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주님의 십자가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4-03 14:07
Views
282

지난주일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배우 겸 코미디언 크리스 록이 장편 다큐멘터리 시상을 하러 무대에 올랐을 때, 윌 스미스의 아내에 대한 농담을 던졌습니다. 탈모증으로 삭발 스타일을 한 제이다 스미스를 ‘G.I. Jane’에 비유했습니다. 록이 자기 아내를 조롱한다고 생각한 윌 스미스는 바로 무대에 올라가 크리스 록의 뺨을 때리고 ‘아내를 언급하지 말라’고 소리쳤습니다. 윌 스미스가 뺨을 때리는 장면은 고스란히 전 세계에 생중계됐고, 스미스 아내의 건강을 거론한 록의 농담이 수준 미달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폭행을 한 것은 정당화할 수 없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아카데미 보드에서 진상 조사에 착수하자 윌 스미스는 금요일에 ‘내가 한 행동은 충격적이고, 고통스럽고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고 하면서 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자진 반납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조롱을 당하거나 무시를 당했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하셨습니까? 참으셨나요 아니면 같이 맞받아 치셨나요?


 


본문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 받으신 후 군병들에게 희롱을 당하신 것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 사건을 구약의 예언들과 연결시키면서 무죄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이 예언의 성취임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군의 주이시며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모든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셨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은혜 가운데 택함 받은 우리들이 어떠한 자세로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할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군병들의 희롱(27-31절)


‘이에’는 ‘그때’라는 뜻으로 바로 앞 절의 내용, 즉 빌라도가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준 사건을 가리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넘겨주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님을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갑니다. ‘관정’으로 번역된 ‘브라이도리온’은 총독이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머무는 관저로서 성전 서북쪽에 위치한 안토니아 성채를 가리킵니다. 그곳에 온 군대를 모았다는 표현은 한 보병대가 600명 정도임을 고려했을 때, 문자적으로 꼭 모두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많은 군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군병들은 황제를 흉내 내어 예수님을 꾸밉니다.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벗기다’는 동사는 강탈하듯 옷을 전부 벗겨 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구절은 엄밀히 말해 ‘그를 벗겼다’는 뜻으로 수치를 드러내는 것을 강조합니다. ‘홍포’는  로마 군인이 입는 홍색 망토인데 왕이 어깨 위에 두르던 외투를 상징합니다. ‘입히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씌우다, 두르다’라는 뜻입니다. 군병들이 조롱하는 의미에서 예수님께 홍포를 두른 것입니다.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가시’는 예리하고 단단해 찔리면 깊은 상처를 낼 수 있는 가시를 가리킵니다. 마태는 ‘승리자가 쓰는 관’을 뜻하는 ‘스테파노스’를 사용합니다. 그 가시관은 깊은 상흔을 입으신 승리자 예수님이 쓰신 관입니다. “갈대를 그 오른 손에 들리고”라는 표현은 마태복음에만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왕들은 통치권을 나타내는 ‘규’, 즉 작은 지팡이를 오른손에 잡았습니다. 예수님이 손에 든 갈대는 왕이 드는‘규’를 상징합니다.  


 


이와 같이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왕의 모습을 갖추게 합니다. ‘무릎을 꿇고’는 그리스 로마의 통치자들이 요구하는 존경 행위입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는 “유대인의 왕 만세”라는 공식적 인사말의 패러디입니다. ‘평안할지어다’라는 단어는 ‘기뻐하다, 환호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군병들의 말은 ‘유대인의 왕이여, 기뻐하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홍포를 입고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외치는 것은 그야말로 잔인하기 짝이 없는 조롱입니다. 도저히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없는 사람에게 기뻐하며 웃으라고 명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군인들은 “유대인의 왕이여”라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이 진정 그들에게 왕이 되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힘이 없어 자기들의 놀림감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희롱하여’는‘아이를 대하듯 깔보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빈정거라고 조롱한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그들의 행동은 예수님이 가지신 메시아적 권세라는 것이 일개 로마 군인에게 쉽게 빼앗길 수 있는 하찮은 것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로서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들은 조롱을 마친 후 다시 옷을 갈아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말과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이 왕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가시관은 생명의 면류관이요, 손에 든 갈대는 그분이 겸손의 왕으로 오신 진정한 왕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평안을 잃었지만, 그분의 희생은 우리에게 참 평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받은 멸시와 천대는 그가 참으로 고난을 통해서 왕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32-38)


