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약속을 따라 낳은 아들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3-20 16:06
Views
263

이스라엘은 언약 백성입니다. 그들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언약을 지키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됩니다. 언약은 쌍방 간의 합에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양쪽이 그 언약을 반드시 지켜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언약을 일방적으로 깨뜨렸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새언약 백성을 만들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새언약 백성이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갈라디아에 와서 생명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믿은 갈라디아 교인들 중에 유대주의자들의 미혹을 받아 이미 효력이 다한 율법주의를 붙들려고 했습니다. 본 단락은 참 하나님 백성의 성격을 규정하는 바울의 논증들의 결론 부분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과 같은 이방 기독교인들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후손이라는 것을 논증합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언약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본문을 통해 언약 백성이라는 정체성에 걸맞은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창세기에 있는 사라와 하갈 이야기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는 사건을 취급하는 15장과 17장 사이에 위치한 16장은 이스마엘의 출생을 인하여 아브라함이 언약을 깨뜨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라는 점이 강조됩니다. 하갈 앞에 ‘여종’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습니다. ‘여종’은 일반적으로 부유한 여인에게 소유물처럼 주어지는 종을 의미합니다. 애굽 출신이었다는 언급을 통해 하갈은 아마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갔을 때 바로가 아브라함에게 준 선물 가운데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12:2), “네 자손을 땅의 티끌과 같이 많게 하리라”(13:16), “네 자손이 하늘의 별들과 같이 많아지리라”(15:5) 하나님께서 자손에 관한 약속을 여러 번 하신 것을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자기의 몸은 늙어가고 아이를 낳을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져간다고 생각하니 점점 조급해졌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기력이 더 떨어지기 전에 자기의 젊은 여종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주어서라도 아들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출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사라의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과 자기 제안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물론 기다리는 것이 쉽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지 못하고 섣불리 행동하다가 곤란에 처합니다. 왜 사라에게 이러한 고통을 주셨나요? 하나님께 불가능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사 59:1). 아브라함의 나이가 많아지고, 사라의 경수가 끊어졌다할 지라도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뜻을 이루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지금 사라가 자기의 여종을 아브라함에게 주려고 하는 것은 그 당시 관습으로 볼 때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택하는 방법이라고 하나님이 용납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하여 후사를 가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을 들으니라”는 표현은 단순히 들은 것이 아니라, 귀 기울여 듣고 순종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85세였습니다.  


 


사라는 그렇게도 아이를 갖기 원했지만 몇 십 년이 지나도 아이를 갖지 못했는데 하갈은 아브라함과 동침 한 번으로 금방 임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갈이 종의 신분을 망각하고 ‘자신의 잉태’함을 깨닫는 순간 자기의 여주인을 멸시했습니다. 하갈이 자기를 무시하니 사라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쓴 사라를 하나님이 잠시 낮추신 것입니다. 사라는 즉시로 아브라함에게 가서 따집니다. 내가 저 하갈 때문에 모욕을 당하다니 기가 막혀서. 그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해. 그래도 내가 우리 집안을 생각해서 하갈을 당신에게 주었는데 저게 임신했다고 나를 멸시하다니 하면서“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자신의 억울함을 심판자이신 여호와께서 해결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갈을 이용하는 계획을 누가 세웠습니까? 사라. 그런데 사라가 도리어 역정을 내며 아브라함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기세등등한 사라의 말에 아브라함은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여자들이 신경전을 벌이는 골치 아픈 상황에서 자기는 빠지려고 했습니다. 당시 법에 의하면 남편의 아이를 낳은 여종은 쫓아낼 수 없었습니다. 물론 여종은 자기 여주인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묵인 하에 사라가 하갈을 학대하니 하갈이 임신한 몸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왜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음대로 행동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꿰니 줄줄이 틀어졌습니다. 애초에 하갈을 첩으로 줄 때 거절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갈등이 벌어진 후에도 지혜롭게 행동하지 못하고 사라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배신한 것입니다. 사라도 하갈을 첩으로 줄 때는 언제이고, 이제는 하갈을 복수의 대상으로 삼아 학대하였습니다. 그렇게 집을 나갔던 하갈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다시 아브라함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1장을 보면 이삭이 젖을 떼는 날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다가 하갈 모자가 완전히 아브라함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바울의 논증은 방금 나눈 이야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21-23절) 


