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신령한 자의 삶(1)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4-24 15:16
Views
352

고린도 전서를 보면 사도 바울은 사람을 구원과 관련지어 크게 셋으로 나눕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않은 자’(고전 2:14), 즉 믿지 않는 자연인들을 가리킵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고전 3:2), 즉 믿기는 하지만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육신에 속한 증거로 시기와 분쟁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명목상 그리스도인 혹은 무늬만 그리스도인입니다. 교인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령한 자’들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을 따라 사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각자를 진단해보면 어디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최종적으로 결산하시는 하나님 앞에 열매를 보여드리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순간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주님의 뜻을 분별하며 그 뜻대로 순종하면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누룩에 비유하며 악한 영향력이 온 교회에 퍼지는 것을 염려하였고 그런 교훈을 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더 이상 율법에 매여 살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금주와 다음 주는 ‘신령한 자’즉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유자로 주님 보시기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13-15절) 


종에서 벗어난 사람이 자유자인데 자유자가 종노릇한다는 것은 역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바울은 먼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자유가 남용되어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기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르메’는 군사작전의 전초기지 혹은 교두보를 나타내는 용어로 ‘계기’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주어진 자유를 육체의 기회나 방종 등 육신의 욕구를 추구하는 계기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가 마음대로 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베푸신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인생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상호 존중하며 섬기는 주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성령 안에서’나타나야지 ‘육체 안에서’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죄와 심판과 영원한 저주로부터 자유케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쓰게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은 할례를 비롯한 종교적 의식과 규례를 행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종노릇해야 하는 대상은 자기의 육체가 아닙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는 현재 명령형으로, 직역하면 ‘그 사랑으로 서로에게 계속해서 종이 되어라’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으로 종이 되어 서로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함을 받은 자들로서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며 이웃에 대한 섬김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말은 바로 주님이 주신 새 계명이라고 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우리가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율법을 다 지킨 것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롬 13:10) 그런데 우리의 의지나 힘만 가지고는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때문에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누가 내 이웃인지 따지기보다 네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되라고 적극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나와 친하든 친하지 않든, 어떤 처지에 형편에 있든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이 우리의 이웃입니다. 가난하고 굶주린 영혼들, 외롭고 상처받은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사람들에게서 그 사랑이 흘러나옵니다. 바울은 사랑의 종노릇하는 자유 속에서 율법의 완성을 봅니다. 그래서 구약 모든 계명들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한 말씀에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하게 된다는 풍자적인 경구를 언급합니다. 유대주의자들로 인해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에 유대감과 사랑이 상실되었고 교회 전체가 분열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일을 언급하면서 교회를 나뉘게 하는 언사와 행위를 피할 것을 강력히 경고합니다. ‘물다’와 ‘먹다’는 동물의 행동 양식을 보여 주는 동사입니다. 특히 ‘먹다’는 게걸스럽게 집어 삼키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사랑의 섬김이 사라질 때 우리의 야만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합니다. 야생동물이 싸우듯 성도들이 서로 싸우면 함께 망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성도들은 모두가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우리의 전체를 드려 섬겨 마땅한 사랑의 대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섬기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16-18절)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함을 입었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완전하게 변하여 거룩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옛 사람의 죄악 된 습성이 남아 있기에 이것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 습성이 자꾸 고개를 들게 마련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자기중심으로 살려고 하고 죄악 된 습성에 머물려는 강한 욕구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도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성령을 통하여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과 기도로 교제하게 되고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갑니다. 성령의 소욕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는 거룩한 의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성도의 내면에 공존하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끊임없이 갈등합니다. 두 소욕이 서로 싸우다가 강한 쪽이 약한 쪽을 장악해 버립니다. 이러한 두 소욕의 갈등이 계속되는 한 성도는 결코 자유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바울은 자신 안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악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고 괴로워했습니다. 한 편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다른 편에서는 죄의 법에 굴복해버리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물론 바울의 표현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 아래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상황은 율법 아래 있을 때와 전혀 나을 것이 없다는 의도에서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믿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실패와 좌절과 절망을 가져다주는 율법의 절대적인 무능력과 절망적 상황을 발견했습니다. 그렇다고 율법 자체가 문제가 있거나 죄성을 갖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법으로서 거룩하고 의롭고 신령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죄의 권세가 너무 강하여 인간을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행하다’는 동요하지 않고 일관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날마다 성령과 동행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악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육체의 소욕”으로 표현되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성령의 소욕”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을 믿을 지라도 우리 안에는 지금까지 살아 온 방식을 바꾸기 싫어하는 강한 고집이 있어서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을 소멸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단순히 죄가 옳지 않다는 생각만으로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러운 짓을 해가면서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자신의 옛 기질에 대하여 혐오감이 생겨야 합니다. 전에는 죄가 당연한 줄 알았고, 누군가 죄를 지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였는데 은혜를 받고 보면 죄가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 것인지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은 죄를 짓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게 하고, 우리를 설득하고 훈련시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 속에 있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지에 주목합니다. 육체와 성령의 싸움 속에서 육체가 이기면 육체의 일이 만들어지고, 성령이 이기면 성령의 열매가 맺혀집니다. 성령이 주어진 것은 언약 백성이 되었음을 의미하며 그것은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의 인도 가운데 있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육체의 일(19-21절)


