할 것과 당신이 부활하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다 도망갈 텐데 그것은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는 구약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요,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성질 급한 베드로가 말합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나는 결단코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펄쩍 뛰며 말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베드로의 말을 으면서 다른 제자들도 그러겠노라고 장담합니다. 말로 떠벌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치고 제대로 입술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없습니다. 베드로의 장담에 자기들도 그러겠노라고 다른 제자들이 동조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열정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조차 없이 그냥 끌려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에 빠집니다. 피곤한 몸을 핑계 삼아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깨어 있는 것'과 '기도하는 것'의 두 가지가 함께 병행할 때 모든 시험은 비켜 갈 것입니다. 깨어 있을 때 기도의 제목을 찾을 수 있으며, 기도할 때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는 통로입니다. 기도는 연약한 자를 강한 자로 변화시킵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지혜와 능력을 얻습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그리고 시험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우리 모두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의지와 바램을 끝까지 실현하지 못합니다. 사실 연약함 때문에 성도는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적 연약함을 기도로 극복하고 영적으로 강건했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였습니다. 부족함과 연약함으로 인해 위축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하고, 그것들로 인하여 더욱 우리는 은혜를 사모하여 더욱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고 그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눅 3:21,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새” 공생애로서 첫 출발을 기도로 시작하셨습니다. 막 1:35, “새벽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하루의 바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영적으로 재충전하는 기회를 가지셨습니다. 눅 6:12-13에 의하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실 때 산으로 가사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같이 남에게 보이려는 외식하는 기도를 드리지 말고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드리지 말고 하면서 기도하는 구체적인 자세까지 알려주시고 이런 식으로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주기도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였을 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막 9:29) 하시면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본문을 보니 때는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밤입니다. 그 밤에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는 곳에 오십니다. 제자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짧은 생애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며 십자가를 지고 갈 담대함을 얻기 원하셨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기도에 대하여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아 기도의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본문을 피상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기도는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가 겪어야 할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는 나약한 발언을 하게 합니다. 종종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하여 꾸짖으시던 선생님의 모습으로서는 민망하기 그지없는 연약함이 나타납니다. 제자들에게 같이 기도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같이 기도에 동참하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하시는데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을 열어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선언하시던 하나님, 변화산 상에서 모세와 엘리야과 함께 계실 때에 오직 예수의 말만 들으라고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아들의 간절한 기도에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지난 3년 동안 예수님은 병자를 낫게 하고 귀신을 쫓고 풍랑의 제압하는 등 놀라운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문제를 놓고 세 번씩이나 동일한 말로 기도했으나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루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응답받지 못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과연 겟세마네 기도는 실패한 기도입니까? 예수께서는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 속에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 고난의 심리적 고뇌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겟세마네에서 하나님의 침묵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로 이어졌습니다. 성공적인 기도는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기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린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5:7)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드린 기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 고통 가운데 드리는 기도
기도가 무엇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길이와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부족하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께 의지하는 수단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님의 심경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땅에 오실 때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는 빌 2:6의 말씀과 같이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기도를 드리는 예수님의 심경이 본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두려워하며, 괴로워하셨다.” (33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34절)
이 시간이 내게서 비껴가게 해 주시옵소서. (35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36절)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는 문장을 직역하면 '내 영혼이 압도되어 죽을 지경이다'라는 의미가 된다.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의 재물로 내어주어야 한다는 점을 알고 계셨으며 (막 10:45),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고 계셨지만 육신의 수난에 대한 두려움도 느끼셨습니다.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어떤 식으로 죽어야 할 것을 아십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야 합니다. 육신의 고통보다도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다는 것이 예수님에게 있어 견디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이 당할 수난을 생각하시니 예수님은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시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저자는 고통 가운데 기도할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어려움이나 고통이 있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고난의 때에 예수님은 방황하거나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을 찾아다니며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고난을 당할지라도 예수님을 본받아 기도해야 합니다.