갈라디아에 온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첫 번째 아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유업은 유대인들의 조상을 이삭을 통해서만 온다. 둘째로, 할례와 율법 준수의 정당성을 무너뜨림으로써 유대교 중심적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은 바울의 복음은 ‘이스마엘 계통의 복음’에 불과하다. 셋째로, 창세기 21:10의 명령대로 그러한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그를 추종하는 이방 기독교인들을 내어 쫓아야만 한다. 이렇게 유대주의자들은 바울과 그의 복음을 좇는 이방 기독교인들을 여종인 하갈과 이스마엘에 연계시킨 반면, 사라, 이삭, 유대인들, 모세 율법, 시내산, 예루살렘, 예루살렘 교회, 그리고 자신들을 아브라함의 약속을 유업으로 이어받을 구속사의 적통으로 연계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의 실체를 거침없이 드러냅니다. ‘비유’로 번역된 ‘알레고리’는 ‘풍유’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구체적인 대상에 빗대어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바울은 헬라 문화에 익숙한 갈라디아 성도들을 위해 알레고리로 설명한 것입니다. 바울의 어조는 사뭇 격앙되어 있으며 논쟁적입니다. 논쟁의 대상은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된 갈라디아 교인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관련한 두 아들의 이야기로 논증을 시작합니다. 하나는 이스마엘로서 육체를 따라 여종 하갈에게서 났고, 다른 하나는 이삭으로서 약속으로 말미암아 자유자인 여자 사라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동일한 아버지를 두었지만 이스마엘과 이삭의 신분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당시에는 모친의 신분이 자녀의 신분을 결정지었기 때문입니다. 하갈은 사라의 여종이었기에 이스마엘도 종의 신분을 지녔습니다. 이삭은 비록 이스마엘보다 나중에 태어났지만 주인의 아들이었습니다. ‘여종’으로 번역된 ‘파이다스케’는‘여자 노예’를 가리키는 단어로, 특별히 젊고 어린 여종을 지칭합니다. ‘젊은 여종’이라는 점은 나이 많아 아이를 잉태할 수 없었던 사라의 상황과 대비됩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통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의 노력으로 후사를 얻으려 했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반문합니다, 이것은 율법을 듣고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그들에 대한 책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 즉 규정이나 전통이나 의식을 엄격하게 준수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인정받으려 하는 자들은 율법을 지킴으로는 결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참자유에 이르지 못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저주 아래 가둘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영생에 이르는 참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유업을 잇는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율법과 언약을 대조하는 바울은 율법의 전통을 이스마엘에게서 찾고, 언약의 전통을 이삭에게서 찾습니다. 이삭이 이스마엘보다 세상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에 상속자의 지위를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 약속을 따라 사라의 아들로 태어난 이삭이 아브라함의 유업을 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유 있는 여자’는 율법이나 육체가 아닌 약속과 성령으로 난 자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다시 말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태어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스스로 약속을 이루려 한 잘못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지 못한 연약함의 결과로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육체의 자녀입니다. 사라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이삭을 낳았듯이 신자들도 약속과 성령으로 말미암았으므로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비유의 해설(24-28절)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이 붙들고 있는 구약의 말씀들을 통해 그들의 허구성과 무지함을 드러내려 합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의 출생 이야기는 유대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어머니를 ‘두 언약’으로 표현한 것은 유대주의자들에게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던 유대인들은 아직까지 ‘한 언약’, 즉 모세의 시내산 언약만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언약은 시내산에서 유래해 아이를 낳은 하갈과 연결됩니다. 이스마엘은 비록 그가 아브라함의 혈통이라 할지라도 종의 신분입니다. 바울은 이를 ‘육체를 따라 났다’라고 표현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바울이 하갈로부터 이어진 종의 멍에를 이스마엘에 이어서 지명에 연결시켰다는 점입니다. 종살이를 대물림하는 하갈의 신분은 시내산으로부터 지금 있는 예루살렘에까지 이어집니다. 물론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과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생각 속에서 시내 산은 예루살렘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습니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율법이 규정하는 절기, 제사, 제물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율법의 상징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하갈과 일치시키는 이유는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자유자의 어머니를 “위에 있는 예루살렘”과 연결합니다. 이 표현은 하갈과 연결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대조됩니다. “지금 있는 예루살렘”은 율법 지키기를 요구하는 유대인들의 중심지입니다. 이 예루살렘은 모세가 율법을 수여했던 시내산과 의미상 동일하며, 율법의 종들을 낳는다는 점에서 하갈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에 상응하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유를 상속한다는 점에서 이삭의 어머니 ‘사라’를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도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이 등장합니다(계 21:10). 히브리서 저자도 성도들이 나아가는 곳이 모세가 율법을 받은 산이 아니라 시온산이며, 동시에 성도는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음을 말합니다(히 12:22).


