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부활하신 예수님의 명령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4-17 15:38
Views
277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을 기념하는 성탄절도 의미 있는 날이지만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절은 성도들에게 더욱 의미 있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을 전제로 합니다. 죽음이 있어야만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죽으셨습니까?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이 사함을 얻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나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이 제자들이나 그를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요 슬픔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주님이 다시 사셨다는 소식을 듣고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부활을 예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요 11:25-26)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습니까? 그 말씀을 붙들고 부활의 산 소망을 갖고 능력 있는 성도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본문을 살펴보며 분명한 부활신앙을 가지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무덤을 찾은 여인들(1-4절)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즉‘한 주의 첫날이 시작되는’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무덤을 보려고 갔습니다. 다른 마리아는 아마도 27:56에 나온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이 무덤을 찾은 것은 주님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가는 그 여인들이 방문한 것이 향품을 바르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막 16:1). 안식일이 시작되기 직전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서둘러 예수님의 장사를 지냈는데 여인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해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을 것입니다. 자기들도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라도 바르기 원했습니다. 무덤에는 경비병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기에 가까이 가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설령 무덤에 간다할지라도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여인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굴려낼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시신에 접근할지 대책은 없었지만 무엇도 여인들이 무덤에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복음서 가운데 마태복음에서만 ‘큰 지진’이 등장합니다. 마태는 앞서 예수님이 돌아가시면서 성도들의 무덤이 열릴 때 지진을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이 열릴 때도 지진을 언급합니다. 이는 지진과 무덤이 열린 것 사이에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 같습니다. 개역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원어에는 ‘보라’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극적인 효과를 더하게 합니다. 2절을 직역하면 ‘보라 큰 지진이 났다 왜냐하면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기 때문이다’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알릴 때도 천사가 나타났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다시 나타난 것은 예수님의 부활 또한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초자연적인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굴려낸 돌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가 입은 옷은 눈부실 정도로 광채가 났습니다. 변화산에서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되셨던 주님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천사의 모습을 바라본 경비병들은 두려움 때문에 떨며,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천사가 왜 돌을 굴려놓았습니까? 다시 사신 예수님이 무덤 밖으로 나가시는데 큰 돌이 방해가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들을 꽁꽁 걸어 잠그고 모여 있었는데 예수님이 그 방에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천사가 그 돌을 굴려놓은 이유는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무덤 안에 예수님의 시신은 더 이상 없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무덤의 돌이 굴려지기 전에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가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천사(5-6절) 


여인들은 무덤이 열려진 것을 보았을 때 예수님께서 부활했다는 생각을 하기보다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지 않았을까 염려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먼저 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며 안심시킵니다. 천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 지칭합니다. ‘못 박히신’에 해당하는 단어는 완료 시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지금도 변함없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여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시신을 찾고 있습니다. 현재 시제 ‘찾는’은 여인들이 안타까운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계속해서 찾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직역하면 ‘그가 여기 계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 하시던 대로”라는 표현은 16:21, 17:23, 20:19의 수난 예고들을 가리킵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여기로 와서 그가 누우셨던 것을 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라는 언급은 그분의 죽음이 실제적인 육체적 죽음이었던 것처럼 그분의 부활 역시 육체적 부활임을 보여줍니다. “오라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누우셨던’으로 번역된 동사는 미완료 시제를 사용합니다. 과거의 계속된 동작을 나타냅니다. 즉 예수님께서 얼마 동안 그곳에 누워계셨다는 것입니다. ‘오라’와 ‘보라’가 과거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장 와서 누우셨던 곳이 비어있음을 당장 확인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당장 믿으라는 것입니다. 여인들은 빈 무덤을 본 첫 목격자들이 됩니다.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소식이 베드로나 요한에게 먼저 전해져야 했을 것 같은데 오히려 두 여인들에게 먼저 전해졌습니다. 당시 여인들은 사회적인 신분이 별로 높지 못한 계층이었습니다. 더구나 막달라 마리아는 전에 일곱 귀신들렸던 여인인데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보잘것없는 여인에게 주님이 먼저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많이 가졌다고, 많이 배웠다고, 무슨 일을 많이 했다고 더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손길을 사모할 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7-10절)  


천사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빨리 가서 두 가지 사실을 전하라고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보다 앞서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을 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하실 것과 갈릴리로 먼저 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인들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장사 현장을 목격하였기에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음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증인들로 인정받지 못하던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들로 세움 받은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들은 여인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반응했습니다. 무서움은 초자연적 현상을 목도한 데서 온 감정이며, 큰 기쁨은 부활의 소식을 들음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여인들이 달려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9절은 ‘자 보라, 예수께서 그들을 만났다’로 시작합니다. ‘만나’우연히 만나는 경우보다 작정된 만남, 운명적인 만남의 경우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을 떠나 달려가는 여인들과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닙니다. 작정하시고 찾아와 만나 주신 것입니다. ‘평안하다’는 ‘기뻐하다, 환영하다’는 뜻입니다. 2인칭 복수 명령형으로 되어있으니 ‘즐거워하라, 기뻐하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미 두려움과 큰 기쁨을 품고 달려가는 여인들을 만나 ‘평안하냐’고 안부를 물으신 것으로 보는 것은 다소 어색합니다. 오히려 자신이 부활했으니 이제는 기뻐하라는 선언과 함께 인사를 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무덤에 계신 주님의 시신을 보는 것으로도 만족했을 여인들이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만났으니 얼마나 놀라고 감격하였겠습니까? 여인들은 주님을 보는 순간 바닥에 엎드려 주님의 발을 붙들고 경배합니다. 발을 잡는 것은 예수님이 영으로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몸을 가지신 분이고, 경배를 드리는 것은 예수님이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을 처음으로 만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무서워말라고 하십니다.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예수님이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지칭하신 것이 놀랍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심으로써 그들과의 관계가 회복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제자들에게 가서 갈릴리로 가라는 말을 당장 전하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을 만나시겠다고 합니다. 왜 갈릴리입니까? 갈릴리는 가룟 유다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의 육신의 고향이요 마음의 고향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처음 부르신 곳이요,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시면서 많은 추억이 깃든 곳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띵 끝까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갈릴리보다 더 좋은 장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내 형제들’이라는 말에는 열한 제자뿐만 아니라 이후 주님의 사역에 참여할 모든 성도들이 포함됩니다. 예수님에게 ‘형제’란 주의 말씀을 따르고 행하는 자를 지칭하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명령(16-20절)


