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종의 멍에를 메지 마라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3-27 15:30
Views
301

제가 진해에서 근무하던 1979년에 12.12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하나회를 중심으로 일부 정치군인들이 혼미스러운 정국을 틈타 쿠테타를 일으켰습니다. 연구소에 파견된 보안대 중사가 갑자기 목에 힘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전두환 소장이 보안사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계급이 높은 부장이나 실장들도 그 앞에서는 눈치를 볼 정도였습니다. 한 달 쯤 지나자 부장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시국이 시국인 만치 당분간 퇴근 시간을 저녁 6시에서 9시로 미룬다는 것입니다. 연구원들 절반가량이 총각들이었는데 갑자기 저녁 시간을 자기들 마음대로 보내지 못한 데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80년 여름이 되자 본부 기획조정실에서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본 연구소는 국가에 대하여 충성하기 위하여 자진해서 휴가를 반납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부의 눈치를 보는 몇 사람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했습니다. 숨이 막히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그 시스템 안에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직장 동료들이 모여서 자주 부르던 노래가 있었는데, 당시 방송이 금지된 김민기의 ‘바람과 나’였습니다. 저는 운동권 출신이 아니었지만 그 노래를 부르면서 바람과 같이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끝없는 바람 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가는 아 자유의 바람 ...”저는 계약기간이 끝나는 82년 2월이 되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유학준비를 하였습니다. 벌써 40년 전의 일입니다.


 


러시아가 사흘 만에 석권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한 달 넘도록 우크라이나가 끈질기게 저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러시아가 도리어 밀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는 민간인 거주 지역까지 무차별하게 포격을 하고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전세가 불리해지면 러시아가 생화학무기, 심지어 핵무기까지 사용할 모른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3차대전이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왜 이렇게 잘 싸우고 있습니까? 물론 서방의 지원도 무시할 수 없지만 이미 자유 민주주의의 맛을 본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열망을 꺾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정학적인 영향으로 수백 년 동안 외세의 간섭을 받으며 독립국가로 존재하지 못했던 우크라이나가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 수 없다며, 그동안 누리던 자유를 빼앗길 수 없다며 결사항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왜 미국에 오셨습니까? 자녀교육을 위해? 돈 벌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미국에 살고 있으니 참 자유를 누리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개인적인 속박이나 사회적인 속박보다 더 큰 속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담 이래 온 인류를 눌러온 죄의 속박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많은 인간들이 자기가 죄인임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다가 죄 가운데 멸망을 당해왔습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요 그 믿음을 인하여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를 인하여 자유함을 얻은 성도들이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 살펴보면서 우리 모두 그리스도께서 은혜로 주신 자유를 제대로 누리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1-4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니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의 뜻이 법이 되어 무법자로 살아갑니다. 아담 이후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관계가 단절되었고 그 결과 인간의 성품도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었기에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시키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자유케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유함을 얻은 갈라디아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믿음으로만 부족하고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기는커녕 도리어 복음 안에서 얻은 자유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더 완벽한 종교인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얻었다고 우리 하고 싶은 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절제되지 않은 방종은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몇 번 성경공부에 참석한다고, 직분자가 된다고 바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는 선언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졌음을 말하며, 우리가 더 이상 죄, 율법, 죽음과 같은 것에 매이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 굳건하게 서라 


바울은 죄의 속박에서 자유함을 얻은 후에 다시 죄의 종노릇 하지 않기 위하여 굳건히 서라고 권면합니다. 이미 복음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일지라도 그것을 굳게 붙잡지 않으면 다시 종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굳건히 서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참 제자가 아니기에 진리를 모르고 그들이 종의 상태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존심 강한 유대인들이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래봬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하면서 자기들은 당당한 신앙의 자유인임을 주장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죄의 종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참된 자유이며 참 제자의 삶입니다. 사도 바울도 ‘믿음에 굳게 서라’(고전 16:13) ‘한마음으로 서서’(빌 1:27) ‘주 안에 서라’(빌 4:1)라고 권면했습니다. 요약하면 그리스도를 인하여 자유함을 얻은 성도들은 주 안에서, 믿음으로, 다른 성도들과 한 마음으로, 그리고 주님의 말씀 안에 굳게 서야 합니다.  


 


-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종에서 해방된 자가 자원해서 다시 종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누구나 지긋지긋한 종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원합니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종의 멍에를 다시 메는 경우가 있습니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것은 옛 언약과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인의 지위를 버리고 노예의 지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율법은 유대인의 조상들이 메던 ‘멍에’입니다. 율법의 멍에를 메면 성령의 지배 아래 살지 못하고 율법과 죄의 굴레 아래 매여서 살게 됩니다. ‘메지 말라’는 현재명령형입니다. 메는 것을 당장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다시 율법의 종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성경에서 ‘보라’고 할 때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하려고 할 때입니다. ‘나 바울’이란 표현은 바울 자신의 사도됨과 그리스도로부터의 위임과 자신의 사역의 신실함과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하여 말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우들이 할례를 받으려 한 것은 영적인 유익을 얻고자 한 것이지 손해를 보려고 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할례는 그들에게 자유함을 주기는커녕 더 속박을 주었습니다. 만약 갈라디아 교회가 율법의 행위인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유익을 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능욕하는 것이며 믿음을 버리는 행위입니다. 바울은 할례도 율법의 일부이므로 할례를 받으면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할례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613개나 되는 계명 전체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무를 가진 자라’본래 ‘빚진 자’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빚진 자가 되어 지키기 불가능한 의무를 지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신자는 율법에 억눌린 빚진 자의 삶에서 벗어나 은혜의 빚을 진 자유자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은 그리스도를 믿더라도 할례를 받아 유대인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라도’라는 뜻입니다. 물론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거나 은혜에서 떨어지려고 시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할례를 받음으로써 더욱더 그리스도를 얻고 은혜도 얻고 유익도 얻으려 했을 것입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인간이 경험하게 될 결과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5-6절)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 논쟁이 무익하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할례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죄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죄사함 받았기에 이제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갈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믿는 이들의 소망은 결국 의에 이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그분의 약속대로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고 말했습니다. ‘의의 소망’이란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아 영광과 존귀와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롬 2:5-7). 그런데 어떻게  그 의에 이릅니까? 바울은 여기서 믿음에 의하여(by faith) 성령을 통하여(through the Spirit)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 믿음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하며 우리를 친히 도와주실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의의 소망이 이루어집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은혜를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구약 시대에 할례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을 표시였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세례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의 징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 효력이 없고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만이 의미가 있게 되었습니다. 


