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반복되는 죄악의 패턴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5-29 15:59
Views
263


신앙의 활력은 저절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모태 신앙이요 몇 대째 내려오는 신앙의 경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지만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자동적으로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각자가 영적으로 깨어 있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기도와 말씀으로 성숙해지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과거에 받은 은혜만을 곱씹으며 현재 신앙의 훈련을 게을리 하면 신앙은 정체되거나 퇴보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수고와 인내를 칭찬하셨지만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지적을 하셨습니다(계 2:4). 현실적 풍요 속에 만족하며 안일하게 신앙생활 하던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주님은 계속해서 미적지근하다면 토해 내시겠다고 경고하시며(계 3:16) 회개하여 열심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영적 상태를 보신다면 어떠한 평가를 내리시겠습니까? 사사 시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준 모습은 지금부터 3000여 년 전의 역사로 그치지 않고 미국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그들의 실패를 거울삼아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주로 출애굽 1세대의 역사를 다룬다면 여호수아서는 출애굽 2세대의 역사를 다루고, 사사기는 가나안에 정착한 3세대 이후 세대의 역사를 다룹니다. 출애굽 1세대는 애굽에서 태어난 세대입니다. 출애굽은 했으나 애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광야 여정이 힘들 때마다 물이 부족하다느니 길이 험하다느니 고기가 먹고 싶다느니 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에 대해 원망과 불평을 계속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빼고는 그들 모두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출애굽 2세대는 애굽에서 나올 때 스무 살 이하였거나 광야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입니다. 신실한 여호수아의 리더십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가나안 정복을 이루었습니다. 가나안 세대는 주로 가나안에서 태어나서 자라난 세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제대로 알지 못한 세대입니다. 아버지 세대가 아직 다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이 그들과 함께 있다 보니 자연히 가나안 족속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세대에게 주신 두 가지 사명이 있는데, 하나는 남은 땅의 정복이고 다른 하나는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는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세대는 믿음이 없고 영안이 어둡다 보니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각자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동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안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죄의 악순환  


본문은 가나안 세대의 불신앙적인 모습을 요약해서 보여 줍니다. ‘전철을 밟지마라’하는 속담이 있는데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죄에 빠졌다가 사사를 통해 구원을 받고 사사가 죽으면 이전보다 더 큰 죄에 빠지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여호수아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경고하면서 충성 서약을 시켰습니다.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수 24:20, 23).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라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한 세대가 지나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가나안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알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출애굽, 홍해와 요단강을 건넌 사건, 여리고성 정복 같은 역사적 사건을 몰랐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그들에게 더 이상 큰 의미를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가나안 신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우상들이 아닌 것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하나님은 악하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악순환의 모습을 보여 줍니까?


 