골고다로의 고난의 여정 가운데 짧지만 아름다운 사건이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도중에 쓰러지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는 가로 막대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세로 막대 기둥은 형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그 무게가 상당했으며, 밤새도록 심문을 당하고 심한 채찍질을 당한 예수님으로서는 그것을 지고 가는 것이 힘에 부쳤을 것입니다. 로마 군인은 대신 지고 갈 사람을 찾았습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이 속국 백성을 노역에 강제로 징집할 수 있었습니다. ‘만나다’는 ‘우연히 발견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지목한 사람이 구레네 출신의 시몬입니다. ‘구레네’는 당시 많은 유대인이 거주했던 북아프리카 도시 리비아였습니다. 시몬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길 가에 있던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내가 뽑혔을까? 참 재수 없는 날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알지도 못하는 죄수의 십자가를 지고 건 것을 인해 자기를 선택한 군인이나 십자가 임자인 예수님 모두를 미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그가 선택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막 15:21)로 소개됩니다. 보통 아버지가 먼저 소개되는데 아들들 이름이 먼저 나온 것을 보면 초대교인들에게 알렉산더와 루포가 잘 알려진 인물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것을 계기로 그와 그의 집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가 바로 내 어머니라 불렀습니다(롬 16:13). 바울이 언급한 루포가 마가복음에 나오는 루포와 동일 인물이라면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지기 전에 무겁게 느껴지나 막상 지고나면 가벼워지고 감격이 오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시몬이 자원해서 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님이 가장 힘드셨을 때 예수님을 도와 그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성문 밖에 위치한 골고다라 부르는 언덕으로 끌고 갔습니다. ‘골고다’는 아람어로 ‘해골’이란 뜻입니다. 라틴어로는 ‘깔바리아’인데 여기서 영어의 ‘갈보리’가 유래했습니다. 처형 장소가 언덕이었으므로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보여 주기에 적합했습니다. 골고다는 인류의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신 제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군병들이 쓸개를 탄 포도주를 예수님에게 주었습니다. ‘쓸개 탄 포도주’가 마가복음에는 ‘몰약을 탄 포도주’로 나옵니다. 쓸개 탄 포도주는 고통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는데, 마태는 고난당하는 의인에 대한 다윗의 시편 69:20-21의 성취를 내다봅니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예수님이 그것을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신 이유는 한편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가 최종적으로 도래하기 전에는 포도주를 다시 마시지 아니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고(26:29), 다른 한편으로는 마지막 만찬과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드러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시는 심판과 저주의 잔을 그대로 마시겠다는 결의를 보여줍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에서 ‘못 박다’는 분사이고, ‘나누다’는 주동사입니다. 따라서 군병들의 행위의 초점을 둔 부분은 ‘나누다’에 있습니다. 십자가 처형 시 사형수의 소유물을 나눈 것은 관습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수난을 암시하는 시편 22:18의 성취입니다. 군병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죽음에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었으므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입니다. 군병들은 골고다에서 예수님을 지켰고 54절에서는 예수님을 추종하는 자들이 시체를 훔쳐 갈 것에 대비해서 예수님의 무덤을 지킵니다.


 


“죄패를 붙였더라”에서 ‘죄패’로 번역된 단어는 ‘죄목, 혐의사실’등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입니다. 죄패를 그 머리 위에 붙였다는 표현은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 형태가 T자형이 아니라 전통적인 십자형임을 말해줍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은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정치적 반역을 일으킨 자로 정죄된 것임을 보여 줍니다. 이는 로마 체제에 반역을 도모하는 자들에 대한 공개적 경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뿐 아니라 온 세상에 참된 평화를 가져올 왕이십니다. 마태는 ‘이 때’를 사용해서 십자가 처형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폭력으로 로마 군병에 대항한 죄로 잡힌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강도와 같이 대접받았음을 의미하며 이사야 53:12의 성취입니다.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세배대의 두 아들은 좌우편에 앉기를 원했으나 유대인의 왕인 예수님의 좌우편은 죽음의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39-44절)