 


그러면서 바울은 이사야 54:1을 인용합니다.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원래 이 말씀은 바벨론에 포로된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을 예언하는 것이지만,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죄악과 죽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를 구속해 주실 것을 아울러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두고 슬퍼하는 시대는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이 태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잉태하지 못한 자와 남편 없이 홀로 된 자를 향해 위로를 합니다. 하갈과 사라의 형편을 모두 끌어안습니다. “잉태하지 못한 자”를 위로하는 이사야 본문의 전반부는 사라를 가리키며, “홀로 사는 자”를 위로하는 후반부는 하갈을 가리킵니다. 이와 같은 인용은 갈라디아서에서 궁극적으로 바울이 전달하려고 하는 구원의 깊은 경륜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자유자인 사라의 자녀도, 종인 하갈의 자녀도 긍휼히 여기시고, 모두 믿음으로 구원받아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라는 말이 유대인들의 귀에 매우 거슬렸을 것입니다. 유대인을 하갈의 자녀로 격하하고, 이방인을 사라의 자녀로 격상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약속을 따라 아브라함과 이삭의 자녀들을 낳습니다. 약속을 따라 오신 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 약속의 자녀가 됩니다. 할례나 율법 같은 눈에 보이는 육신의 증거를 만족시키지 못해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공로를 쌓아서 하나님 앞에서 합격하여 떳떳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믿는 믿음으로 자유하게 됩니다.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29-31절)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임을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스마엘과 이삭을 둘러싼 창세기의 이야기를 계속 언급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라고 합니다.  창세기에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다고 언급되어 있을 뿐 박해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후대 유대교 전승을 바울이 인용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구절은 당시 갈라디아에서 유대인들이 헬라인들을 부추겨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음을 암시합니다. 아마도 이 박해가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하는 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하갈과 이스마엘이 자유자의 신분과 유업을 함께 얻지 못하고 쫓겨났음을 다시금 확인하며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잇게 하실 것입니다(창 21:12).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말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으로 태어난 은혜의 자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상속자들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속의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나(출 19:5-6; 24:7) 우상 숭배를 하며 그 언약을 지키지 않은 까닭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새언약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31:31).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새 언약을 맺기 위한 제사였습니다. 옛 언약이 율법을 주는 언약이었다면, 새 언약은 성령을 주는 언약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27). 성령을 주신다는 약속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모인 교회를 새 언약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롬 2:28-29). 따라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육체의 혈통을 따라 이스라엘이 된 유대인들이 아니라,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옛 성전의 유효기간은 끝났고 새 성전인 교회가 옛 성전을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4장에 걸쳐 바울은 ‘누가 아브라함의 자녀인가’라는 정체성 문제를 다루어 왔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가 의롭다 함을 받았을 때는 할례를 받으라는 계명도 없었고 율법은 그로부터 430년 후에나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의롭다 함을 얻은 아브라함의 신분을 규정하던 유일한 요소는 믿음뿐이었습니다. 바울은 29절에서 ‘약속으로 말미암아 난’이란 표현을 ‘성령으로 따라 난’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해석합니다. 아브라함 자손의 정체성을 말할 때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믿음과 성령’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의 자녀’요, 성령을 따라 난 ‘성령의 자녀’며, 옛 세상의 지배세력에서 벗어난 ‘자유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믿음을 따라 살아야 하고(2:20),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하며(5:16), 자유를 따라 사랑으로 종노릇해야 합니다(5:13). 신분은 행위의 유형을 결정합니다. 우리 모두는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백성, 약속의 자녀라는 신분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분에 걸맞은 행위가 뒷받침되려면 믿음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면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바울이 4장 후반부를 통해 말하려는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아브라함의 참된 자녀가 될 목적으로 율법에 예속되려고 시도할 때 오히려 아브라함의 약속에서 배제되고 추방당한 여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의 신분에 속하는 것이며, 바울이 전한 복음 안에 머무는 자는 자유자인 사라의 계보와 약속을 따라 태어난 이삭의 신분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을 따라 그분의 능력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자들, 곧 그리스도와 성령의 오심으로 주어진 새 언약을 자신의 신분으로 삼는 자들만이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이자 참된 언약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르기 전, 잠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후견인에 불과했습니다.  약속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율법은 그 역할을 다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는 자는 누구나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참자유와 함께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가 됩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