2) 온힘을 다하여 드리는 기도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이르렀다.” (32절)
예수님이 제자들과 더불어 겟세마네라는 곳에 기도하러 오셨는데 그곳은 감람산 동쪽 기슭의 작은 동산으로 주변에는 올리브 나무가 많이 있었습니다. 겟세마네의 뜻은 Oil-Press, 즉 기름 짜는 틀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땀을 흘리신 고뇌의 기도 현장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예수님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낮은 자세를 취하시고 기도하십니다. 아까 화면에서 보셨듯이 눅 22:44에 의하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기름 짜는 틀에 올리브 열매를 넣고 꽉 짤 때 올리브기름이 나오듯 예수님께서 온몸의 진액이 다 빠질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생의 내용이 다 짜져서 하나님에게 바쳐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자세로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39 절). 예수께서는 똑같은 말씀으로 세 번이나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도는 기도하다가 낙망치 말고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눅 11:9,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하면서 예수님은 끈질기게 매달려서 기도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한두 번 적당히 기도하다가 그만두는 자세로는 응답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간절히 그리고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항상 그리고 즉시로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잘못 구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때로 우리의 인내와 순종을 훈련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시간을 제한하지 말고, 다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기도할 수 있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기도할 시간에 기도하지 않고 잠을 자다가 실족하고 말았습니다.
3) 하나님의 뜻에 우선을 둔 기도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36절)
우리는 기도할 때 온 정성을 다하여 간절하게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내 아버지여”라 부르며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항상 하나님과의 돈독한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것이 기도자의 자세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데도 하나님을 설득하여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것이나 자신의 사정을 하나님에게 통고만 하는 것은 참다운 기도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어기겠다는 것이 아니라 굳이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가 하며 시련에 대한 두려움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잔은 고통과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킵니다. 시11:6,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사 51:17, “여호와의 손에서 그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의 죄 때문에 대신 당하는 고통이요,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관련된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을 피하려는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첫 번째 기도를 마무리 짓습니다. 처음 기도에서는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예수님의 뜻을 비치지만 이번에는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면서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킵니다.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며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재확인합니다. 그러기에 그의 궁극적인 간구는 결국 하나님의 뜻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동안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삶이었고 이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사명을 완성하려고 합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해달라는 기도의 내용은 바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기도는 내 생각과 내 소원을 하나님께 맞추어 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 6:33)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뜻이 되고 그 뜻대로 순종할 때 우리의 삶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 생각 이상으로 풍성한 열매가 맺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여 달라는 기도를 드려야 하며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4) 결단을 위한 기도
“일어나서 가자” (42절)
무엇인가에 미련은 있으나 더 큰 목적을 위하여 미련을 버리는 것이 결단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개인적인 소욕을 희생하는 것이 결단의 행동입니다. 서른 세살이란 한창 나이에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구나 삼년 동안을 동고동락하던 제자들과도 이제 헤어져야 합니다. 때로 인정에 이끌려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하나님의 일을 그르칠 때가 있습니다. 또한 마귀가 잘 사용하는 무기가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주춤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세상의 구원이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결단에 달렸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를 못 지겠다고 하시며 뒤로 물러선다면 적어도 예수님을 통한 인류의 구원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간절히 세 번씩이나 기도하는 동안에 개인적인 바람보다 점차로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면서 십자가의 길을 가려는 결단을 가집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 기도를 통하여 담대함을 얻으신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그 뜻대로 순종하기 위하여 결연히 나아가십니다. 기도를 통하여 결단할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 기도에는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주님께서 열두 제자 중에서 특별히 세 제자들과만 계신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막 5:37 ; 9:2) 오늘도 그들을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장소로 데리고 가신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29절에서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였고, 내친 김에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습니다. 본장 29, 31절에서 주님을 끝까지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과거가 있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10:38-39에서 예수께서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물어보셨을 때 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잔은 십자가를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누릴 특권만을 생각했지 주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을 몰랐기에 이들에게 데리고 동산에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지금은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원하셨습니다.
