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세 번째 약속의 성취(2)

Author
hgchoi hgchoi
Date
2022-11-06 23:24
Views
319
성경구절 : 사사기 16:18-31

삿 16:18-31 세 번째 약속의 성취(2)

18 들릴라가 삼손이 진심을 다 알려 주므로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을 불러 이르되 삼손이 내게 진심을 알려 주었으니 이제 한 번만 올라오라 하니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그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19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의 힘이 없어졌더라
20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21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22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23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이르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24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이르되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며
25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26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나에게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하니라
27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블레셋 모든 방백들도 거기에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 명 가량이라 다 삼손이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
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29 삼손이 집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30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31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사사기는 전부 21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6장을 끝으로 사사들의 이야기는 끝나고, 17장부터 21장까지는 보통 사사기의 부록으로 취급합니다. 본문은 삼손 이야기의 마무리를 지으면서 삼손의 죽음을 다룹니다. 그동안 살펴보았듯이 13장은 삼손이 태어나리라는 하나님의 첫 번째 약속의 성취를 다루고 있고, 14-15장은 삼손이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기 시작하리라는 두 번째 약속의 성취를 다루고 있습니다. 16장은 삼손이 죽는 날까지 나실인이 되리라는 세 번째 약속의 성취를 다루고 있습니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었지만 나실인과 너무나 동떨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복습해 볼까요? 나실인에게 세 가지 해서는 안 될 규례가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됩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면 안 됩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삼손은 나실인의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규정을 어겼을 때도 그에 해당하는 의식을 통해 하나님께 헌신하는 예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들릴라와 사랑놀이를 하다가 그가 가진 힘의 비밀에 대해 알려 주고 들릴라에 의해 머리가 밀리게 되었습니다. 삼손에 대한 수치와 모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삼손을 그냥 내버려 주시지 않습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이는 하나님께서 흠 많은 종을 다시 나실인으로 세우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여호와께서 택하신 삼손이 수치스러운 마무리를 짓게 하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힘을 달라는 삼손의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이에 삼손은 다곤 신전을 무너뜨리고 그 신전에 안에 있던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습니다. 삼손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삼손의 삶을 자신에게 비추어 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며 처음보다 끝이 더 아름다운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나실인의 규례를 깨뜨린 삼손(18-22절)
삼손이 들릴라에게 힘의 비밀을 알려 주자 들릴라는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방백들을 부르며 말했습니다. ‘이번만 올라오라. 왜냐하면 그가 내게 진심을 말했기 때문이다’그러자 블레셋 방백들이 약속한 은을 가지고 올라왔습니다. 들릴라는 삼손을 자기 무릎에 뉘여 재웠습니다. ‘무릎’을 뜻하는 ‘베레크’는 ‘복을 주다’는 ‘바라크’와 어근이 같습니다. 또 하나의 언어유희입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며’(바라크) 시작되었던 삼손의 생애가 들릴라의 ‘무릎’(베레크)에서 큰 위기를 맞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삼손을 괴롭혀 보았습니다. ‘머리털 일곱 가닥’은 일곱 가닥으로 땋은 머리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 삼손이 가진 초인적 힘은 그를 떠난 상태였습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삼손의 머리털 자체가 어떤 마법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머리털은 힘의 상징에 불과합니다. 나실인으로 구별되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부름 받은 삼손에게 하나님이 힘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나실인으로서의 정체성의 표시였던 머리털이 잘린 후,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마지막 구별조차 사라졌기에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들릴라가 말합니다.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이에 삼손이 전처럼 힘을 써보려고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삭도를 머리에 대지 말라’는 마지막 규례까지 어긴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삼손은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떠나신 시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들릴라가 그의 머리털을 민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상관없이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살았던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 눈이 뽑히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가사 성읍의 성문, 문기둥, 문빗장을 어깨에 메고 헤브론까지 올라갔던 삼손이 이제는 모든 능력을 잃고 맹인이 되어 가사로 끌려왔습니다. 영화에서는 눈을 뽑힌 삼손이 놋줄에 매여 연자 맷돌을 돌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짐승의 힘으로 돌리는 커다란 회전식 맷돌은 그 당시에 아직 발명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본문은 문자적으로 ‘그가 옥에서 맷돌질 하는 자가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당시의 맷돌은 크고 넓적한 아래짝에 밀대 비슷한 방망이 모양의 위짝을 굴려 곡식을 빻는 형태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맷돌로 곡식을 가는 사람은 쭈그리고 앉거나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선택받은 삼손이 하루아침에 감옥에서 놋줄에 매여 맷돌질을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합니다. ‘시작하다’라는 동사는 삼손 이야기에서 특별한 역할을 합니다. 13:5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삼손의 어머니에게 삼손이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구원하기 시작하리라고 선언했습니다. 13:25에서는 여호와의 영이 삼손을 움직이기 시작하셨습니다. 19절에서 들릴라가 삼손을 괴롭히는 것은 삼손이 겪을 고난의 시작일 뿐임을 보여 줍니다. ‘시작하다’는 동사가 22절에서 다시 나타난 것은 지금 삼손의 상황이 끝이 아니라 무엇인가 새로운 일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머리털이 아니라 하나님이 힘의 근원입니다. 머리털이 다시 자란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삼손은 나실인의 삶을 살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가 ‘태에서부터 죽는 날까지’나실인임을 이미 예고하셨습니다(13:7). 삼손이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대적들을 손쉽게 무찌른 용사였지만 그의 약점을 다스리지 못하였기에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성도가 성도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을 잊어버리면 삼손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은혜를 소중히 여기고 주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거룩함을 추구하며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는 삶이 복된 인생입니다.

