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3-13 14:15
Views
297

그리스 신화에 보면 하루는 허큘리스가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괴물이 나타나 그를 공격합니다. 그는 가지고 있던 몽둥이로 그 괴물을 두들겨서 물리치고 계속 길을 걸어가는데 이번에는 먼저보다 삼사 배나 더 커져서 다시 덤벼듭니다. 허큘리스는 몽둥이로 계속 때리는데 때리면 때릴수록 괴물은 더 커집니다. 그때 아테네라는 지혜의 여신이 허큘리스에게 나타나서 그 괴물의 이름은 ‘다툼’인데 그냥 못 본척하고 놔두면 저절로 작아져서 힘을 쓰지 못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허큘리스는 그 괴물을 대적하지 않고 피해갔더니 잡아먹을 듯이 위협하던 괴물이 점점 작아져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인간관계가 흐트러지면 상대방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 정도가 지나치면 비난하게 됩니다. ‘비난’이라고 하는 것이 꼭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 괴물과 같습니다. 대적하면 할수록 더 커집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비난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비난을 당할 때 받는 상처는 크고 아픕니다. 어떤 때는 정신적인 충격이 커서 육신적인 병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난을 당하면 곧 맞서서 해명을 하거나 같이 비난을 합니다. 그런데 비난을 하면 할수록 상황이 진정되기보다 당사자들 사이에 골이 더 깊어집니다.   


 


본문을 보니 개척 목사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의 관계가 어색해졌습니다. 갈라디아에서의 바울의 사역이 위기를 맞았습니다. 성령 충만하고 누구보다도 복음을 많이 전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하여 애를 쓰던 바울이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부족한 우리들은 얼마나 더 어려운 상황에 빠지겠습니까?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은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과 같은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그리고 자주 일어납니다. 금실이 좋던 남편과 아내 사이에, 다정했던 친구 사이에, 함께 섬기던 목사와 교인이나 교인과 교인 사이에, 한 마음으로 시작했던 동업자 사이에 어떤 이유로 해서 관계가 안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보기 싫으니 관계를 끊어버립니까? 보아도 모른 척 무시하거나 슬그머니 피합니까? 겉으로는 일체 내색을 안 하면서 복수할 기회를 찾습니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성경적입니까? 바울은 대적하는 무리를 향해 분노하거나, 그동안 갈라디아에서 한 수고를 생각하며 좌절하거나 갈라디아에서의 사역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감당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명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태도 변화(12-16절)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을 형제라고 부르며 여전히 그들에 대한 관심을 보여줍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온 것은 복음 전파를 통하여 갈라디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요 유업을 이을 상속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의 우월감이나 인간적인 자랑은 다 버리고 철저하게 갈라디아 사람들과 같이 됨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성육신의 정신을 실천했습니다. 자기의 기득권과 상대방에 대한 특권의식을 내려놓은 사람만이 진실을 담아 설득할 수 있고, 공동체의 유익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문맥을 고려할 때 이 명령은‘나의 신앙과 삶을 닮으라’는 뜻이 아니라 ‘나처럼 율법 아래 얽매이지 말고 복음 안에서 자유하라’는 권고입니다. 바울은 엄격한 율법주의자였으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 아래 있고 더 이상 율법에 속박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구하다’의 본래 뜻은 ‘간청하다, 간곡히 애원하다’입니다. 누가복음 5:12에서는 한 나병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엎드려 간곡히 구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9:38에서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아들의 치유를 간곡히 빌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31에서는 제자들이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에서 나옵니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의 미혹을 받아 달라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무익한 율법주의로 돌아가지 말라고 간곡하고 애절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과거에 있었던 일을 떠올립니다. 그가 갈라디아에 와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 ‘육체의 약함’이 있었습니다. ‘육체의 약함’은 ‘질병’이라는 뜻입니다. 직역하면 ‘질병을 앓고 있는 중에’가 됩니다. ‘육체의 약함’은 고린도후서에서 말한 ‘육체에 가시’(12:7)와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사탄의 사자’라고 부르며 그것이 떠나가기를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고후 12:7-8).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를 의역하면 ‘내 질병이 너희에게 시험이 되었지만’이란 뜻입니다. 그때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에게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첫째,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업신여김’은 ‘멸시함’의 다른 말입니다. 둘째, 버리지 않았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단 한 차례 사용된 이 동사는 ‘침을 뱉다’‘토해 내다’라는 의미로, 은유적으로는 ‘경멸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셋째, 영접했습니다. 이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사자’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여기며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곡해하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애타는 심정으로 “너희의 복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말은 ‘너희가 그토록 나를 존귀하게 여기고 기쁨으로 영접해 주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는 의미입니다. 자기에게서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는 눈이라도 빼어 줄 것처럼 보였던 갈라디아 사람들이 지금은 왜 자신과 원수가 되었는지 반문합니다. 바울은 현재의 껄끄러운 상황과 과거 갈라디아 교인들과의 친밀했던 때를 대비시킵니다. ‘그럴 수 없음’을 전제하며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묻습니다.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에서 ‘참된 말을 하다’는 현재분사로 되어 있기에 바울이 지금 하고 있는 말도 진실된 메시지임을 암시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미혹하는 자들의 말은 따라가면서 사랑하고 참된 말을 하고 그들을 위하여 수고를 했던 바울을 원수같이 여기는 그들의 태도를 안타까워합니다.  