마태복음 28:16-20은 ‘위대한 위임 또는 위대한 사명’(Great Commission)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갈릴리를 떠날 때에는 예수님과 더불어 갔으나 갈릴리로 돌아올 때는 예수님 없이 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갈릴리까지 적어도 삼일 길입니다. 흥분과 아쉬움과 부끄러움이 교차되는 삼일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소식에 흥분하며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생각으로 삼일 길이 지루한지 몰랐을 것입니다. 또 다른 제자들은 예수를 배반한 것을 인하여 심한 자책감을 가지고 그 길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열한명의 제자들이 함께 갈릴리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흩어지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함께 있었을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서 귀한 사명을 주십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산에 대하여 특별한 언급은 없으나 제자들은 이미 그 장소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그 산에 이르자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경배합니다. 그런데 17절에 보니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의심한다’는 말은 주저하거나 망설인다는 뜻입니다. 왜 주저할까요? 자기들 앞에 나타난 사람이 과연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인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섬기던 제자들 중에도 의심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부활을 믿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원문은 ‘주어졌다’는 수동태를 사용합니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예수님은 다니엘의 예언대로 하늘 구름을 타시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 앞에 나아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받는 ‘인자’(단 7:13)가 되셨습니다. 부활 이전에도 예수님께서 권세와 능력을 가지셨으나, 그때는 예수님의 인성으로 인해 제한되었으며 숨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권세를 받으신 것은 부활을 통해서였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예수님께 주어졌다는 표현은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을 통하여 이 땅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수여받은 권세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기 전에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귀한 사명을 주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세 개의 분사와 한 개의 본 동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자를 삼으라’가 본동사요, 가고, 세례를 주고, 가르치는 것은 본동사를 수식하는 분사입니다. ‘제자를 삼으라’가 과거 명령형으로 되어 있으니 지금 당장 제자들을 삼으라는 뜻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저절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를 삼으라’는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우리가 먼저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요 8:31)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종합해 보면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서로 사랑하고,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자를 삼아야 합니까? 세 개의 분사가 제자 삼는 방법을 말해줍니다. 


- 가라


지금까지 제자들은 이스라엘이란 울타리를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민족에게로 가야 합니다. 모든 민족은 모든 시대와 모든 지역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 이유는 마 24:1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모든 족속에게 복음이 증거되는 때가 주님이 다시 오셔서 만물을 새롭게 회복하시고 구원하시는 때입니다. 복음 전파의 대상이 복음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나라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이나, 일터나, 우리의 이웃에 아직도 주님을 전혀 모르거나 잘 모르는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가야 합니다.  


- 세례를 주라 


전도를 받고 복음을 듣는 중에 믿음을 갖게 되고 그런 자들이 이미 믿은 성도들 앞에서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요 구세주로 고백하며 하나님께 헌신의 삶을 살 것을 다짐하며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를 주라’가 현재 분사형으로 되어 있으니 복음을 전하여 믿게 하고 세례를 주는 것이 지속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 가르치라 


예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시몬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자의 삶을 살레 하려면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어떻게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할지, 교회는 무엇이며 어떻게 섬겨야 할지, 어떻게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할지 등에 대하여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다’도 현재분사형으로 되어 있으니 양육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삼는 사역에 동참하는 모든 자들에게 지금부터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약속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마태는 시작하는 1장이나 마무리 짓는 28장이나 ‘임마누엘’을 똑같이 언급합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어제의 실패에 민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를 회복시키기 원합니다. 우리들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되씹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들의 새 출발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들은 남의 잘못을 잘 기억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의 선한 행실들을 기억하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주님이 분명히 다시 살 것을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빈 무덤을 향하여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빈 무덤은 모든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을 증거 할 뿐 아니라 성도들이 주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증거 합니다. 우리의 임무는 복음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전하는 것입니다. 주변에 주님을 알지 못하여 고통을 당하며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이제는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흔적을 갖게 되고 우리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사역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우주적인 권세의 구체적인 실현입니다. 그래서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주님은 죽음보다 강한 그 사랑으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크신 사랑에 붙들리며, 그 사랑에 감격하며 이 마지막 때에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나가면서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토대가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하여 만일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했을 것이요,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사도들의 증언도 헛것이요,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라 증거합니다. 살다보면 시험에 들 수 있고 좌절하거나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붙드시고 이삭을 붙드시고 야곱을 붙드신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붙드시기에 우리가 다시 일어서게 하심을 믿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성령을 통하여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 의 죽음을 준비하고 아리마대 요셉이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부활을 예비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가진 것으로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믿음으로 하는 행동에 주님께서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고 복을 주십니다. 지금도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헌신하는 자들은 사랑의 용서와 치유의 능력을 가지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의 다시 사심을 감사하는 이 부활주일에 주님의 부활의 능력, 치유의 능력, 회복의 능력이 풍성하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