- 악을 행함: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2:11-13)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스스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것은 마치 뿌리가 뽑힌 나무가 가지고 있는 한정된 수분과 영양분이 말라 감에 따라 결국은 죽어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모세가 경고했습니다.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케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신 31:29). 여호수아도 경고했습니다. “만약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망하리라”(수 23:16). 그런데 가나안 세대는 이러한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가나안의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가나안의 신들이 자기들에게 더 현실적인 도움을 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세대가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다고 합니다. ‘목전’은 ‘~가 보기에’라는 뜻이고 어떤 판단의 기준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기준에 악한 것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사사기 후반부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행했다고 합니다(17:6; 21:25). 2장에서 이스라엘의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이 ‘여호와’인 반면, 사사기 후반부로 가면서 그들 자신이 판단 기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행한 악은 바알로 대표되는 다른 신들을 섬긴 것입니다. ‘바알’이 일반 명사로 사용될 때는 ‘주인’이란 뜻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유 명사로 사용될 때는 가나안 족속의 최고의 신을 가리킵니다. 구약성경에는 ‘바알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알은 폭풍과 비를 주관하여 다산과 풍요를 가져온다고 여겨진 가나안의 우상입니다. 아스다롯은 바울의 배우자로 전쟁과 다산의 여신이었습니다. 가나안 세대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믿고 성경에 관하여 많이 알면서도 실제의 삶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로 차이가 없이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가나안 세대와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징계: “괴로움이 심하였더라”(2:14-15)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예배드리는 경건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한 가나안을 주셨는데 그들은이 우상 숭배를 하자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고 괴로움을 더하셨습니다. 그래서 노략하는 자의 손에 그들을 넘기셔서 노략을 당하게 하셨으며 주위에 있는 대적들의 손에 그들을 파셔서 다시는 대적을 당해낼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징계의 채찍을 드시는 목적은 파멸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에 회개로 반응한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대적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요 다른 한편에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사랑의 채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 안에 있을 때 평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 언약이 이스라엘 백성의 힘이며 능력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복하여 죄를 짓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안타깝고 한심스럽기도 하지만 그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일 수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 탄원: “슬피 부르짖으므로”(2:18)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적에게 계속적으로 압박과 시달림을 받으니 괴로움이 심하여져서 슬피 부르짖습니다. 개역성경의 번역은 마치 이스라엘이 슬프게 부르짖은 것, 즉 그들이 회개했기에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신 것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슬피 부르짖음’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느아카’는 구약성경에 네 번 나오는데, 각각 고통소리(출 2:24), 신음 소리(출 6:5), 고통(겔 30:24)으로 번역됩니다. 이는 그들이 슬프게 부르짖은 소리가 고통 때문에 새어 나오는 신음인 것을 말해 줍니다. “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2:17) 라는 표현을 보면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회개한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고통스러워 할 뿐입니다. 후회하고 돌이켜야 할 당사자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으나, 오히려 하나님께서 징계하신 것을 돌이키셨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에는 진실한 회개가 담겨있지 않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여전히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회개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전적인 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돌이키셨다’는 표현은 신학적인 문제를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다른 본문은 하나님이 후회하지 않으시며(민 23:19) 변하지 않으신다(삼상 15:29)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인간과 같은 속성을 지니신 것처럼 묘사하곤 합니다. 따라서 이런 표현은 문자 그대로 이해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합니다. 사사기 전체를 보면 하나님이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첫 번째 사사인 옷니엘부터 에훗, 드보라까지입니다. 기드온 때는 지체되다가 입다 때에는 그들이 부르짖자 ‘너희들이 섬기는 신에게 알아보라’고 하시며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삼손 때에는 이스라엘이 아예 부르짖지도 않습니다. 비록 실수할 때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시나 하나님은 한결같은 사랑으로 택하신 백성을 돌아보십니다. 


 


- 구원:  “사사들을 세우사”(2:16-18) 


하나님은 심판으로 고통 받는 당신의 백성을 위해 사사들을 세우십니다. ‘사사’라는 명칭은 본래 ‘판관’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사사들은 하나님의 율법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판결을 내리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사사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고난 가운데서 건지실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무너진 언약을 다시 세우려고 하셨습니다. 물론 사사들은 대적에게서 백성을 구원하는 역할 뿐 아니라 백성을 하나님의 공의대로 다스리는 영적, 군사적, 정치적 지도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왕과 다른 점이 있다면 왕은 세습적이지만 사사는 당대에 그 역할을 마치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 신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던 그들 조상들의 길에서 속히 떠났습니다. ‘떠나다’는 완료형으로 사용되어 그들이 이미 떠났음을 강조합니다. ‘속히’는 여호와를 떠나는 이들의 행위가 급속도로 이루어졌음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32:8에서 금송아지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와 매우 흡사합니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 더 악을 행함: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2:19)


이스라엘은 사사들을 통해 구원을 받았음에도 사사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제대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사사가 죽은 후에 더욱 타락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던 조상들의 길에서 빨리 떠났으며, 타락한 조상들보다도 더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긍휼을 베푸셔도, 사람이 죄를 멈추지 않으면 타락의 정도는 더 심해집니다. 사사 시대는 불행하게도 범죄 – 징계 – 탄원 – 구원 – 더 악을 행함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점점 죄악의 깊은 수렁으로 빠집니다. 