조롱당하는 삼손(23-27절)
블레셋 지도자들은 삼손을 생포한 것을 기념하여 그들이 섬기는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축하하기 위해 다곤 신전에 모였습니다. 다곤은 주로 곡식이나 수확과 관련된 신이지만, 여기서는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대적을 넘겨주는 군사적 역할을 맡은 것으로 묘사합니다.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주었다”이 노래에는 ‘우리’라는 표현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24절에는 ‘우리’라는 표현이 더 많이 나옵니다.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주었다”히브리어 본문에는 ‘원수’앞에도 ‘우리’라는 소유격이 붙어 있습니다. ‘우리’를 강조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이 승전가에는 자신들의 신 다곤이 삼손의 신 여호와보다 뛰어나다는 인식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이 삼손의 신을 이겼기 때문에, 그동안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땅을 망쳐 놓은 삼손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고 여겼습니다. 승전가의 내용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 ‘우리 땅을 파괴하는 자’, ‘우리 중 많은 사람을 죽인 학살자.’사실은 이스라엘이 대적인 블레셋을 물리친 후에 이런 승전가를 불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축하는 그들의 신 다곤을 향한 찬양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즐겁다’라는 표현이 축제와 관련해서 사용될 때는 일반적으로 ‘술기운이 올랐다’라는 뜻이 됩니다. 흥에 겨운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이 그들의 손에 넘겨준 승리의 전리품인 삼손을 끌어내 재주를 부리게 했습니다. 삼손이 부린 재주는 아마 눈이 먼 삼손 앞에 장애물을 놓고 때리거나 넘어지게 하면서 그를 조롱하고 웃음거리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조롱당하는 삼손의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불러 재주를 부리게 하면서 그를 두 기둥 사이에 세웠습니다. 삼손은 앞을 볼 수 없었기에 자신의 손을 붙잡고 이끄는 소년에게 한 가지를 부탁합니다. “나에게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직역하면 ‘나를 홀로 있게 하라 그리고 나로 그 집에 세워진 그 기둥들을 느끼게 하라. 그래서 내가 그것들을 의지하게 하라’입니다. 나귀 턱뼈로 천 명을 죽였던 영웅이 두 눈이 뽑힌 채 소년의 손을 붙잡아야 겨우 몸을 가누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당시 신전들은 일반적으로 중앙 복도에 지붕을 받치는 기둥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둥을 쓰러뜨린다면 지붕이 무너져 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신전에는 블레셋 방백을 비롯해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으며, 지붕에는 삼천 명 가량이 있었습니다. ‘지붕’이라고 번역된 ‘가그’는 옥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곤 산전에 모인 블레셋 사람들은 이제 곧 벌어질 일을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삼손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삼손(28-31절)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했던 삼손은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이 구절에서 ‘부르짖다’로 번역된 동사는 ‘부르다’는 뜻의‘카라’입니다. 25절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조롱하기 위해 불렀으나, 삼손은 자신을 생각해 달라고 여호와를 부릅니다. 이전에 목말라 죽게 되었을 때 물을 달라고 기도한 후 마지막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주 여호와여’로 시작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삼손이 두 가지를 요청합니다. 첫째, 자신을 생각하라는 것은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의를 기울여 달라는 것입니다. 둘째, 이번만 자신을 강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삼손은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자신이 누구에게로 향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는 번역에 의하면 ‘나의 두 눈을 뺀’이라는 구문은 삼손이 원수를 갚으려는 대상인 ‘블레셋 사람’을 단순히 꾸며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 구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내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내 두 눈의 원수를 단번의 복수를 통해 갚게 하소서’가 됩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삼손이 단번에 갚고자 하는 원수는 자신의 눈을 뺀 것에 대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나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대한 의식이 있음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저 개인적 복수를 열망할 뿐입니다.