임박한 위기를 앞두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더불어 있기 원하셨습니다. 그들 보고 함께 기도하자고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깨어 있으라 (Keep watch) 라고 말하였습니다. 물론 기도는 예수님이 혼자 하시는 것이나 가까운 거리에서 평소에 친밀했던 세 제자들이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예수님에게 커다란 격려가 됩니다. 겟세마네의 기도 현장에서 주님께서는 땀이 피가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시는데 정작 기도해야할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습니다. 첫 번째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셔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예수께서 다시 떠나가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와서 보시니, 그들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그들은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습니다. 낮에 많은 활동을 했으며, 유월절 만찬이 모두 끝난 시각이라 자정도 지나 밤이 무척 깊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깨어 있어야만 했다. 그 밤은 다른 날과 같은 평범한 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며 동시에 부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주님은 베드로를 주를 만나기 이전의 본래 이름인 '시몬'으로 부르셨는데, 이는 현 상태의 그가 교회의 기초가 될 위대한 신앙 고백을 했던 인물이 아니고 연약한 인간성을 지닌 순간임을 시사합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시몬아'라고 부르시기는 했지만 이 단어는 원래 복수형으로서 나머지 요한과 야고보까지 지적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베드로의 이름이 호명된 것은 바로 그가 주님과 함께 죽을 수도 있다고 장담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깨어 있지 못하니 예수님은 다시 그들에게 깨어 있고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부족함, 연약함을 깨닫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깨어서 기도해야 할 시간에 기도하지 못하였으니 시험이 닥쳐왔을 때에 그들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겁에 질려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깨어 있을 시간에 깨어 있지 못하고 육신의 피곤함과 분주함을 핑계로 하나님의 사역에 무관심하거나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뜻을 고집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기도의 제목이 있을 때 서로에게 기도를 부탁해야 합니다.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서로를 위로하고 사랑을 나누고 믿음을 세워주는 믿음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인하여 예수님은 찔리시고 상하시는 고난의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부활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으나 공생애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공생애를 마무리 짓는 시점에서 겟세마네의 기도는 완성된 기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의 생애의 궁극적인 목적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며 구속을 완성할 능력을 받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일어나 함께 가자” 예수님은 어둠 속에서 자기를 잡으러 오는 무리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시며 제자들과 더불어 결연히 앞으로 가십니다.
기도할 시간에 기도하지 못하고 문제에 눌리거나 생활의 염려에 지쳐 있지는 않으십니까? 제자들에게 여러 번 찾아오시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들을 깨우시던 주님이 사모하는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연약한 심령을 깨워주십니다. 시련이 닥쳐 올 때 낙심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기도하되 끈질기게 온힘을 다하여 기도합시다. 간절히 하되 자기의 뜻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며 순종하기 위하여 기도하십시다.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나아가는 결단의 모습을 가집시다.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주안에서 온전히 신앙생활 하도록 격려하고 그들을 위하여 중보기도 합시다. 기도생활에 충실하며 하나님 앞에 진실한 자들이 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고난 속에서도 헤쳐 나갈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능력 있는 기도를 통하여 삶 속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시는 기도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목 장 모 임 교안
1단계: 경배와 찬양 (Worship & Praise)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찬양을 통하여 주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2단계: 친숙해지기 (Ice Breaker)
한 주일의 삶을 돌아보면서 감사하는 내용을 나눕니다.
목자는 목장 식구들 간에 친밀한 의사소통을 가지도록 격려합니다.
3단계: 말씀 나누기 (Word)
막 14:32-42절을 읽습니다.
*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 1) 바빠서; 2) 피곤해서
* 기도해야 하는 이유: 1)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2)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드린 기도의 특징:
1) 고통 가운데 드리는 기도; 2) 온힘을 다하여 드리는 기도
3) 하나님의 뜻에 우선을 둔 기도; 4) 결단을 위한 기도
* 기도에는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 본문 요약이나 읽은 본문을 통하여 느낀 내용을 나누거나 적용합니다.
1) 그동안 기도 생활을 돌아보며 언제 가장 기도하였습니까? 그럴 때 어떤 응답이나 일이 있었는지 나누어 봅니다.
2) 기도생활을 가장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하시 srl도가 내게 어떤 도전이나 교훈을 주는지 생각해 봅시다.
3) 본문이나 설교의 내용 중에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있으면 나누어 봅니다.
