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하나님의 영이 임한 사람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6-05 19:48
Views
280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주일입니다. 구약 절기로 보면 초실절부터 50일째 되는 오순절입니다. 신약 절기로 보면 부활절부터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한 지 열흘째 되던 날에 120명의 성도들은 집안으로 아주 강한 바람이 밀려들어오는 것 같은 소리를 누구나 들었습니다. 불이 활활 타오를 때 불꽃이 여러 방향으로 퍼지듯이 불의 가지 같은 것들이 각 사람에게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락방에 모인 그들은 귀로 들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자기들의 입이 성령의 인도대로 움직여지는 이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표적을 통하여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사실을 알았습니다. 표준새번역을 보면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행 2:4)고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방언, 능력 행함, 기도, 예언 등의 현상을 기대하지만, 가장 큰 특징은 “성령이 시키는 대로”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와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그들은 길거리로 뛰쳐나와 자기들도 알지 못하던 각국 언어들로 일제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오순절을 맞이하여 각 나라에 흩어져서 살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유대 땅 예루살렘을 찾았다가 자기 나라의 언어로 듣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들은 듣고 소동했고(행 2:6).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겼고(2:7), 다 놀라며 당황했습니다(2:12). 또 어떤 사람들은 이 갈릴리 사람들이 새 술에 취하여 주정을 부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취하기는 취했습니다. 그러나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취한 것입니다. 성령이 제자들을 사로잡으니 능력이 생기고 그 능력을 힘입어 담대하게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것은 교회사에서 이정표적인 사건입니다. 이를 통하여 신약교회가 탄생되었고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성령으로 충만합니까? 본문을 보니 옷니엘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그가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성령 충만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분명히 알고 성령 충만을 사모할 뿐 아니라, 실제로 성령 충만 받아 옷니엘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기쁨이 있고, 능력이 있고, 열매가 풍성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시험(1-4절) 


3:1-6절은 사사기 서론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이방 민족들을 남기신 것은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두 가지를 알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는’주체가 다릅니다. 2절에서‘안다’의 주어는 가나안 세대입니다. 전쟁을 알지 못하는 가나안 세대가 전쟁을 알아야 했습니다. 4절에서 ‘안다’의 주어는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순종 여부를 알기 원하셨습니다. ‘가나안 전쟁’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이요, 여호와가 이끄시는 거룩한 전쟁입니다. 출애굽할 때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라고 말했습니다. 싸우는 자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할 때 2절의 ‘전쟁을 가르친다’는 표현은 단순히 전술을 가르친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는데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군사력이나 전술이 아니라 총사령관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까지 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도록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정복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을 중단했습니다.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하다’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하다’라는 말과 동일합니다(2:10). 그들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지속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능력과 기사를 더 이상 체험할 수 없었습니다. 


 


3절에는 하나님이 남겨 두신 이방 민족이 열거됩니다. 블레셋 다섯 군주, 모든 가나안 족속, 시돈 족속, 히위 족속입니다. 블레셋은 지중해 연안의 여러 지역에서 이주해 온 해양 민족입니다. 다섯 도시의 연맹을 형성하고 있던 그들에게 다섯 군주가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에 사는 여러 민족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합니다. 시돈 족속은 북부 해안에 거주했고 히위 족속은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입구까지 레바논 산지에 거주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을 잘 보여 줍니다. 시험의 첫 번째 목적은 전쟁을 알기 위함이고, 두 번째 목적은 모세를 통해 주어진 명령에 대한 순종 여부를 알기 위함입니다. 이방 민족들과의 전쟁은 하나님 입장에서 이스라엘이 모세를 통해 주어진 명령을 따르는지 시험하는 도구였지만,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 됩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세대가 그 조상들처럼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이방 민족들을 남겨 두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정복 전쟁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언약 백성임을 되기 원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쩌면 가나안 세대보다 더욱 평안한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든든하게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타락(5-6절) 


5-6절은 1~2장의 요약이자 결론이며 이스라엘 자손이 언약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 대부분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완전히 쫓아내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족속이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했다는 표현과 달리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했다는 표현은 매우 부정적인 평가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족속의 삶의 방식을 닮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삼다’와 ‘주다’라는 동사는 결혼을 통해 두 민족이 동화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방 민족과의 결혼은 인종이나 혈통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민족들과 혼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신 7:1-3).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은 그들에게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이키고자 하는 마음이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고 했는데 가나안 족속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처럼 유일신 개념이 아니라 다신론 체제였습니다. ‘섬겼더라’는 단어는 단순히 절을 하는 제의적 행위뿐만 아니라 제물과 몸과 영혼까지 다 바치는 전폭적인 섬김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가나안 민족을 쫓아내시려는 이유 중 하나가 가나안 민족의 가증한 일을 제거하기 위함인데, 오히려 이스라엘이 가나안 민족이 저지르는 그 가증한 일을 따라 했습니다. 하나님만을 예배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신들을 예배한 것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1계명을 위반한 중대한 범죄였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민족들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가’는 질문에 항상 직면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의 우상들에 절하고 이방인들의 문화와 풍습을 따랐습니다.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7-8절) 


