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3-28 14:21
Views
613

COVID-19 확산과 맞물려 아시아계를 혐오하는 폭행이나 언어폭력 사태가 최근 들어 급증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한인 여성 4명을 포함 8명이 희생된 어틀랜터 연쇄 총격 사건으로 미국 내 아시아계 인종차별실태가 조명되는 가운데 아시안에 대한 증오 범죄를 멈춰달라면서 공개 규탄 집회가 연일 도처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아마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 중에도 그동안 미국에서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차별이나 조롱이나 심지어 위협을 경험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에 대해 시기하고, 멸시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비겁한 행동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사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수난 이야기는 제자들의 배반과 도주에 이은 예수님의 체포와 심문, 십자가 상의 죽음과 장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수난의 시간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가장 힘들고 암울한 시기이지만, 곧이어 부활의 영광과 승리로 연결되어 주님의 구원 사역에서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줄곧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아오셨으며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의 고난의 자리에 동참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금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주간이라 한다면 지난 삼년 동안 예수님의 택함을 받고 훈련을 받던 열두 제자들이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섬겨야 할 것 같은데 그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도리어 뜻밖의 사람들이 예수님 곁을 지키면서 구속 드라마의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뜻밖의 동반자(21절)


운이 없어도 정말 없다고 여겨지는 경험을 할 때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 날을 재수 없는 날이라고 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그날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시몬의 스토리는 공관복음에서 한 줄씩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죄수들은 채찍질을 당한 후에 처형장까지 자신이 달릴 십자가의 가로대에 해당하는 부분을 직접 지고 가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신 길을 Via Dolorosa라고 부르는데. 라틴어로 ‘Sorrowful Way’슬픔의 길이라는 뜻이고 ‘Way of Suffering’또는 ‘Painful Way’고통의 길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성지 답사의 필수 코스인 Via Dolorosa는 예루살렘 Old City 구역에 있는데, 18세기경에 지금과 같이 만들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멈추셨다는 곳마다 동판으로 번호가 새겨져 있습니다. 지금은 아랍 상인들이 장사하는 좁은 길인지라 이곳을 답사할 때는 사람들이 덜 붐비는 오전 시간을 주로 이용합니다. 


 


가혹한 채찍질과 가시관으로 인해 피를 많이 흘리고 지친 예수님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행렬이 성문을 빠져나갈 때쯤 예수님은 그만 쓰러지셨습니다. 당시 로마 군인은 피지배국의 사람들에게 강제 부역을 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마 5:41에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한다’는 말씀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마침 시몬이 군인들의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구레네 출신이었는데, 구레네는 아프리카 북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현재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에 해당합니다. 이곳에도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구레네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거주지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시몬이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가 졸지에 군인들에게 붙들려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시몬이라면 그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자기가 잘못해서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가야 하다니 얼마나 황당합니까? 아마 골고다까지 계속해서 투덜대며 가지 않았을까요? 빨리 십자가를 처형장에 던져 놓고 예루살렘을 떠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후에 시몬이 어떻게 됐는지 성경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21절에 약간은 추측할 수 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특정한 사람을 소개할 때 보통 누구의 아들로 소개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거꾸로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 소개합니다. 마가복음 독자들이 아버지인 시몬의 이름은 몰라도 아들인 알렉산더와 루포의 이름은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동안 아니면 그 후에 시몬에게 어떤 변화가 나타난 것은 아닐까요? 아마 시몬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의 아들들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추론이 맞는다면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그 날은 사실 억세게 재수 좋은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3:26에 의하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고 합니다. 복음서에서 ‘따르다’는 동사는 제자들에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시몬의 행동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과 크게 대조됩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 16:13). 롬 16장에 나오는 루포가 21절에 나오는 루포와 동일 인물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시몬이 회심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의 아내와 루포에게도 복음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로마 교회 교인들이 되었습니다. 특히 시몬의 아내는 바울을 얼마나 헌신적으로 도왔는지 바울이 루포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 할 정도였습니다. 성경에 시몬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고 충성하였기에 바울은 로마서를 마무리하면서 동역자들에게 그 여인을 문안할 것을 당부합니다. 물론 시몬이 자원해서 십자가를 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졌더니 엄청난 하나님의 복이 임했습니다. 지기 전에 무겁게 느껴지지만, 막상 지고 나면 가벼워지고 기쁨이 오고 감격이 오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시몬은 뜻하지 않게 예수님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아주 힘들어 하실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재수 없는 날을 수지맞는 날로, 은혜의 날로 변화시키는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찾아온 고난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그분을 더 깊이 알게 되고 그분이 베푸시는 은혜를 경험한다면 그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21-27절)