‘육체의 일’은 ‘율법의 행위’와 병행하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육체란 ‘죄 된 본성’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일’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지 못한 죄 된 본성이 추구하며 행하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체가 추구하는 것들이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들을 추구하는 모순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는 배치되는 열다섯 가지 육체의 일을 나열하는데, 분류해 보면 성적 범죄, 종교적 범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의 범죄, 자신에 대한 범죄로 나뉩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은 성적 범죄에 속합니다. 우상 숭배와 술수는 종교적 범죄입니다.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는 대인관계 속에서의 범죄의 유형들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발견하면 떠벌일 줄은 알아도 용서할 줄 모릅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주장하며 인정받으려 합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무리를 지어 진리를 대항하며 분열하고 싸웁니다. 남이 자기보다 잘하거나 잘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극대화된 이기심으로 가지고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다가 이웃을 해치게 됩니다. 끝으로 술 취함과 방탕함은 자기 자신을 향한 범죄입니다. 술에 취하게 되면 모든 일을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방탕함'은 술에 취하여 흥청망청 떠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육신의 쾌락을 좇느라 도박이나 오락에 빠지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바울은 육체의 일에 대한 목록을 쓰다가 다“그와 같은 것들”(갈 5:21)이라고 하며 이외에도 언급하지 못한 죄목들이 많음을 암시합니다. 사실 모든 종류의 죄를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또 다른 죄를 계속해서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육체의 일들은 개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오늘 우리 사회가 겪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런 육체의 일들이 자주 나타나다 보니 이러한 죄에 대하여 점점 둔감해집니다. 이런 일들은 다 우리에게 얼마든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기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하면서 바울이 경계합니다. 이 말은 한번 이런 죄에 빠진 적이 있는 사람은 다시 회개할 수도 없고 예수를 믿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들도 때로는 실수하여 '육체의 일'을 따르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상습적으로 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죄를 계속 저지르는 것은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어떤 죄든지 다 용서 받을 수 있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의 취지는 성도들이 그런 악행을 버림으로 해서 그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루고 날마다 변화하여 끝내는 육체의 소욕을 모두 버리기까지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육체를 지니고 있기에 때로는 유혹을 받지만 그때마다 그것을 누르고 자제해야만 신앙의 성장을 이루며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22-23절)  


육체의 일과 대조되는 성령의 열매는 신자의 노력의 소산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해 성령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아홉 가지 열매라고 지칭하지만, ‘열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르포스’는 단수형으로 이 모든 속성이 하나의 목적을 두고 성령의 지배 아래 유기적으로 연결됨을 나타냅니다. 성령의 열매를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에게서 유래된 성품으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며, 둘째는 첫째 성품들을 지난 이들이 다른 사람을 향해 드러내는 성품으로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이며, 셋째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신자에게 요청되는 행동 강령으로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성령의 열매가 신자 개개인의 내적 삶보다 공동체 삶과 연관이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희락부터 절제까지 성령의 여덟 가지 열매는 사랑에 기초할 때 가능합니다. 사랑이 충만할 때, 기뻐할 수 있고 화평하게 되고 오래참고 자비를 베풀고 선을 행하게 됩니다. 신실하고 외유내강하고 자기 절제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또한 그리스도의 품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을 좇아 살게 될 때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닮은 '증거'가 열매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의 위력을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라는 말로 강조합니다. 여기에서 ‘금지하다’은 ‘대항하다’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어떤 법칙으로도 대항할 수 없는 능력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사는 삶(24-26절) 


바울은 성도가 어떻게 해야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번역된 헬라어 ‘에스타우로산’은  '계속 십자가에 달려 있다'는 뜻으로서 예수를 믿으면서 옛 성품이 단번에 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이나마 살아 있는 상태가 계속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정욕이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큰 위협은 못되고 한풀 꺾인 상태라는 것입니다. ‘정욕’은  금지된 것을 향한 열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무엇을 금하면 그것을 향한 인간의 열정은 오히려 더 커집니다(롬 7:5). ‘탐심’은 어떤 대상을 끝없이 탐하는 마음입니다. 금지된 것을 향한 열정과 욕망은 우리 안에서 완전히 죽지 않고 계속 살아나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열정과 욕망은 결국 그 힘을 잃고 죽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옛 성품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전과 같이 강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죄 된 본성과 그 본성이 추구하는 소욕과 열정을 모두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림 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육체의 욕망이 아닌 성령을 따라 살기를 간곡히 권고함으로써 교회 내 분쟁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행하는 삶을 세 가지 분사를 사용해 설명합니다. 첫째, 헛된 영광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서로를 격동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서로 투기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중요한 일은 성도들을 서로 연합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나가면서


하나님이 율법을 대신해 성도들에게 주신 것은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도 어떤 의미에서는 성령을 통한 완성입니다. 율법은 종의 삶을 요구하지만 성령께서는 자유를 선물로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오해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일에 사용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자유를 ‘사랑으로 종노릇하는’것으로 연결합니다. 이렇게 해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레위기 말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율법의 멍에를 지는 종의 신분과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 가운데 행하는 자유자의 신분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매일 말씀으로 깨달음을 주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있습니까? 성령의 열매는 자기 열심과 노력으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방향을 성령님께 맞추고 성령님께서 일하실 때 자연스럽게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키는 종이 될 것을 가르쳤습니다. 반면 바울은 복음을 믿고 성령을 따라 행하며 이웃을 위한 종이 될 것을 가르쳤습니다. 육체의 열매는 모두 개인과 관련되어 있으나, 성령의 열매는 이웃을 향합니다. 성령으로 사는 삶은 신앙 공동체를 세우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우리 공동체에서 맺기를 바라시는 성령의 열매는 무엇일까요?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성령 충만, 지혜 충만, 믿음 충만, 은혜 충만, 능력 충만 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