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이스라엘의 정복 실패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5-22 15:07
Views
263

신년 첫 주일부터 갈라디아서를 다루었는데, 오늘부터 사사기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 사무엘의 치세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이스라엘 역사를 기술합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21:25)라는 표현이 사사 시대의 분위기를 잘 나타냅니다. 요즘은 절대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사사 시대의 영적 분위기가 오늘날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끈 가나안 정복 전쟁 이후 출생한 출애굽 3세대는 가나안 주민을 쫓아내기보다 그들과의 공존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가나안 문화에 동화되어 하나님을 잊고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언약을 버리고 정체성과 사명을 잊은 백성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잊을 때 삶의 방향과 목적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신을 누구로 인식하며 살아갑니까? 갈라디아서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는 자유자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상속자요,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신앙 경주를 잘하며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불안한 출발(1:1-10)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로 시작됩니다. 여호수아가 죽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없는 상황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불안하게 합니다. 성경에서 리더십 change가 가장 순탄하게 잘 이루어진 것이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여호수아는 후계자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리더십의 부재로 인한 불안 속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이끌 새로운 리더가 누구인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그런데 하나님은 한 사람이 아니라 유다 지파를 지목하십니다. 그리고 이미 가나안 땅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승리를 약속하십니다. 유다 지파가 자기들에게 분배된 영토의 정복을 완료하는 첫 번째 주자가 된 것입니다. 


 


유다 지파는 시므온 지파를 끌어들여 함께 싸움에 나가자고 요청했습니다. 유다와 시므온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이며, 시므온의 영토가 유다의 영역 안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 힘을 합치는 것이 별로 문제가 될 것은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유다 지파에게 명령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을 치르고 있습니다. 성전의 총사령관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유다 지파는 베섹에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만 명이나 죽이는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도망하는 아도니 베섹을 사로잡아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랐고, 예루살렘까지 끌고 와서 죽였습니다. 적장의 수족을 잘라 수모를 주는 행위는 원래 가나안 사람들이 대적들에게 행하던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이 알게 모르게 이방인의 풍습에 젖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도니 베섹은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스스로 선택한 삶의 결과를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유다는 예루살렘도 점령하여 거주민을 모두 죽이고 성읍을 불살랐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정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전에도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 살던 여부스 족속을 상대로 이긴 적이 있습니다(수 10:3; 12:10). 그때도 그 땅을 완전히 점령하지는 못했으며, 그곳을 기업으로 받은 베냐민 지파도 완전히 정복하는 데 실패했습니다(1:21). 다윗 때 가서야 비로소 예루살렘을 정복했습니다(삼하 5:6-10). 유다 지파는 계속해서 산지와 최남단의 사막 지역인 남방과 지중해 해안까지 이어지는 평지까지 내려가 가나안 사람들과 싸웠고 기럇 아르바라고 불리던 헤브론을 정복했습니다. 특히 세 명의 적장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주민들이 모두 심판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에게 승리를 주셨지만 승리하는 과정이 아주 매끄럽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전쟁에서는 이기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실한 갈렙 가문(1:11-16) 


유다 지파의 기록에 갈렙 가문이 언급됩니다. 헤브론은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분배받은 기업의 일부입니다. 그 근방에 있는 기럇 세벨은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갈렙은 그곳을 점령하는 자에게 자신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갈렙은 자신이 한평생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용감히 싸웠던 것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을 사위로 삼기 원했습니다. 갈렙이 딸을 보상으로 주겠다고 한 일은 자신의 가문을 믿음의 집안으로 세우려는 의도였습니다. 이에 갈렙의 아우인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나서서 기럇 세벨을 쳐서 점령했습니다. 옷니엘은 후에 최초의 사사가 됩니다. 악사도 그 아버지에 그 딸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악사는 옷니엘에게 밭을 갈렙한데 구하라고 하고 악사 자신도 갈렙에게 자신들이 받은 메마른 네겝 땅을 관개하기 위한 샘물을 요구했습니다. 약속의 땅을 취하고 거기 정착하여 그 복을 누리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이러한 악사의 요구에 갈렙은 위샘과 아랫샘을 주었습니다. 갈렙, 옷니엘, 그리고 악사가 보여준 믿음의 사람의 모습은 이후 믿음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불순종하는 이스라엘(1:17-36)


