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4-10 15:13
Views
285


예수님의 수난 스토리에는 한편으로 예수님께서 어떻게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견디고 승리하셨는지를 증거하지만,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당연히 예수님 곁에 있어야 할 제자들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던 베드로도, 주의 영광중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요한과 야고보도,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하던 도마도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장 힘들어 하실 때에 아무런 도움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스토리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당연하게 말하는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버리고 도망을 갔던 제자들의 모습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조롱하고 모욕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입술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과 십자가의 능력을 부인하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뜻밖의 인물들이 나타나 제자들의 빈자리를 채우며 예수님의 구속 드라마의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베다니 마리아도 그렇고 지난주 살펴본 구레네 시몬도 그렇습니다. 본문에도 그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마태는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예수님이 운명하신 이후에 일어난 초자연적인 사건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들을 계기로 백부장과 군병들이 신앙고백을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바로 알고 주님에 대한 바른 고백을 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의 삶을 살기를 다짐하면서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고난주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45-50절)


마가복음 15:25에 의하면 예수님은 제 삼시, 즉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패배자의 자리입니다. 거기서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원수들 앞에서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두려움에 떨며 그냥 지나가기를 원하셨던 그 잔을 남김없이 마시고 계십니다.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괴로워하십니다. 정오가 되자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고 오후 3시까지 어둠이 계속됩니다. 보통 그 시간은 하루 중 가장 밝은 때입니다. 더구나 유월절은 만월 때이기 때문에 일식이 생길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어두워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일입니다. 이로써“그 날에 내가 해로 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여”(암 8:9) 라는 아모스의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4장에서 종말에 일어날 환난에 대해 언급하실 때,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24: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어두움은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세상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운명할 때쯤에는 탈진한 상태에서 의식이 없어지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큰 소리를 지르십니다. ‘소리 질러’는 신약에서 이곳에만 사용되었는데 하나님을 향한 강렬한 감정이나 호소를 표출하는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고통에서 나온 절규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나 절망 섞인 부르짖음이 아닙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라는 다윗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시편 22편은 메시아 고난에 대한 시이지만, 후반부에서 승리와 영광을 노래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 신뢰이며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전적인 위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도 부활과 승리의 선포가 이 외침에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승리를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모든 고통을 감당하셨기에 우리가 당하는 고통도 공감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돕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을 인해 승리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외침을 곁에서 들은 무리들은 발음이 비슷하니까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만민을 위하여 죽으시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동정하여 해면에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합니다. ‘신 포도주’는 상당히 시거나 쓴 포도주, 혹은 식초를 물과 섞는 음료를 가리킵니다. 이는 가난한 자들이나 로마 병사들이 주로 마시던 음료입니다. 신맛이 있기 때문에 정신을 깨우는 효과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6:29에서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에서는 포도주에 ‘오이노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언급할 때도 ‘오이노스’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옥수스’라는 다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는 말씀과 상충되지 않습니다. 신 포도주를 마심으로 시편 69:21의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쓸개 탄 포도주는 진통제 성분이 있어 예수님이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온전히 받으시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신포도주는 정신을 들게 하는 것이기에 마십니다. 정신이 든 상태에서 마지막을 맞이하십니다. 예수님의 절규를 듣고 사람들은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간 엘리야가 마지막 고난의 때에 의인을 도우리라’하였는데 그게 사실인지 보자고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들은 보통 며칠씩 시달리다 결국 기진맥진해서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지 불과 여섯 시간 만에 운명하셨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신체적으로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 의학적 사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마태의 증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고통스럽게 서서히 죽어 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며 아직 기력이 남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무슨 소리를 지르셨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하셨고, 요한복음에서는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하셨습니다. “영혼이 떠나시니라”의 헬라어 문장은 예수님이 주어인 능동태 문장으로서 그가 ‘영혼을 내어 보내셨다’라는 뜻입니다. 더 이상 기력이 없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자발적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버리실 권세도, 다시 얻으실 권세도 있습니다(요 10:18). 마태는 예수님이 마지막 운명의 시점까지 자신을 의지적으로 통제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운명하신 후에 일어난 사건들(51-54절)


마태는 예수님이 운명하신 후에 일어난 네 가지 사건들을 언급합니다. 찢어진 성소 휘장, 지진, 성도들의 부활, 그리고 이방인들의 신앙 고백입니다. 이중에 지진과 성도 부활 사건은 마태복음에만 독특하게 언급됩니다. 