4단계: 목표와 계획 세우기
1. 각자의 삶을 나누며 기도의 제목을 (가정, 사업, 교회) 교환합니다. 서로를 위하여 중보기도 합니다.
BLESS 기도: Body, Labor, Emotional, Social, Spiritual
2. 후원하는 선교사를 위하여 기도와 헌금을 드립니다.
3. 전도 대상자를 (불신자나 아직 교회를 정하지 못한 분들)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면서 기도를 합니다. 이웃이 어려움을 겪을 때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특별한 문제가 있는 교우들을 위하여 교회에서 특별 릴레이 금식기도를 합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라는 것을 모르는 성도는 없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의외로 많은 분들이 제대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평소에 새벽기도 나오지 않는 교우가 새벽에 뒷자리에 와서 앉아 있으면 목사는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저 교우가 무슨 문제가 있어서 나오지 않든 새벽기도를 나왔는가? 설교를 하면서도 나름대로 생각에 잠깁니다.
기도하지 못하는 두 가지 대표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피곤해서/바빠서. 이일저일 쫓아다니고 잠이 부족하다 보니 피곤해서 기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한두 번 피곤할 수 있지만 피곤이 계속해서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너무 벌려 놓은 일이 많아 바쁘기 때문에 기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한두 번 분주할 수 있지만 분주함이 계속해서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계속 피곤하거나 혹은 계속 바빠서 기도를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그 일을 그만두든지 바꾸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
본문에도 보니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38절)
“그들은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이다.” (40절)
1) 바빠서
자기 하고 싶은 것을 다하려고 할 때, 기도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세운 목표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을 낼 때 자연히 기도 시간이 줄게 됩니다.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마르틴 루터는 너무 바쁘기 때문에 자기는 기도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물질은 잃어도 다시 찾을 수 있다. 건강은 잃어도 다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잃어버린 시간은 찾을 수 없습니다. 한번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실상은 시간을 줄이는 방법입니다. 기도하면 분별력이 생깁니다. 집중력이 생깁니다. 따라서 기도는 시간 낭비가 아니라 시간을 버는 비결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2) 피곤해서
새벽기도에 가려고 하다가도 막상 일어나려고 하면 좀더 자자, 좀더 눕자, 오늘만 날이냐 하는 생각에 다시 잠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누가 새벽기도 만들어가지고 하는 불평을 저도 여러 번 하였습니다. 새벽기도를 오래 했지만 아직도 얼람이 없으면 저절로 일어나지 못합니다. 사실 새벽기도를 드리려면 전날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늦은 밤까지 시간을 보냈는데 어떻게 아침에 일찍 일어나겠습니까? 또 어떤 분은 안하던 새벽기도를 하면 골이 띵해진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새벽기도 체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새벽기도 체질로 바뀌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집니다.
기도하면서 두 손을 모르고 눈을 꼭 감고 기도합니다. 때로 주여 소리를 치며 기도하기도 합니다. 자, 기도하면 힘을 쓰게 마련입니다. 기도하면서 그나마 있던 힘까지 쏟는다. 그런데 기도하고 나면 힘이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새벽기도 올 때는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기도하느라 에너지를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가벼워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눅 22: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힘이 들고 피곤할지라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힘을 주신다.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일하는 것마다 성령께서 능력을 주신다. 이래도 기도 안하시겠습니까?