7절은 이스라엘의 배교에 대한 전형적인 묘사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하면서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고 합니다. 7절의 강조점은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라는 구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그 자리는 우상이 차지하게 됩니다. 지난주에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언급했는데 오늘의 본문에는 아세라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가나안의 주신은 엘이고, 그의 배우자는 아세라입니다. 그들이 낳은 자녀들 중에 바알과 아스다롯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세라는 바알의 아내가 아니라 어머니입니다. 바알이 아스다롯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습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이 부부관계를 맺고 난 뒤 나오는 정액이 땅에 떨어지면 땅에서는 풍년이 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알 신전에서는 제사가 끝나면 신전의 창기들과 난잡한 의식이 있었습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따라 성행위를 하면 땅에서는 풍년이 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알 신 숭배하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너는 삼가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하게 섬기며 그들의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제물을 먹을까 함이며 또 네가 그들의 딸들을 네 아들들의 아내로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네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출 34:15-16)라고 모세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 예언대로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메소보다미아 왕인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8년 동안 구산 리사다임을 섬겼습니다. ‘구산 리사다임’은 ‘갑절이나 사악한 구산’이란 의미를 가집니다. 이 이름을 통해 구산 리사다임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참혹하고 잔인하게 압제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사사 옷니엘(9-11절)


이스라엘은 더 나은 행복을 바라며 이방 신을 좇았겠지만 그로 인해 압제의 고통이 가중되었고 그 결과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이것은 도움을 요청하는 부르짖음이지 회개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자비의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옷니엘을 구원자로 세우십니다. 옷니엘은 가나안 정복 전쟁 때 갈렙과 함께 크게 활약한 믿음의 사람으로, 갈렙의 조카이자 사위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민족들과 결혼한 것이 그들의 대표적인 불순종으로 제시되는 맥락 속에서 옷니엘이 유다 지파 갈렙의 딸과 결혼했다는 사실은 뜻하는 바가 있습니다. 갈렙과 옷니엘은 원래 유다 사람이 아니지만, 이스라엘에 편입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전혀 예기치 않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옷니엘의 특징은 여호와의 영이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상징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함께하심으로 옷니엘이 구산 리사다임과 싸워 승리합니다.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인간 리더는 아무리 성령의 능력을 받더라도 한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계 1:18) 옷니엘이 죽기 전에 이룬 40년의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오시는 영원한 평화를 바라보게 합니다. 


 


* 우리의 자세


가나안의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자칫하면 세상 지식, 가치관, 경험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이 은혜로 임하여 우리 심령에 깊이 뿌리지 않으면 성경 말씀은 우리의 삶에 도덕적 잣대만 더할 뿐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되면 가나안이라 여기던 삶이 어느새 무너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산 리사다임의 압제를 받는 것과 같은 고통이 찾아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옷니엘을 세우시듯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가나안의 삶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며, 말씀 앞에 정직하게 살 것을 요구합니다. 각자의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무엇이 가나안, 구산 리사다임, 옷니엘과 같은 존재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이란 정체성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죽을 때 남겨 두었던 이방 민족들을 하나도 내쫓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훈련시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여호수아 이후에 태어난 세대는 전쟁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경험, 기술, 군사력을 의지할 때는 결코 적과 싸워 승리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주셔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고 해서 한순간에 우리의 성품과 삶이  온전해지지는 않습니다. 성화의 삶을 살려면 자신의 힘만 믿고 살았던 태도부터 버려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해집니다.


 


-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족속과 치른 전쟁은 땅을 차지하려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의 본질은 가나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들이 가득한 땅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순종하며 사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도 매순간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리게 되어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살았던 땅이 우상으로 가득했듯, 지금의 세상도 우상으로 가득합니다. 우상을 따르는 삶의 끝은 공허와 허무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영적으로 무뎌지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에 시련과 역경을 사용해 우리의 영혼을 깨우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온전히 임하게 하실 것입니다.  


 


-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을 능력 있게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제자들이 더 이상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이 두려워 숨는 자들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향해 담대히 예수 부활을 선포하며 구원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성령님은 믿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사역이 계속되도록 모든 자원을 공급하십니다. 활기 있는 신앙생활, 열매 있는 신앙생활, 능력이 있는 신앙생활,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은 교회 직분이 있거나,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해서 저절로 임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수 있습니까? 첫째,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의 확신도 갖고 사명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 그들 스스로 복음을 역동적으로 전파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함께 모여 기도하면서 위로부터 주시는 약속된 성령을 받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다락방 기도모임에는 제자들은 물론 공생애 동안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예수님의 친동생들도 참여했습니다. 그들이 성령의 임함을 사모하며 힘써 기도했더니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면 그들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임을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8). 이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이 모인 무리에게 충만하게 임하였습니다. 그들은 방언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한 것이었습니다. 성령님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고백하였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바울이 말했습니다.  


 


나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사실 삶의 현장은 전쟁터와 같습니다. 최근 겪었던, 또는 지금 겪고 있는 영적 전쟁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이런 영적 전쟁을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지금 영원한 사망 혹은 영원한 생명으로 나뉘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누구나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성품이 온유하거나 착하다고 면제되지 않습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쉬지 않고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다가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영적 상태를 살피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어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 거룩해지고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시험을 믿음으로 견디는 자는 욥과 같이 정금이 되어 나오게 됩니다(욥 23:10).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성도의 바른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기억하면서 언제나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성령 충만한 가운데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무리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마음으로 전혀 기도에 힘씀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시작된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간증에는 힘이 있었고, 그들의 사역에는 풍성한 열매가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에루살렘 교회는 주께서 날마다 그 수를 더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불처럼 바람처럼 임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가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영이 임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교우들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치유와 회복과 화합이 일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