 


대적자들의 불순한 동기(17-18절)


바울이 말합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참된 복음은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게 합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 교인들로부터 참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떼어 놓아 자신들만을 따르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에게 보였던 이전의 희생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을 버리고 바울을 대적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일을 통해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열심은 오직 그 은혜에 감격하여 드리는 자발적인 헌신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18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만이 아니라, 항상 선을 위해 너희에게 열심을 내었으니, 이것이 선하였도다’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다짐(19-20절)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순수한 의도로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비록 일부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떠났지만 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처럼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언제까지나 모든 것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여전히 영적인 자녀로 여기고 있습니다. 나의 영적인 부모는 누구인지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한국 교회는 아비와 자녀의 관계보다는 목사와 교인으로서의 관계를 더 강조해왔습니다. “나의 자녀들아”바울의 이 부름은 저에게 얼마나 도전을 주는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는 영적인 아비가 필요합니다. 그 아비의 사랑과 돌봄을 받고 영적으로 자라야 합니다. 나는 과연 교우들을 바울과 같이 해산하는 수고를 치르면서 영적인 아비로서 자녀들의 성숙을 돌보았는가? 그런 질문을 제 자신에게 던져보니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될 때까지’입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하다’는 ‘산고의 고통을 겪다’는 뜻인데, 종종 ‘필사적으로 사투를 벌이다’라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그 결과로 신생아를 낳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여성 명사가 주어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남성인 바울이 이 동사의 주어로 등장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2에서 자신을 유모의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데살로니가 전서 2:7에서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바울은 아기를 낳고 젖을 먹여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사도로서 자신이 가진 사명으로 보았습니다. 아기를 낳는 것은 복음으로 회심시키는 것이고, 젖을 먹여 키우는 것은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회심은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을 믿게 만드는 것이며, 양육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더 잘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해산하는 수고를 하며 갈라디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은 지금은 자기를 배척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회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병든 교회를 떠나는 대신 다시 교회를 세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주님의 몸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라는 단어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역은 방해가 있을 수 있으나 중단해서는 안 되고 다시 시작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20절에서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을 직역하면 ‘나의 목소리를 바꾸고 싶은데’라는 뜻인데, 이는 문법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현재의 희망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의혹이 있다’는 단어는 ‘의심하다’는 뜻보다는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을 전달하는 ‘의아해하다’, ‘난처해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자신이 해산의 수고로 낳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근심 어린 시선과 그들을 끝까지 놓지 않고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반영합니다.


 


* 우리의 자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야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여정에서 수많은 어려움과 도전을 만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를 수 있습니까? 


-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려면 성도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첫째로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하면 ‘나는 부족하다, 아무 것도 할 줄 모른다’라고 말하며 무조건 사양하는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는 자세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겸손한 자세로 철저하게 섬김의 삶을 살았더니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셔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모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 갈라디아에 와서 그들과 같이 되겠다는 겸손의 자세를 가지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바울은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혼을 대할 때마다 안타까움을 가졌습니다. 그런 슬픔과 그치지 않는 마음의 고통이 로마서 9:3에 잘 표현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복음을 거부하는 동족 유대인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바울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도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 3:18).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하여 눈물짓는 것을 어디서 배웠습니까? 물론 주님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양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가지신 주님을 바울이 본받았습니다. 셋째로 인내해야 합니다. 경기에 임하는 선수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함으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듯이 신앙의 경주에 나서는 성도 역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이 인내로서 감당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히 11:2). 예수님을 본받아 바울은 온갖 시험을 참으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신앙생활 제대로 해보려고 할 때 뜻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사역의 방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자기에게 주어진 이 경주를 끝까지 달리겠다는 결단과 더불어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인내를 만들어내고 우리를 성숙하고 온전하게 만듭니다. 


 


-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 이후 회심하였고 자기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율법에 대한 열심을 자랑하던 교회의 핍박자였으나 이후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주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에 대한 확신과 그리고 주신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결단입니다. 바울에게 있어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살든지 죽든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자기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행 20:23-24)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자기 생명보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나의 자녀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영적 아버지였습니다. 바울의 역할은 복음 안에서 그들을 낳아 기르며 생명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힘든 과정이지만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뤄 예수님을 닮은 신앙 인격을 가지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아버지로서 책임과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해산의 수고는 맛보기 싫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자는 자신의 영적 자녀들을 위해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거듭나 성장해 가는 데는 영적 부모의 수고와 희생이 필수적입니다.


 


나가면서


때로 인생의 여정에 침체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이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먼저 우리가 누구인지 분명한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담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부족과 한계를 인정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이 가신 길을 인내하며 나아갈 때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 때 우리는 주안에서 아름다워지고 깨끗해지고 온전해집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잘 알기에 하나님의 능력, 놀라운 체험을 할지라도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 와서 복음을 전함으로 많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사람들로 만들기 원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꾐에 미혹되어 바울을 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위하여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감당하기를 결단했습니다. 그들을 의심하고 책망하는 대신 그들의 변화되는 모습,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모습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했습니다. 다른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하는 일이 목회자에게만 주어진 사명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이 중요한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바울의 깨달음이 우리의 깨달음이 되고 바울의 헌신이 우리의 헌신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과 같이 복음의 능력 안에 머물면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진리에 바로 서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속에 이루어집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흔적이 생깁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과 사역을 감당하시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