삼손은 신전 지붕을 떠받친 두 기둥 사이에 서서 양손으로 기둥 하나씩을 붙잡습니다. 삼손의 마지막 외침은 문자적으로 ‘내 영이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게 하소서’입니다. ‘내 영’이라는 표현은 몸을 제외한 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전체를 의미합니다.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구별된 나실인 삼손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고자 합니다. 비록 그가 드리는 제물은 두 눈이 빠진 흠이 있는 제물이지만 하나님은 그 제물을 받으십니다. 삼손이 기둥 둘에 양팔을 껴 의지하고 힘을 다해 몸을 굽히자 그 신전이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 위에 무너져 내립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라는 표현은 삼손의 죽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아닙니다. 이처럼 삼손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불임의 집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예고한 대로 나실인으로 태어나 한 몸에 기대를 받고 자랐던 삼손이지만,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저버리고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았던 그의 삶은 다곤 신전이 무너짐과 함께 무너져 버렸습니다. 삼손은 자신의 두 눈을 뽑은 원수를 갚으며 죽고자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이스라엘을 압제해 온 블레셋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삼손의 부적절한 동기와 행동이 정당화된 것은 아닙니다.

삼손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인척들이 찾아와 그의 주검을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에 있는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묻어 줍니다. 그곳은 그가 어려서 자란 고향이며 처음으로 여호와의 영을 경험한 장소입니다(13:24~25). 그의 이야기는 처음 시작된 곳으로 돌아와 막을 내립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삼손은 죽어서야 아버지의 장지에 장사되는 평온함을 누립니다. 비록 삼손이 사사로 20년을 지냈지만, 그 기간에 이스라엘은 여전히 블레셋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을 때 더 많은 블레셋 사람을 죽였던 삼손은 어떤 의미에서 유명무실한 사사였습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당신의 백성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이어집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등장하고 다윗이 등장합니다.

