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참된 그리스도의 삶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5-15 14:00
Views
338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거듭나서 구원 얻은 자에게 주어지는 명칭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나사렛파 사람들, 성도, 형제, 제자라 불렸습니다. 그러다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행 11:26). 안디옥 교인들이 바나바와 바울의 인도 하에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와 말씀에 충실하고 삶의 변화가 나타나고 복음을 전하는 데 열심을 내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랬더니 믿지 않는 자들이 안디옥 교인들을 자기들과 다른 부류의 사람들로 취급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습니다. 요즈음 말로 한다면 ‘예수쟁이’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원래는 조롱하느라 사용된 말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지칭이 도리어 안디옥 교인들을 자랑스럽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지난 1월 첫 주일부터 갈라디아서를 다루었는데 오늘 마무리 짓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살펴본 갈라디아서를 요약해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왔다고 주장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바울의 사도직과 메시지를 승인했습니다. 전에 율법 아래 있었고 율법을 통해서는 의도, 생명도 얻을 수 없었는데 하나님이 믿음으로 의와 생명에 이르는 길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인들이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셨고, 이로써 저주에서 해방되어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포함한 언약이 모세 시대로부터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기간에만 유효합니다. 이제 신자들은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는 삶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하며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이 그들 안에서 열매를 거두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어 갈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의 헛된 자랑(11-13절) 


바울이 다른 사람에게 대필을 시키다가 결론 부분만 자신이 큰 글자로 썼는지 아니면 전체를 쓰다가 여기서부터 큰 글자로 썼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큰 글자’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중요한 점은 바울이 자신의 마음을 담아 손으로 뭔가를 직접 썼다는 것입니다. 편지를 읽는 자들이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서 이 부분을 읽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혼란스럽게 한 유대주의자, 소위 할례당의 정체를 밝힙니다. 첫째, 그들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입니다. ‘모양을 내다’는 ‘좋은 외모로 꾸미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외모뿐 아니라 능력이나 조건, 혹은 소유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행태를 포함합니다. 둘째, 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해서 억지로 받게 하려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더라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가시적 열매로 여겼습니다. 셋째, 그들이 할례를 강요하고 바울을 공격했던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초래되는 박해를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 다른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과 교제하는 일로 공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해서 유대인으로 만들어 ‘우리는 이방인을 유대인으로 변화시켜 율법을 지키게 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인정받기 원했습니다. 율법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진리라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설득하였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안위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위선일 뿐이었습니다. 넷째, 그들은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할례당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을 지키는 신자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십자가 없는 육체의 증거는 자신이 얼마나 의로운지를 드러낼 뿐입니다. 


 


바울은 어떠하였습니까? 그가 율법주의와 타협했더라면 박해를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복음의 진리를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타협은 서로의 입장을 조율해서 합의를 이룬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타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만으로 우리의 구원은 완전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더하여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할례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할 수도 없고, 우리를 구원해 줄 능력도 없습니다. 할례는 구원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종교적 형식에 불과합니다. 할례당은 신자들에게 육체의 모양인 할례를 강요하며 그것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으려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행위를 내세운다 해도 그것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결코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선한 동기로 주님을 섬긴다 할지라도 그 안에는 불경건한 것들이 깊이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 각자가 설 때 우리가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업적, 학벌, 권세, 명예, 외모를 자랑하겠습니까? 그런 육체의 자랑을 늘어놓는다고 하나님꼐서 감탄하시고 우리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의 참된 의미가 무엇입니까? 자기 안에 있는 죄스러운 본성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 30:6). 보이기 위한 육신의 할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제대로 할례를 받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결심을 해도 우리 안에 있는 악하고 더러운 본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그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것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이것이 칭의, 즉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의 십자가 자랑(14-16절)


육체를 자랑하는 유대주의자들과 달리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율법과 관계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당시 십자가는 로마제국의 반역자와 노예들에게 부과되었던 형벌 제도였기에 전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메시아의 구속사역의 결과가 십자가였다는 사실이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었고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고전 1:18-25). 그러나 바울에게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었고, 자랑과 기쁨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십자가를 통해 표현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여기서‘세상’은 헬라어로 ‘코스모스’인데 인간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불신 세계의 삶의 원리’를 뜻합니다. 세상이 바울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 어떠한 타협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박해를 피하거나 자기 자랑을 위해 종교적 형식을 지키는 것이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또한 자기가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합니다. 사실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나 유대인으로 자랑할 것들이 거짓 선생들보다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 3:8).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은 그분을 사랑하고 따르는 사람에게 아무런 매력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갖고 있던 옛 가치관을 버리고 새로운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상에 대해 죽은 것입니다.  