이번 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한주일 동안 특별새벽기도회가 있습니다. 아무리 특별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나는 새벽기도 체질이 아니라면서 여전히 새벽기도에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직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물론 직장 때문에, 아이들 학교 보내는 준비 때문에 새벽기도에 못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작정하고 한번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중에 도저히 시간이 안 되거든 토요일 한번은 나오시기 바랍니다. 새벽기도에 들인 시간이나 에너지 이상의 것을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 기도해야 하는 이유
1)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이 도망할 것과 당신이 부활하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다 도망갈 텐데 그것은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는 구약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요,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성질 급한 베드로가 말합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나는 결단코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펄쩍 뛰며 말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베드로의 말을 으면서 다른 제자들도 그러겠노라고 장담합니다. 말로 떠벌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치고 제대로 입술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없습니다. 베드로의 장담에 자기들도 그러겠노라고 다른 제자들이 동조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열정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조차 없이 그냥 끌려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에 빠집니다. 피곤한 몸을 핑계 삼아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깨어 있는 것'과 '기도하는 것'의 두 가지가 함께 병행할 때 모든 시험은 비켜 갈 것입니다. 깨어 있을 때 기도의 제목을 찾을 수 있으며, 기도할 때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는 통로입니다. 기도는 연약한 자를 강한 자로 변화시킵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지혜와 능력을 얻습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그리고 시험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우리 모두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의지와 바램을 끝까지 실현하지 못합니다. 사실 연약함 때문에 성도는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적 연약함을 기도로 극복하고 영적으로 강건했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였습니다. 부족함과 연약함으로 인해 위축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하고, 그것들로 인하여 더욱 우리는 은혜를 사모하여 더욱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고 그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눅 3:21,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새” 공생애로서 첫 출발을 기도로 시작하셨습니다. 막 1:35, “새벽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하루의 바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영적으로 재충전하는 기회를 가지셨습니다. 눅 6:12-13에 의하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실 때 산으로 가사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같이 남에게 보이려는 외식하는 기도를 드리지 말고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드리지 말고 하면서 기도하는 구체적인 자세까지 알려주시고 이런 식으로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주기도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였을 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막 9:29) 하시면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본문을 보니 때는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밤입니다. 그 밤에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는 곳에 오십니다. 제자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짧은 생애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며 십자가를 지고 갈 담대함을 얻기 원하셨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기도에 대하여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아 기도의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본문을 피상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기도는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가 겪어야 할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는 나약한 발언을 하게 합니다. 종종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하여 꾸짖으시던 선생님의 모습으로서는 민망하기 그지없는 연약함이 나타납니다. 제자들에게 같이 기도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같이 기도에 동참하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하시는데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을 열어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선언하시던 하나님, 변화산 상에서 모세와 엘리야과 함께 계실 때에 오직 예수의 말만 들으라고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아들의 간절한 기도에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지난 3년 동안 예수님은 병자를 낫게 하고 귀신을 쫓고 풍랑의 제압하는 등 놀라운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문제를 놓고 세 번씩이나 동일한 말로 기도했으나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루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응답받지 못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과연 겟세마네 기도는 실패한 기도입니까? 예수께서는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 속에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 고난의 심리적 고뇌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겟세마네에서 하나님의 침묵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로 이어졌습니다. 성공적인 기도는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기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린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5:7)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드린 기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 고통 가운데 드리는 기도
기도가 무엇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길이와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부족하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께 의지하는 수단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님의 심경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땅에 오실 때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는 빌 2:6의 말씀과 같이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기도를 드리는 예수님의 심경이 본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두려워하며, 괴로워하셨다.” (33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34절)
이 시간이 내게서 비껴가게 해 주시옵소서. (35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36절)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는 문장을 직역하면 '내 영혼이 압도되어 죽을 지경이다'라는 의미가 된다.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의 재물로 내어주어야 한다는 점을 알고 계셨으며 (막 10:45),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고 계셨지만 육신의 수난에 대한 두려움도 느끼셨습니다.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어떤 식으로 죽어야 할 것을 아십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야 합니다. 육신의 고통보다도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다는 것이 예수님에게 있어 견디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이 당할 수난을 생각하시니 예수님은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시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저자는 고통 가운데 기도할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어려움이나 고통이 있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고난의 때에 예수님은 방황하거나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을 찾아다니며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고난을 당할지라도 예수님을 본받아 기도해야 합니다.