* 우리의 자세
하나님은 한번 삼손을 떠나셨지만 그를 온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여전히 붙잡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결코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많은 것들이 무너져 있습니까? 어디서부터 회복할지 막막합니까?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나를 생각하소서”삼손이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드린 기도의 첫 번째 간구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생각해 달라는 것은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삼손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자기의 개인 능력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의 힘을 믿고 하나님께 엎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닥으로 떨어지고 보니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겸손한 자는 자기의 부족, 자기의 한계, 자기의 죄악됨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신앙은 그분이 나를 위해 하신 것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시고, 예수님이 나를 당신의 보혈로 구속하시고, 성령님은 구원받은 백성으로 인 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은 후로 우리의 신앙이 약해지지는 않았습니까? 우리의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신앙이 회복될 때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디에 서있는지 알게 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 신앙생활을 회복해야 합니다
삼손에게 아쉬운 점은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은 했지만 완성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낭비하였습니다. “나를 강하게 하소서.”삼손이 드린 두 번째 간구입니다. 정체성을 깨달은 삼손이 하나님의 능력을 구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그분을 위해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맏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고, 성령의 능력으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특히 팬데믹을 겪으면서 흐트러진 신앙생활을 회복해야 합니다. 타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영육 간에 강건해지는 것은 우리의 의지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를 늘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신앙여정 가운데 고난은 있습니다. 고난은 삶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의 사람, 인내의 사람, 성숙한 사람으로 빚으십니다. 앞뒤 좌우가 막힌 것 같아도 위로 주님께 길이 열려 있기에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사도 바울도 로마 감옥에서 삼손과 비슷한 내용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딤후 4:17)
- 하나님의 평가를 의식해야 합니다
삼손은 사사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사명을 따르기보다 자기가 보기에 좋은 대로 살았습니다. 삼손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그를 주목하시고 그의 삶을 항상 이끌어 오셨습니다. 삼손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삼손이 살았을 때 죽인 블레셋 사람보다 죽을 때 죽인 블레셋 사람의 수가 훨씬 많았다는 겁니다. 누가 삼손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었습니까?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신 다곤이 삼손을 그들에게 넘겨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삼손을 넘겨준 존재는 다곤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다곤은 아무 능력이 없는 우상에 불과합니다. 그 평가의 진의가 무엇입니까? 죽을 때 죽인 사람의 수가 더 많았다고 하였으니 삼손은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것은 아주 두려운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심각하게 던지는 경고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삼손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사람으로 삼손을 언급하며 그가 믿음으로 이기며 의를 행했다고 평가합니다(히 11:32-33). 삼손이 비록 정욕에 사로잡혀 계속 실수를 반복하기는 했지만 죽음을 통해 실추된 그의 명예를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평가는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20년간 다스렸다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긍정적 평가가 아닙니다. 삼손이 다스리는 동안 그 땅이 평온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삼손의 삶이 모범적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통해 계획하신 일을 이루셨습니다. 어쩌다 보니 혹은 엉망으로 살았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쓰임 받았다는 것보다 이왕이면 에녹처럼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주님의 뜻대로 쓰임 받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이것이 삼손의 스토리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일 것입니다.

나가면서
삼손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어떻게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시며 함께하시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의 꿀로 인해 나실인의 언약을 잊어버린 삼손을 통해 어떻게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며 삼손을 다시 진정한 나실인으로 부르시는지 보여주었습니다. 사자보다 강한 삼손을 무너뜨린 무기는 블레셋의 철제무기가 아니라 이방 여인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단지 성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방 풍습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열망 등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우리의 삶이 낭비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삼손은 언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까? 모든 힘을 잃고 눈이 뽑힌 채 블레셋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재주 부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연약함을 느낄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입니다. 나를 생각하소서. 나를 강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삼손과 같이 때로 당신의 백성에게 고난을 허락하셔서 당신이 맡기신 사명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것을 이루게 해 주십니다. 삼손을 평가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기뻐하시겠습니까? 이제는 불꽃같은 눈으로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철저히 회개하며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께 붙들려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임마누엘의 은혜를 인해 회복된 신앙을 가지고 회복된 신앙생활을 하며 주님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긍정적인 평가를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