 


바울에게 할례나 무할례와 같이 옛 피조물에서 중요했던 구별이 이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은 새 창조를 의미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은 자에게는 그 신분에 합당한 새 삶이 요청됩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평강과 긍휼이 임하기를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규례’은 원래 ‘측량줄, 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표준, 원칙’을 뜻합니다. 이 규례를 행하는 것은 할례에 관한 구별이 새 창조 안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달아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고 범사에 믿음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끝까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스라엘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혈통을 따라 이스라엘이 된 유대인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새 이스라엘입니다. 율법을 따르고 할례를 받고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새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 곧 참된 영적 이스라엘로서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흔적(17-18절) 


바울은 누구든지 자신의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의 몸에 예수님의 흔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복음과 사명은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것이므로 인간적인 판단 기준으로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며 믿는 이들을 미혹시키는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을 괴롭게 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거짓 가르침에 넘어가 율법으로 돌아가려던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을 괴롭게 했을 것입니다. ‘내 몸’할 때 사용된 ‘몸’은 율법주의자들이 자랑하는 ‘육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몸’을 뜻하는 ‘소마’를 사용합니다. 그들은 할례의 흔적을 자랑했지만 바울은 ‘예수님의 흔적’을 자랑합니다. “예수의 흔적”은 복수형으로 ‘예수의 흔적들’입니다. 17절을 직역하면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왜냐하면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입니다.  여기서 ‘흔적’이란 주인이 종이나 짐승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찍는 낙인을 말합니다. 바울에게 ‘예수님의 흔적’이란 예수님께 충성한 결과로 받은 핍박의 흔적이며, 고난의 상처였습니다. 주름살을 세월의 흔적이라 합니다. 흔적이 삶을 말해줍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그의 사람됨을 보여줍니다. 바울에게 그 흔적은 바울의 삶이 예수님의 것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소유가 된 바울은 수많은 고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온 힘을 다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섬기다가 생긴 고난의 흔적을 자랑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의 자랑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세상의 헛된 자랑에서 자유하게 합니다. 믿는 자에게 중요한 것은 할례의 흔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흔적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환난과 궁핍과 고난을 받고 오해와 비방을 많이 받았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흔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흔적은 할례 받은 흔적이 아닙니다. 육신의 정욕을 좇다가 생긴 흔적이 아닙니다. 그 흔적은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면서 당한 고난의 흔적입니다. 그 흔적은 바울이 하나님의 택한 종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따라서 바울을 괴롭게 하는 것은 바울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흔적’은 괴로움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주님과 연합된 영광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애쓰며, 수많은 고통과 갈등 중에도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수님의 흔적이 생깁니다. 이제는 세상의 흔적을 지우고 예수님의 흔적을 새겨야 합니다. 바울은 실망을 주었던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깊은 사랑과 신뢰를 담아 ‘형제’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있기를 축원하며 서신을 마무리합니다.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바울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며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던 것처럼 우리도 바울과 같이 기쁨으로 섬기며 예수님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 희생해야 합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예수님의 흔적이 있으십니까?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절제하거나 포기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고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어도 변화된 것이 없고 예수님을 따른다 하면서도 전혀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흔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흔적은 세상과 타협할 때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전심으로 따르는 자들에게만 생깁니다.  그 길은 좁은 길이지만 가치가 있고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기에 기쁨으로 그분의 고난에 동참합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원하지만 그것을 막는 것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믿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일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소리가 듣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그 소리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려면 주님의 소리를 분별해 들어야 합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큰 능력을 행하고도 아합의 아내 이세벨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겁에 질려 광야로 도망가서 로뎀나무 밑에서 죽기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호렙 산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가 들었을 때 사명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 7명이 티베리아 바다에서 밤새 그물을 던졌어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요 21:6)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을 때 큰 물고기 153마리를 잡았습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음성을 들으며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자기에게 주신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세상의 소리가 아닌 주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소리에 담겨진 우리 각자를 향한 사명을 깨닫고 또한 감당해야 합니다. 복잡하고 바쁜 세상에 살면서 우리의 마음이 메말라지는 것은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주님 앞에서 침묵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소리에 담겨진 주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주님이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나아가는 사명감에 불타는 인생은 이 세상의 것들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며 하나님만 알아주시면 된다는 자세를 가지고 나아갑니다. 그 일이 크든 작든 상관이 없이 선한 청지기 같이 충성합니다. 


 


나가면서


본문을 정리해 봅니다. 바울은 직접 큰 글씨로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권면을 했습니다. 그는 유대주의자들이 할례를 강요하는 동기를 폭로했습니다. 그것은 박해를 면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자신들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세상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서로에 대해 죽었습니다. 할례를 받느냐 안 받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예수님의 흔적이 자기에게 있음을 증거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받은 고난의 상흔들은 바울의 일관된 복음 사역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 분명한 표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대적하는 것은 곧 복음의 원수가 된다는 의미임을 암시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언제나 주님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이 오늘도 우리들과 함께 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각자를 향한 사명을 깨닫고 끝까지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하나가 되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이 땅에서 필요한 것도 다 채워주십니다.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될 때 주님의 흔적이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우리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우리가 머무르는 곳마다 주님의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의 주시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만 바라보며 사명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바울과 같이 강하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기 바랍니다. 팬데믹이 여전히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사명감에 불타는 청지기의 삶을 살고, 한 마음으로 신앙의 경주를 하고, 풍성한 열매를 인해 삶의 현장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교회를 함께 지어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