‘지나가는 자들’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자들을 가리킵니다. ‘모욕하다’는 ‘비방하다, 매도하다’라는 뜻의 동사의 미완료 시제로, 순례자들이 끊임없이 비방하고 모욕했음을 말해 줍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모욕하고 고개를 흔든 모습은 시편 22:7의 성취입니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자기 머리를 흔들며”는 예수님의 죽음이 자기들 보기엔 정당했다는 동의의 끄덕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겠다고 했다는 거짓 증인의 말을 언급하며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성전을 허물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셨지 자신이 직접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이 구문을 직역하면 ‘너 스스로를 구원하라,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가 됩니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과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은 동일한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같은 사건을 다루는 다른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한 문단에 두 번 등장하는 곳은 예수님의 광야 시험 기사(4:3-6)와 여기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마태가 예수님의 광야시험과 십자가에 달려있는 예수님의 상황을 동일한 시험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광야시험 기사에서 사탄은 두 번에 걸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라고 하며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4:3,6). 이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여 지나가는 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자신을 구원하는 기적을 행할 것을 요구합니다. 무리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사탄의 도구가 되어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능력을 발휘해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라는 사탄의 유혹은 주의 뜻에 순종해 진노의 잔을 마시리라는 예수님의 겟세마네기도(26:39)와 대조를 이룹니다. 


 


이어서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도 조롱을 합니다. 그들은 유대 지도자들이면서도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메시아의 대속적 죽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영적 소경들입니다. “그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별 생각 없이 한 그들의 말은 진리였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남을 구하는 일은 했으나 자기를 위해서는 어떤 능력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신을 구원할 수는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한 것은 못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온갖 고통과 모욕 속을 참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칭호는 이사야 44:6과 스바냐 3:15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붙여진 칭호로, 하나님의 권위와 함께 그분의 구원 의지를 나타냅니다. 그 의미를 이해 못하는 종교지도자들은 그 칭호로 예수님을 빈정거립니다. 그들의 조롱은 사실 눈먼 자신들을 향한 조롱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믿겠노라’하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근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기적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끝까지 진노의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3인칭 명령형으로 ‘하나님이 그를 구출하시게 하라’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심지어 함께 죽어가는, 좌우에 달린 강도들조차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 우리의 자세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쫓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대적하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무리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병들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과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가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오히려 그분이 누구신지를 드러냈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죄목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죄 패를 붙였지만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보내신 참된 왕이십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은 구원하면서 자기 자신은 구원할 수 없느냐고 조롱했고 심지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모욕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악의에 찬 마음으로 내뱉은 이 말은 예수님의 신분을 증명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모든 인간의 경배를 받으셔야 마땅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내리셔야 하는 모든 진노를 예수님에게 쏟으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가기만 하면 죄 사함을 얻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요 참 구원자이심을 드러냅니다. 


 


-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부활의 영광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꼭 거쳐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즉 십자가의 멸시와 고통, 그리고 죽음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세상의 부요함과 대접만을 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주님이 가신 길과 정반대의 길을 가면서 제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쉬운 길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쁨으로 걸어갈 수 있는 까닭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지키려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조롱받고 미움 살 일도 있지만,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장차 다가올 영광에 비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길을 간다고 인생의 고통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이겨야 할 어려움과 고통이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과정에서 근신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분별력을 가지고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고통을 이기신 예수님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높여 주시고 영광을 누리게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하늘의 상급을 주시고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나가면서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해를 끼치던 무리들의 행동은 다 성경에 예언되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준 행동이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전 삼십에 판 것도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관련된 자들의 죄가 면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습니다. 선택은 그들이 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할 때 언제 어떻게 사탄의 도구가 되어 우리의 언행 심사로 하나님을 대적할 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우리 주님이 재림하실 때 천사들이 나팔을 불고 성도들이 부활하여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그 약속이 우리에게 남아 있을 지라도 자동적으로 우리가 재림의 주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께 온전한 신앙고백을 하고 우리의 삶이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며 주님이 예비하신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5). 우리는 주님이 가신 십자가를 가야하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려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에 기꺼이 동참해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성령님의 인도함으로 받으며 고난을 각오하고, 믿음을 잃지 말고 깨어 있으면서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담대히 나아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