- 찢어진 성소 휘장


헬라어 원문에는 51절이 ‘보라’로 시작합니다. ‘보라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일어난 사건들은 중요한 것들이니 주목하라는 의미입니다. ‘찢어지다’는 강한 힘에 의해 찢어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졌다고 할 때에도 쓰였던 동사입니다. 하늘의 갈라짐과 같이 성소 휘장이 갈라졌습니다. 소들이 양쪽에서 당겨도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단번에 찢어졌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성소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구분하는 휘장으로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이 휘장을 열고 지성소로 들어가 자기와 백성을 위해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히브리서 10:19-20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원문에는 ‘성소’가 아니라‘지성소’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혹시 잘못되지 않을까 하여 그 마음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옷술에는 방울을 달아 놓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그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그런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히브리서 저자는 십자가에서 상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바로 그 휘장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상함을 입고 죽는 순간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도 갈라졌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성전에 있는 제사장의 뜰도 넘어가지 못하던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대제사장으로서 참 성소에 들어가신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도 그분의 보혈을 힘입어 담대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완전히 찢어진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옛 성전 시대가 막을 내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지진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졌다는 묘사는 지진을 가리키는데, 지진은 하나님이 원수들을 심판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 나타난 현상입니다(욜 3:16). 지진은 또한 재림의 징조이자, 천지가 없어질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24:7). ‘진동하며’는 ‘세차게 뒤흔들다’라는 뜻인데 바깥에서 흔드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힘에 의해 휘청거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세상의 기초인 땅의 내부가 서 있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유대 지도자들과 성전 자체에 대한 심판의 성격도 띠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 성도들의 부활


지진의 결과로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난 사건은 구약에서 말한 마지막 날에 일어날 징조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자던 성도’는 직역하면 ‘죽었던 그 성도’로 구약의 의로운 백성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마지막 때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사망과 죄와 율법이 지배하는 옛 시대는 지나고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새 율법이 지배하는 새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종말에 부활하리라는 언급이 구약에 많이 나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단 12:2). 무덤을 열고 나오는 현상이 에스겔 37:12에 나옵니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는 성도들의 부활이 예수님이 죽으신 후 부활하시기 전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 후’에 일어난 현상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시라는 바울의 표현과 일치합니다(고전 15:23). 궁극적으로 성도의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 때 일어납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성도의 부활은 ‘예비적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처럼 생명이 돌아와, 장차 있을 영광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자들이 거룩한 성에 들어가는 장면은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돼 자기들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겔 37:14). 마태는 부활한 성도가 예루살렘 성에서 많은 이들에게 분명하고 선명하게 나타났음을 강조함으로써 그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또한 증인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죽은 자의 부활이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요 모든 성도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 이방인들의 신앙고백 


성경에 나오는 백부장들은 대개 기독교에 호의적인 사람들로 그려집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은 예수님께 오실 필요없이 그저 말씀만으로 자기의 하인의 병이 날 것이라고 말하였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8:10).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으나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그는 율법의 정신에 따라 항상 기도하며 구제에도 힘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를 기특하게 보시고 베드로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로부터 말씀을 듣는 동안 고넬료와 그의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7장에도 보면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는 도중 폭풍으로 파선할 때 군병들은 죄수들을 도망칠 것을 염려하여 그들을 죽이고자 하나 호송을 담당한 백부장이 만류하였기에 바울이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에 예수님의 사형 과정을 집행하고 모든 것을 목도한 백부장과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자들이 심히 두려워하며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그들은 조금 전까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조롱하며 십자가에 못 박으며, 그분의 옷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사람들이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이 아니고 이방인들이라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요? 구레네 시몬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남들이 하지 못한 놀라운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의 고백은 제자들의 고백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14:33),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들의 신앙 고백은 천국의 복음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전 세계로 퍼지게 되었음을 예고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55-56절)  


십자가 현장에는 갈릴리에서부터 섬겼던 많은 여자들이 도망한 제자들과 대조적으로 예수님이 죽은 현장에 함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짖음을 들었고 기이한 현상들을 경험했으며,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 목격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돌본 여인이고(눅 8:1-3),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며(13:55),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는 자기의 두 아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했던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20:20)입니다. 앞에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면 이제는 유대인 여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모두가 언급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 것은 인간적인 구분이 없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 우리의 자세 


- 예수님에 대한 바른 고백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형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맡았던 백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지진을 비롯해 놀라운 일들을 보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하던 이들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예수님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진정한 왕이며, 세상 죄를 대신 지신 메시아임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구원을 선물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요 구원자임을 분명히 고백해야 합니다.


- 예수님과 바른 교제를 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서는 순간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죽음을 우리 대신 단번에 담당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의지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죄인으로 보지 않으시고, 의로운 자로 보십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인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해방되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특권과 함께 언제든지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영적 충만함과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 예수님을 바로 전해야 합니다


백부장과 로마 병사들에게 일어난 변화는 앞으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일어난 이러한 깨달음과 변화가 계속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기를 기대하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온 인류와 창조 세계를 향한 구원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신 후 일어났던 이적들이 그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절망 가운데서도 소망이 있다는 복음의 선포입니다. 성도와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땅 끝까지 선포하는데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고통을 받으셨고 고통 가운데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죄의 형벌을 몸과 마음으로 당하셨고 영혼 깊숙이 감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 깊숙이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위해 고통당하시고 죽으신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공생이 기간 중에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더 큰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죄로 인해 저주 받는 이 땅을 진동시키셨으며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었지만, 온 우주를 흔들고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고난의 상징이면서 아울러 우리의 구원의 상징이요 하나님과 죄로 인하여 막힌 담이 무너지고 잃었던 관계를 회복하는 화해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인하여 우리의 죄가 사해지게 되었고 죄의 권세로부터 놓임을 받게 되었고 죄로 인한 심판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 모두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자기 부정과 희생의 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인 우리는 주님과 복음을 위해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혹시 세상을 얻으려고 주님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과 삶을 본받아 섬겨야 합니다. 자신을 부인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져야할 십자가는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베푸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