 


적은 누룩을 조심하라(7-12절)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에게서 받은 진리대로 행하면서 지금까지 믿음의 경주를 잘 했다고 칭찬합니다. 여기서 ‘달음질’은 시제가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을 나타내는 미완료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진리의 말씀을 듣고 복음에 순종해 열심히 달려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에게 의해 미혹되어 달리던 길을 멈추게 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하느냐고 추궁합니다. ‘막다’는 ‘충돌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마치 빠르게 달리던 자동차가 충돌해서 멈추는 것처럼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 복음과 충돌해 멈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막다’가 현재시제로 되어 있어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일들이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할례를 받으라는 유대주의자들의 권면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와 신약의 복음 진리에 전혀 맞지 않고 도리어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가르침이 은혜로 성도들을 부르신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여기에 사용된 ‘권면’이란 단어는 설득에 가까운 권면을 뜻합니다. 가만히 들어 온 거짓 선생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의 진리에서 돌아서도록 끈질기게 설득해서 멈춰 서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교활하여 은밀히 파고 들어와 역사하다가 나중에는 복음 진리 전체를 파괴합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위협을 ‘적은 누룩’에 비유하며 경계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지금은 비록 소수지만 그들의 가르침이 온 교회를 부패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 16:6).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처음에 어떻게 진리의 삶을 시작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잠시 유대주의자들의 미혹을 따라갔을지라도 곧 돌이키게 될 것을 ‘주 안에서’확신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을 혼란시키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요동하게 하다’라는 동사는 1:7에서 ‘교란하여’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단적인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해서 믿음을 버리게 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받다’는 단어는 짐을 ‘짊어지다, 부담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한 번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 복음으로 갈라디아 교회를 혼란케 하는 자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입니다. 바울은 영적인 지도자로서 성도들이 보지 못하는 적은 누룩을 보고 미리 경계하고 가르치고 치료하기 위해 수고하는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했다면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만일 그렇게 했다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시에 유대주의자들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가에는 관심이 없고 할례를 전하는 가에만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전하면서 거기에 할례를 더하면 그가 제대로 전하고 있다고 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순수하게 복음만을 전하면 핍박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분위기를 알면서도 바울은 핍박을 받지 않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할례의 교리를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할례를 강요하며 갈라디아 교회를 요동시키는 자들을 향해 그들 자신이나 스스로 베어지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갈라디아서를 읽을 가능성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과 교회 안에서의 교제를 그만두라는 요청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의 반대와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복음 진리를 수호하고 성도들이 믿음 위에 굳게 설 수 있도록 자신이 어떠한 핍박을 당한다 해도 정확한 진리를 제시하며 반대자들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 우리의 자세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를 지속적으로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율법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만약 신자가 자신의 윤리적 행동과 도덕적 삶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의롭게 만든다고 생각해서 복음과 상관없는 율법주의적 삶을 산다면, 죄의 형벌을 대신 받고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고 은혜로 주어진 구원을 잃어버릴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성도의 삶이 불신자들의 삶보다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윤리적인 행동 자체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기에 하나님이 기특해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주의와 윤리주의는 율법주의의 또 다른 변형이며, 이런 것들은 복음을 다시 율법으로 환원시키는 부패한 누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믿음으로 인한 것이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의 자유와 율법의 행위는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벗어나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가진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강박감, 초조감, 열등감을 인하여 무리수를 던집니다. 그러다가 낭패를 당합니다. 반면에 자유함을 얻은 사람들은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을 알기에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유자의 삶이나 사역은 열매가 풍성하게 맺힙니다.  


 


-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는 결과 그리스도에서 끊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며 하나님의 정죄의 대상이 됩니다. 반면에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합니다. 성령 안에서 영원한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가 붙잡아야 할 대상임을 잊지 말고 은혜를 따라 행해야합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의를 소망하고 나아갑니다. 그 믿음과 소망을 우리의 삶에서 사랑으로 나타내려고 합니다. 종교적인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우리의 행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돌아가셨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받은 바 주님의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나귀 주인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는 예수님께 자기의 나귀를 드린 것처럼,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아낌없이 부어드린 것처럼 자신의 것을 주님께 자발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인하여 자유함을 맛본 성도들의 헌신의 모습입니다.  


 


나가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의 하나님의 아들 됨의 특권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자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새롭게 된 것을 확신하며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을 신뢰하며 주 안에 굳게 서기를 힘써야 합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라고 도전합니다. 또한 이 자유는 육체의 기회를 삼는 자유가 아니라 사랑의 실천을 위한 출발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하지만 아무리 적은 누룩이라도 복음의 자유를 부정하면 단호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적은 누룩과의 타협이 순수한 복음의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것으로 채움 받아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리면서 주님이 주신 자유함을 누리며 전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