 


하나님의 결심(2:20-23) 


하나님이 진노하신 구체적 결과가 다시 언급됩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기고 불순종한 것을 인해 이방 민족을 하나도 쫓아 내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나의 백성’이 아니라 ‘이 백성’이라고 부르신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가 벌어졌음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이방 민족을 더 이상 쫓아내지 않으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는지 여부를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불순종 때문에 징계를 받지만, 그 징계를 통해 다시 순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도 회개하지 않고 패역을 일삼는다면 징계의 강도는 더 세질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한 시점에서 불신, 게으름, 욕심 때문에 선택한 상황은 잠시 이익을 주는 것 같아도 결국 올가미가 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불순종하면 하나님은 그 가시를 그냥 놓아두십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은 ‘가시’로 징계하시고, 고난 중에 부르짖으면 ‘사사’를 세워 구원하셨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우리의 삶에도 ‘사사’와 ‘가시’의 역할을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 우리의 자세


가나안 세대의 실패를 거울삼으면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 우상을 멀리해야 합니다 


가나안 세대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이유가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우상숭배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의 풍요로움을 보고 바알들을 섬겼으나 오히려 노략, 재앙,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부와 명예를 좇아 죄 가운데 거할 때 그 결과는 허무, 고통, 절망뿐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마 6:24). 하나님만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다른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을 행하는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만을 온전히 섬기며 그분의 은혜로만 살아야 합니다.  


- 신앙 유산은 계승되어야 합니다


출애굽 2세대는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가나안 정복의 위업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세대는 반역과 그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징계가 반복되는 악순환을 경험했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신앙이 좋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자녀에게 신앙의 유산을 잘 남겨주지 못하면 자녀들은 그들이 친구를 따라가고 세상에서 보고 듣는 것을 따라가게 됩니다. 불과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그들은 아버지 세대가 가졌던 신앙에서 떠나 가나안 신들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부모가 너무 바빠서 그랬다고 핑계를 대겠습니까? 2세대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본받아야 하지만, 반면에 자녀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그들의 실수를 거울삼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듯이 오늘날 우리가 우상에게 절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관심과 열심을 약하게 하는 것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경건한 자손들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아낌없는 관심과 투자를 해야 합니다. 물론 책임은 가나안 세대에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그들에게 있었고 자라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권능에 대하여 부모들에게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고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부모 세대가 잘못되었더라도 자녀들의 잘못된 행동이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은 자기들이 저지른 행동을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 영적 전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구원사적 관점에서 볼 때 사사시대 이전이 있었던 중요한 사건은 출애굽과 시내산 언약 체결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참으로 세상과 우주를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시며 구원의 주님이심을 분명히 경험했습니다. 그 감격 속에서 시내산에서의 언약을 체결하며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로 맹세하였습니다. 가나안 세대에게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가나안 땅에 실현해야 하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가나안 거민들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과제였습니다. 이방 족속들과 계속 전쟁을 치르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사사기는 영적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 또한 영적 전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비결은 자신의 교회를 통치하시며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세상의 유혹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엡 6장에서 주안에서와 그의 강한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라고 권면하면서 성도들이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한 구체적인 비결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 싸움의 대상은 마귀입니다. 선교지만이 영적인 싸움터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모든 삶의  현장이 영적인 싸움터입니다. 가정, 학교, 사업장, 심지어 교회까지라도 싸움터가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에, 물질에, 돈에, 명예에, 권력에 자신의 관심을 집중합니다.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도록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유일한 공격무기가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로 덧입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병사가 아무리 좋은 무장을 하더라도 싸울 힘이 없으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듯이 영적인 싸움에서 계속적으로 싸울 힘을 공급받기 위하여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사사기는 여호수아와 같은 뛰어난 지도자를 다루고 있는 여호수아서와 사무엘과 다윗을 다루는 사무엘서 사이에서 리더십 부재를 보여줍니다. 사사기 마지막 구절인 21장 25절,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를 통해 역설적으로 리더십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보여줍니다. 그 소망은 일차적으로 다윗이라는 뛰어난 영성의 리더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진정한 리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주님께 순종하고 그분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할 때 풍성한 삶이 약속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다른 무엇인가를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며 우상을 멀리해야 합니다. 가나안 세대는 여호와를 인격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혹시 우리의 자녀들이 세상의 악한 풍조에 물들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실펴야 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삶을 살도록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죄악 된 이 땅 가운데 살아가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영적인 싸움을 계속 수행해야 합니다. 우리를 실족시키는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우리의 영원한 사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우리의 자녀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을 섬기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