유다 지파는 시므온 지파와 함께 가나안의 남서부 지역인 스밧, 가사, 아스글론, 에그론을 점령했는데 오직 스밧 지역에 관해서만 ‘진멸했다’라는 표현이 쓰입니다. 스밧을 진멸하고서 그곳을 ‘호르마’라 불렀는데, 이는 ‘진멸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하람’에서 나온 말입니다. 유다 지파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의지할 때 산지 주민을 쫓아낼 수 있었으나, 철 병거를 가진 골짜기 주민을 두려워했을 때에 그들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사실 철 병거 때문에 이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에 대한 불순종이 실패의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능력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주민이 앞으로 오랫동안 옆구리의 가시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베냐민 자손도 예루살렘에 거주하며 여부스 족속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정복이라는 도전 대신에 편안한 공존을 선택했습니다. 가나안 족속을 심판하고 구별된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셉 지파는 여호와께서 함께하심으로 벧엘을 치러 올라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벧엘을 정탐할 때, 그곳 주민에게 성읍의 정보를 제공하면 선대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성읍을 정복하자 그와 그 가족을 놓아 보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통합되지 않고 헷 사람의 땅에서 새 성읍을 짓고 살았습니다. 요셉 지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대신 가나안 사람과 언약을 맺는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므낫세 지파는 벧스안, 다아낙, 돌, 이블르암, 므깃도에 사는 주민들과 그 주변 마을들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가나안 주민들은 므낫세의 묵인 하에 그대로 머물러 살았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의 군사력이 우위에 있을 때에도 그들을 쫓아내지 않고 노역을 시켰습니다. 므낫세 지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보다 경제적 이득을 선택했습니다. 에브라임도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게셀은 군사 요충지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남북과 동서가 교차하는 지점이었는데, 그렇게 중요한 곳에 가나안 주민들이 사는 것을 방치했습니다.  


 


좀 더 북쪽에 자리 잡은 스불론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기드론과 나할롤 주민들을 노역에 동원하기 위해, 그들을 자신들의 영역에 거주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아셀 지파와 납달리 지파의 경우는 한심합니다. 가나안 족속을 그들 중에 살도록 허락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이 가나안 족속 가운데 살았고 납달리도 그랬습니다. 단 지파의 경우에는 아모리 족속의 힘에 눌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아예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골짜기로 내려가지도 못했습니다. 아모리 족속이 이스라엘보다 군사력이 우세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오히려 아모리 족속의 의지력과 용기가 이스라엘의 것보다 우월했다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나중에 요셉 족속이 강성해져 단 지파의 영토 일부를 합병한 이후에야 아모리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습니다. 


  


사사기 1장을 대충 읽으면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거주하고 넓은 영역에 정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불과 두 세대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로 있을 때만 해도 자신들의 후손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게 될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이 지금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 말씀대로 온전히 순종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거나 진멸하기보다는 섞여 살고 있습니다. 영적 싸움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들에게 주도권을 점점 빼앗기게 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보여준 타협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지름길이 됩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말고, 세상의 유혹에 타협하지 말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를 실망시킨 이스라엘(2:1-5) 


2장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하나님의 사자가 온 경로가 중요합니다. 왜 길갈입니까? 여호수아 5장을 보면 하나님은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에게 길갈에서 할례를 받게 하시며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시겠다는 약속과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언약 선언을 하셨습니다. 길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처음으로 유월절을 지킨 곳으로(수 5:10),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이 그들의 근원을 돌아볼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은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 땅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제단을 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고 책망하십니다. 그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관습을 따라간 것은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라는 질문은 이유가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는 수사적인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해 하나님은 세 가지 심판을 내리십니다. 첫째,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고 그들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심판이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으시는 것이라는 사실은 역설적입니다. 둘째, 가나안 족속이 이스라엘의 ‘옆구리에 가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역사가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셋째, 가나안 사람들의 신이 이스라엘에게 올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 자체가 아니라 가나안 사람들의 신이 이스라엘에게 올무가 된다는 것은 이 문제가 단순한 종족 간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새들이 올무에 걸려 죽게 되듯이,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로 인해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메시지를 들은 이스라엘은 ‘소리를 높여’울었습니다. 그래서 그 장소의 이름이 ‘우는 자들’이라는 의미의 ‘보김’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제사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예배를 받으셨을까요? 이어지는 사사기의 내용은 그들의 삶이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보김에서의 울음과 제사는 그들의 삶에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죄는 저절로 소멸되지 않고 점점 더 심각한 상태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통해 우리 몸의 상태를 살피듯이 영적 상태도 끊임없이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타협하고 있는 죄들이 없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함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고, 우리가 불순종의 죄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십니다. 삶의 근본적 변화를 통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마 3:8).  