2) 온힘을 다하여 드리는 기도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이르렀다.” (32절)
예수님이 제자들과 더불어 겟세마네라는 곳에 기도하러 오셨는데 그곳은 감람산 동쪽 기슭의 작은 동산으로 주변에는 올리브 나무가 많이 있었습니다. 겟세마네의 뜻은 Oil-Press, 즉 기름 짜는 틀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땀을 흘리신 고뇌의 기도 현장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예수님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낮은 자세를 취하시고 기도하십니다. 아까 화면에서 보셨듯이 눅 22:44에 의하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기름 짜는 틀에 올리브 열매를 넣고 꽉 짤 때 올리브기름이 나오듯 예수님께서 온몸의 진액이 다 빠질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생의 내용이 다 짜져서 하나님에게 바쳐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자세로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39 절). 예수께서는 똑같은 말씀으로 세 번이나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도는 기도하다가 낙망치 말고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눅 11:9,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하면서 예수님은 끈질기게 매달려서 기도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한두 번 적당히 기도하다가 그만두는 자세로는 응답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간절히 그리고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항상 그리고 즉시로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잘못 구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때로 우리의 인내와 순종을 훈련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시간을 제한하지 말고, 다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기도할 수 있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기도할 시간에 기도하지 않고 잠을 자다가 실족하고 말았습니다.
3) 하나님의 뜻에 우선을 둔 기도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36절)
우리는 기도할 때 온 정성을 다하여 간절하게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내 아버지여”라 부르며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항상 하나님과의 돈독한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것이 기도자의 자세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데도 하나님을 설득하여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것이나 자신의 사정을 하나님에게 통고만 하는 것은 참다운 기도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어기겠다는 것이 아니라 굳이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가 하며 시련에 대한 두려움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잔은 고통과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킵니다. 시11:6,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사 51:17, “여호와의 손에서 그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의 죄 때문에 대신 당하는 고통이요,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관련된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을 피하려는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첫 번째 기도를 마무리 짓습니다. 처음 기도에서는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예수님의 뜻을 비치지만 이번에는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면서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킵니다.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며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재확인합니다. 그러기에 그의 궁극적인 간구는 결국 하나님의 뜻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동안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삶이었고 이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사명을 완성하려고 합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해달라는 기도의 내용은 바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기도는 내 생각과 내 소원을 하나님께 맞추어 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 6:33)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뜻이 되고 그 뜻대로 순종할 때 우리의 삶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 생각 이상으로 풍성한 열매가 맺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여 달라는 기도를 드려야 하며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4) 결단을 위한 기도
“일어나서 가자” (42절)
무엇인가에 미련은 있으나 더 큰 목적을 위하여 미련을 버리는 것이 결단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개인적인 소욕을 희생하는 것이 결단의 행동입니다. 서른 세살이란 한창 나이에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구나 삼년 동안을 동고동락하던 제자들과도 이제 헤어져야 합니다. 때로 인정에 이끌려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하나님의 일을 그르칠 때가 있습니다. 또한 마귀가 잘 사용하는 무기가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주춤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세상의 구원이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결단에 달렸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를 못 지겠다고 하시며 뒤로 물러선다면 적어도 예수님을 통한 인류의 구원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간절히 세 번씩이나 기도하는 동안에 개인적인 바람보다 점차로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면서 십자가의 길을 가려는 결단을 가집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 기도를 통하여 담대함을 얻으신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그 뜻대로 순종하기 위하여 결연히 나아가십니다. 기도를 통하여 결단할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 기도에는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주님께서 열두 제자 중에서 특별히 세 제자들과만 계신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막 5:37 ; 9:2) 오늘도 그들을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장소로 데리고 가신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29절에서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였고, 내친 김에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습니다. 본장 29, 31절에서 주님을 끝까지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과거가 있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10:38-39에서 예수께서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물어보셨을 때 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잔은 십자가를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누릴 특권만을 생각했지 주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을 몰랐기에 이들에게 데리고 동산에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지금은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원하셨습니다.
