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여호와를 찬송하라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6-26 15:11
Views
257

가끔씩 2002년 월드컵 대회 때 한국국가 대표팀이 치른 게임들을 봅니다. 경기 자체도 박진감이 있지만 예선전을 거쳐, 16강전, 8강전을 치르면서 강팀들을 하나하나 물리칠 때마다 온 국민이 함께 모여 환호하는 모습이 대단합니다. 특히 이탈리아 팀과 16강전에서 싸울 때 1점 차로 지고 있다가 설기현 선수가 동점골을 터뜨리고 연장전에서 안정환 선수가  역전골을 터뜨렸을 때 그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껑충껑충 뛰면서 눈물을 흘리고, 서로 껴안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면서 비록 20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을지라도 여전히 감동적입니다. 최근에 어떤 일로 인하여 너무 기뻐서 흥분되거나 환호성을 지른 적이 있습니까? 믿는 자들은 크게 기뻐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출애굽기 15장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추격하던 애굽의 군대가 홍해에 수장되는 것을 보면서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본문을 보니 드보라와 바락이 하나님께 찬송을 드립니다. 그들이 싸운 전쟁은 그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는데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지금 어떤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까? 힘에 부칩니까? 그만 두고 싶습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인해 영적 싸움에서 이길 뿐 아니라 승리의 노래를 하나님께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에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이 드보라와 바락입니다. 드보라는 여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야빈의 압제에서 구원받을 소망을 전했고, 바락은 용사로서 드보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의 전쟁을 수행함으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야빈과 전쟁에 앞장 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전쟁을 이끄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철 병거 900대를 무용지물로 만드셨습니다. 본문은 드보라와 바락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시스라가 이끄는 군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기념하며 부른 노래입니다. 사사기 4장의 이야기체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강조되어 있는 반면에, 사사기 5장의 운문체는 그 출발부터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행적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하여 성취되어짐을 드보라의 승리 시는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홀로 승리를 누리지 않습니다. 함께 헌신하고 함께 구원의 감격을 노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이런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되 서로를 격려하며 위로하며 주신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둔 열매를 인해 드보라와 같이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찬양으로의 초대(1-3절) 


드보라가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합니다. 그런데 5장은 여성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4장과는 조금 다르게 시작합니다. 1절에서 드보라와 바락이 함께 등장합니다. ‘노래하다’는 동사는 여성 단수형입니다. 그러므로 5장도 여전히 드보라를 핵심 인물로 여기며 그녀의 리더십을 강조합니다. 2절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의 헌신을 노래하고 여호와에 대한 찬송의 초대로 이어집니다. 여기 ‘찬송하라’로 번역된 동사 ‘바라크’는 영어로는 bless이지만,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상황에 따라 구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바라크’할 때는 ‘찬송하다’, ‘찬미하다’로 번역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바라크’할 때는 축복한다고 합니다. 자신이 누리는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크’할 때는 어떻게 번역합니까? ‘복을 주다’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상황에 상관없이 전부 ‘축복하다’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축복의 ‘축’자는 ‘빌 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신다고 하면 하나님이 누구에게 복을 주라고 빕니까? 개역성경을 보면 상황에 따라 ‘바라크’를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창 12:3).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7).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사람들을 초대한 드보라는 그 초대를 자신에게도 적용합니다. 1인칭 대명사를 두 번 사용합니다. ‘내가 노래하다’와 ‘내가 찬송하다’하면서 시인 자신이 이스라엘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드보라는 말 그대로 하나님이 베푸신 승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오심(4-5절) 


드보라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자신도 동참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출정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도우시기 위해 세일과 에돔에서 오시는 여호와를 ‘신적 용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늘과 구름이 물을 내리고 산들과 시내 산이 진동하는 것은 하나님이 임하시는 징조였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런 자연 현상은 그 자체로 신성하게 여겼지만, 성경은 그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드보라는 왜 세일과 에돔, 시내산을 언급합니까?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이후 세일과 에돔, 시내산을 지날 때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시내산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곳입니다. 그곳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 관계에 스스로를 속박하시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라 부르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신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 백성입니다.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사사 시대가 시작되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잊기 시작했습니다. 드보라는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지나 온 모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합니다. 찬양과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할 때 동반되는 행위입니다.