 


* 우리의 자세


세속주의 물결에 휩쓸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상황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하심으로 각 지파에게 분배된 지역을 차지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가나안 주민들을 쫓아내기는커녕 자신들의 수고를 대신할 일꾼들로 남겨 두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못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평가는 ‘너희는 하지 않으려 했다’입니다. 이스라엘은 순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럴듯한 이유를 제시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어설픈 변명으로 보십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성전에서 승리의 비결은 군사 전략이나 무장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비대면 예배가 허용되고 길어지는 요즘 상황에서 봉사와 사역에 헌신해야 할 열정이 약해져, 게을러지는 우리 자신을 합리화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완성하지 못한 영혼 구원의 사명이 있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순종하며 치러야 할 영적 싸움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게을러지고 편안함을 추구하는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최선을 다해 순종해야 합니다(고전 9:27).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설교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 날마다 읽고 묵상하는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 다음 세대에 바른 신앙을 전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출애굽 제2세대는 가나안 정복에는 열심을 냈지만 가나안에 살고 있는 자녀 세대에 대한 신앙 교육은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갈렙은 약속의 땅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특히 갈렙의 딸 악사와 사위 옷니엘은 갈렙의 믿음을 그대로 본받았습니다. 이 과정을 보며, 오늘날 그리스도인 부모가 자녀에게 어떤 믿음을 심어주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풍요롭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가 세속적 형통함과 인생의 성공을 동일시합니다. 세상적 조건들을 잘 갖추도록 양육했어도, 자녀들이 하나님과 참되고 친밀한 관계 안에 거하지 못하면 인생의 참된 의미와 행복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모가 세속적인 성공 지향적 사고에서 벗어나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하고 삶을 통해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는 악한 세상의 풍조에 물들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이 사회를 위하여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셔서 악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한편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신실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죄를 범한 하나님의 백성을 포기하신다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죄를 범한 그의 백성에게 무조건 용서하신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어떻게 됩니까? 사사 시대 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 이 딜레마와 긴장은 계속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구속의 죽음을 인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도 만족시키셨고, 하나님의 사랑도 만족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하나님께 전가되고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나님은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세대에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나가면서


가나안 정복은 철저하게 믿음의 토대 위에서 싸우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과 순종 속에서 싸울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유업으로 주신 것은 단지 그곳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면서 가나안에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가나안의 종교와 문화에 동화되어 산다면 이는 애굽에서 바로의 노예로 살던 때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죄로 물들일 수 있는 가나안 주민을 철저히 진멸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가나안 주민을 완전히 내쫓는데 실패했습니다. 대신 가나안 주민과 공존하고 타협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거룩함을 상실하고 신속히 가나안 주민을 닮아가며 영적, 도덕적 타락에 빠졌습니다. 불완전한 순종이 영적 실패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혹시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으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과 함께 성도와 함께 달려가야 할 신앙의 경주를 중도에 포기하거나 세상과 타협하며 엉뚱한 것들과 함께 달리지는 않습니까? 미련, 집착, 타협, 욕심 때문에 벗어버릴 것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신앙의 경주를 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죄가 알게 모르게 우리를 얽어매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신 예수님과 성령님을 통해 죄를 넉넉히 이기도록 모든 능력을 주셨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죄와 타협하거나 죄가 우리 안에 머물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합니다.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다음 세대에 바른 신앙을 전수하고, 십자가를 붙들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시고 완성케 하시는 예수께서 이미 우리의 모든 고난을 담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달려주십니다. 사탄의 권세 아래 있던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음을 늘 인식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약속된 가나안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면서 맡기신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