임박한 위기를 앞두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더불어 있기 원하셨습니다. 그들 보고 함께 기도하자고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깨어 있으라 (Keep watch) 라고 말하였습니다. 물론 기도는 예수님이 혼자 하시는 것이나 가까운 거리에서 평소에 친밀했던 세 제자들이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예수님에게 커다란 격려가 됩니다. 겟세마네의 기도 현장에서 주님께서는 땀이 피가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시는데 정작 기도해야할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습니다. 첫 번째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셔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예수께서 다시 떠나가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와서 보시니, 그들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그들은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습니다. 낮에 많은 활동을 했으며, 유월절 만찬이 모두 끝난 시각이라 자정도 지나 밤이 무척 깊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깨어 있어야만 했다. 그 밤은 다른 날과 같은 평범한 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며 동시에 부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주님은 베드로를 주를 만나기 이전의 본래 이름인 '시몬'으로 부르셨는데, 이는 현 상태의 그가 교회의 기초가 될 위대한 신앙 고백을 했던 인물이 아니고 연약한 인간성을 지닌 순간임을 시사합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시몬아'라고 부르시기는 했지만 이 단어는 원래 복수형으로서 나머지 요한과 야고보까지 지적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베드로의 이름이 호명된 것은 바로 그가 주님과 함께 죽을 수도 있다고 장담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깨어 있지 못하니 예수님은 다시 그들에게 깨어 있고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부족함, 연약함을 깨닫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깨어서 기도해야 할 시간에 기도하지 못하였으니 시험이 닥쳐왔을 때에 그들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겁에 질려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깨어 있을 시간에 깨어 있지 못하고 육신의 피곤함과 분주함을 핑계로 하나님의 사역에 무관심하거나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뜻을 고집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기도의 제목이 있을 때 서로에게 기도를 부탁해야 합니다.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서로를 위로하고 사랑을 나누고 믿음을 세워주는 믿음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인하여 예수님은 찔리시고 상하시는 고난의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부활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으나 공생애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공생애를 마무리 짓는 시점에서 겟세마네의 기도는 완성된 기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의 생애의 궁극적인 목적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며 구속을 완성할 능력을 받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일어나 함께 가자” 예수님은 어둠 속에서 자기를 잡으러 오는 무리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시며 제자들과 더불어 결연히 앞으로 가십니다.
기도할 시간에 기도하지 못하고 문제에 눌리거나 생활의 염려에 지쳐 있지는 않으십니까? 제자들에게 여러 번 찾아오시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들을 깨우시던 주님이 사모하는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연약한 심령을 깨워주십니다. 시련이 닥쳐 올 때 낙심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기도하되 끈질기게 온힘을 다하여 기도합시다. 간절히 하되 자기의 뜻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며 순종하기 위하여 기도하십시다.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나아가는 결단의 모습을 가집시다.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주안에서 온전히 신앙생활 하도록 격려하고 그들을 위하여 중보기도 합시다. 기도생활에 충실하며 하나님 앞에 진실한 자들이 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고난 속에서도 헤쳐 나갈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능력 있는 기도를 통하여 삶 속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시는 기도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목 장 모 임 교안
1단계: 경배와 찬양 (Worship & Praise)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찬양을 통하여 주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2단계: 친숙해지기 (Ice Breaker)
한 주일의 삶을 돌아보면서 감사하는 내용을 나눕니다.
목자는 목장 식구들 간에 친밀한 의사소통을 가지도록 격려합니다.
3단계: 말씀 나누기 (Word)
막 14:32-42절을 읽습니다.
*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 1) 바빠서; 2) 피곤해서
* 기도해야 하는 이유: 1)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2)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드린 기도의 특징:
1) 고통 가운데 드리는 기도; 2) 온힘을 다하여 드리는 기도
3) 하나님의 뜻에 우선을 둔 기도; 4) 결단을 위한 기도
* 기도에는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 본문 요약이나 읽은 본문을 통하여 느낀 내용을 나누거나 적용합니다.
1) 그동안 기도 생활을 돌아보며 언제 가장 기도하였습니까? 그럴 때 어떤 응답이나 일이 있었는지 나누어 봅니다.
2) 기도생활을 가장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하시 srl도가 내게 어떤 도전이나 교훈을 주는지 생각해 봅시다.
3) 본문이나 설교의 내용 중에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있으면 나누어 봅니다.
4단계: 목표와 계획 세우기
1. 각자의 삶을 나누며 기도의 제목을 (가정, 사업, 교회) 교환합니다. 서로를 위하여 중보기도 합니다.
BLESS 기도: Body, Labor, Emotional, Social, Spiritual
2. 후원하는 선교사를 위하여 기도와 헌금을 드립니다.
3. 전도 대상자를 (불신자나 아직 교회를 정하지 못한 분들) 위하여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