 


드보라의 등장(6-8절) 


드보라는 이스라엘에 닥친 위기 속에서 절박했던 상황을 다양하게 묘사합니다. 삼갈의 날과 야엘의 날을 나란히 쓰고 있는 것은 드보라와 동시대의 사람들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대로’는 팔레스타인 땅, 특히 이스르엘 계곡을 가로지르는 상인들의 경로를 가리킵니다. ‘대로가 비었다’는 표현은 대상 무역 상인들이 사라졌다는 의미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상황을 묘사합니다. 행인들은 가나안 사람들이나 노략하는 자들을 피하기 위해 오솔길로 다녀야 했습니다. ‘마을들이 그쳤다’는 표현은 살기 힘들어져 사람들이 적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자기 나라 땅에서 자기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고 불안에 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악을 범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습니다. 이런 상황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드보라가 온 이스라엘의 정신적,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로 인정받았음을 보여 줍니다. 이 표현은 ‘시스라의 어머니’(5:28)와 대조됩니다. 이스라엘을 압제했던 가나안의 군대 장관 시스라의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알지 못한 채 헛된 희망 속에서 아들을 기다렸던 반면, 압제를 당하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어머니’드보라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8절은 드보라가 등장하기 전 이스라엘의 안타까운 상황을 다시 묘사합니다. 심지어 성문에 전쟁이 들이닥쳤는데도 이스라엘은 방패와 창을 들고 싸우려 하지 않을 만큼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원자를 보내셔서 대적을 물리치시고 승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의로운 일을 찬송하고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얻기까지 연합해 싸워야 합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요청(9-11절) 


하나님은 악한 대적을 물리쳐 그분의 백성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신 것은 그분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방백들과 백성은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신 공의로운 일은 권력자뿐 아니라 평민까지 모든 사람이 찬송하기에 마땅합니다. 9절은 2절처럼 백성의 헌신을 칭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10절의 “흰 나귀를 탄 자들”과 “양탄자에 앉은 자들”은 귀족이나 지배 계층 “길에 행하는 자들”은 서민들을 의미합니다. 드보라는 하나님이 하신 의로운 일을 증언하도록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부릅니다. 활 쏘는 자들이나 물 긷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로우신 업적을 말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은 악과 거짓을 물리치고 공의와 선을 완성하신 의로운 행동입니다. 이 구원을 얻은 자는 모두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의로운 행동(12-18절) 


이 단락은 드보라를 향한 외침으로 시작합니다. 명령형이 반복된 “깰지어다 깰지어다”는 영적으로 깨어있도록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입니다. 드보라가 자신에게 ‘노래하라’로 말하면서 그 사건을 돌이켜보며 기뻐합니다. 드보라가 실제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직접적 구원자 역할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바락에게 ‘일어날지어다’라고 말하며, 가나안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을 역전시키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단락의 주제는 하나님의 전쟁에 누가 참여했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얻기 위해 동참해야 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는 자신들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참전했으나 에브라임과 베냐민 그리고 잇사갈 지파는 일부만 참여했습니다. ‘에브라임에서 나온 자들’은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라기보다 에브라임 지역에 사는 아말렉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베냐민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 중에 그렇게 유력한 지파는 아니었으나 싸움에 참여했습니다. 마길, 즉 므낫세 지파에는 다스리는 자들 몇 사람만이 참여했습니다.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들이 참여했습니다.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싸웠는데 그들은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바락도 잇사갈 사람들처럼 담대하여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 싸웠습니다. 르우벤과 길르앗은 요단 동편에 있어서 가나안이 아닌 모압과 암몬의 위협을 받았을 것입니다.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라는 표현은 르우벤이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단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전쟁에 참여하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 르우벤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군나팔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라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꼭 싸움에 나가야 하나? 요단강을 건너 서편까지 굳이 가야 하나? 지금은 우리의 양을 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그 자리에 주저 않고 말았습니다. 자기도 무언가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다가 막상 일을 할 때에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슬그머니 뒤로 빠지는 모습을 보인 르우벤 지파는 더 이상 이스라엘 역사 속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길르앗 사람들은 요단강 동편에 사는 것을 핑계로 오지 않았습니다. 단 지파는 배에 머물렀습니다. 다시 말하면 장사하느라 바빠서 이 귀한 싸움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아셀 지파는 편안하게 사는 삶에 방해받지 않고자 자기들의 거처에 거하였습니다. 


 


가나안 지파와의 싸움에 가장 전공을 세운 지파는 스불론과 납달리 사람들입니다. 스블론 사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스블론처럼 열심히 싸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인 싸움을 싸울 때 하나님의 능력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복을 누립니다. 그러면 싸움에 참여하지 않은 지파들은 편안한 삶을 누렸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르우벤 사람들은 길르앗 동편 땅에서 계속 전쟁을 치렀습니다. 단은 블레셋과 싸웠습니다. 므낫세는 미디안의 침공을 당했습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적인 전쟁,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때가 오히려 안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게 됩니다. 여기에 보면 가나안과의 전쟁에 헌신적으로 참여한 지파들과 참석지 못한 지파들이 나뉩니다. 참석하지 않은 지파들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헌신의 정도에 따라 상급이 다릅니다. 그날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 자원하는 심령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하는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 하나님의 사역에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의 하나 됨을 강조하며, 그런 하나 됨을 통해 가나안을 정복했던 역사를 보여 주었습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이미 기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요단 강을 함께 건너 가나안 정복을 도왔으며, 모든 지파는 자신들의 기업을 레위 지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일부를 내어 줌으로써 하나 됨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에서는 지파들 사이의 갈등이 점점 심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함께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로 연합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공동체 의식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온 모든 지파가 함께 싸우지는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싸움을 하나님이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사사 시대의 상황이 오늘날의 교회 상황과 비슷합니다. 교회에 여러 직분이 있습니다. 직분을 감당하도록 옆에서 권할 수는 있으나 본인이 자발적으로 원하지 않으면 그 섬김은 오래 가지 못하고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또한 리더가 앞장서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한 것처럼 모두가 자원하여 참여해야 합니다. 리더가 되었다고 우쭐해서도 안 되고 뒤에서 따라간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로 참여하면 됩니다. 팔짱만 끼고 관망만 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기 싫으니까 다른 사람이 일을 벌이는 것조차 싫어하고 그나마 하는 사람이 있으면 뒤에서 이랬느니 저랬느니 평가만 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부족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적인 싸움을 할 때만이 존재가치가 있고 기쁨이 있고 하나님을 찬양할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함께 기뻐하며 슬퍼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소리 높여 찬양하면서 승리의 근원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이스라엘에게 이김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들과 함께 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찬송을 들으며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들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던 시스라의 군대를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철병거를 볼 때마다 주눅이 들고 감히 대항할 용기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드보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결연히 일어났을 때 시스라의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20년 동안 눌러왔던 열등감과 패배의식이 사라지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길 수 없던 싸움에서 이겼으니 그 기쁨이 더했습니다. 더구나 이 싸움에서 승리함으로 지긋지긋한 압제의 삶에 벗어나게 되었기에 그 기쁨이 배나 더했습니다. 신앙생활 한다고 모든 일이 형통하지는 않습니다. 때로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의 교만을 깨뜨리십니다. 믿음의 지경을 넓히십니다. 우리의 영적인 싸움은 쉼이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기도하고 말씀생활 충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이김을 주십니다. 그들이 감격 속에 부르는 승리의 노래를 기뻐 들으십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살아 계셔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찬양하며 온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드보라는 단순히 하나님의 위대하심만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어떻게 역사 하셨는지 찬양을 통하여 재연하며 그때 가졌던 감격을 되새깁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추상적으로 하나님의 속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역사 하신 것을 돌아보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사기를 통하여 이 아침에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도 한번 드보라와 바락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감격을 가져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삶 속에서 경험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온몸으로 느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 정성을 쏟아 부었던 그 어떤 것들보다 주님을 알고 삶 속에 경험한 주님을 나누고 전하는 것이 가장 복된 것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의지하여 순종하는 헌신자들에게 하나님은 문제를 극복하게 하시고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경험하시면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주님이 하신 일을 담대하게 전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위기의 시대에 사사를 세우셨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궁극적인 사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이 땅 가운데 함께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일을 감당케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삶 전체를 맡기며 아름다운 헌신의 열매를 맺으며 드보라와 같이 감격의 찬송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