군인들은 예수님을 끌고 골고다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골고다’란 ‘해골’이란 뜻입니다. 그 언덕의 모양이 사람의 해골 모양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입니다. 골고다는 영어로 Calvary인데 라틴어 Calvaria에서 왔습니다. 골고다는 예루살렘 외곽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예루살렘으로부터 멀지 않은 넓은 장소였다는 이유로 공개 처형 방식인 십자가형을 많이 집행했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습니다. 마태는 ‘쓸개를 탄 포도주’라고 기록했습니다(마 27:34). 그것은 일종의 마취제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십자가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처형 방법이었는지를 암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온전한 정신으로 감당하며 구원을 이루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월절 만찬 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 26:29)  


 


본문은 마가복음의 클라이맥스이자 신구약 성경 전체의 클라이맥스로서 구약성경에서 예언되었던 그분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언급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시는 장면과 못 박히시는 장면,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조롱과 멸시를 당하시는 장면 등이 거의 매 절마다 등장하는데, 정작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은 짧게 소개됩니다. 다른 복음서들도 마찬가지입니다(마 27:35; 눅 23:33; 요 19:23). 거기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장면을 묘사하거나, 얼마나 아프실까 하는 등의 감상적인 표현이 없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이 장면을 기록할 때,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그들을 향해 베푸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거나 금식을 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던 요한이 이제는 노인이 되어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특히 주님의 십자가에 대해 쓸 때 그 기분이 어땠을까요? 자신들의 모든 경험과 재주를 다해 십자가를 묘사하려고 했던 각 복음서 기자들의 마음을 억누르셔서 간단하게 기록하게 하신 것은 성령님이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책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도 이 뜻 깊은 순간을 그저 수식어 없이 간단하게 기술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They crucified him).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이 오전 아홉시 경이었습니다. 복음서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행적이 3시간 단위로 기록돼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새벽에 빌라도에게 넘겨졌는데, 여기서 새벽은 해 뜰 무렵(오전 6시 경)일 것입니다. 그리고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고, 군인들에게 조롱당하신 후 오전 9시경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낮 12시경(33절)에 온 땅에 어둠이 뒤덮였고 3시간 동안 계속됐습니다. 그리고 오후 3시경(34절)에 예수님은 큰 소리를 지르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이후 날이 저물었을 때(아마 저녁 6시경, 42절)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장사를 지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유대 지도자들의 계략에 의해 억울하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스스로 결단하고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겟세마네 기도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기 위해 제비를 뽑습니다. 죄수의 옷은 형을 집행하는 자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군인들이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옷을 나눠 갖는 것도 구약 예언의 성취입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 22:18). 그들은 어리석게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영광의 주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그가 남긴 옷가지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마가는 독자들의 시선을 십자가 위의 죄 패로 향하게 합니다. 죄 패에 쓰인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은 빌라도가 대제사장들의 고소를 받았을 때 예수님께 물었던 내용입니다. 그것이 그대로 예수님의 죄목이 되었습니다.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의 죄 패에는 세 가지 언어(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로마 당국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여러 언어로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섰지만, 역설적으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온 천하에 공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좌우편에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들은 ‘강도들’인데, 보통 강도질을 해서는 십자가형이라는 극형에 처해지지 않습니다.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열심 당원들이 종종 그렇게 불렸다고 기록하는 것을 보면, 그 강도들은 열심 당원들과 같이 민란을 일으켜 사람들을 죽이고 소동을 부린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못 박혔다는 서술은 세베대의 아들들의 청탁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영광 받으실 때 자신들을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마시는 잔을 자신들도 마실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실제로 자신들이 무엇을 구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는 당시 로마에서 흉악한 죄인들을 처형하던 도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십자가에 강도들과 함께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떠한 죄인인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자신을 괜찮은 자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그 강도들과 다를 바 없는 흉악한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실 때에도 죄인들과 함께 거하셨고 죽으실 때에도 죄인의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실제로 두 강도 중 한 사람은 주와 함께 낙원에 이르게 됩니다(눅 23:43).


 


마지막 유혹(29-32절) 


마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에 대한 세 부류의 사람들의 반응을 기술합니다. 첫째 부류의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그들이 처음부터 십자가 사형 장면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자들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무기력하게 매달려 계신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자기도 구원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메시아라고 하는가 하며 빈정댑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이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시 22:6-8)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오늘날도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적인 말씀의 의미를 모른 채 어리석은 조롱을 퍼붓습니다. 실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리석고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구원 얻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고전 1:18).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입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유대교에 의하면 메시아는 하나님의 신적인 대리인으로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을 통해 악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구원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메시아가 십자가에 달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신 21:23)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했을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스스로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 기도를 마친 후 받으신 시험은 높은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때 사탄의 요구를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십자가의 주님 또한 그들의 요구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십니다. 자신을 다시 살리실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직 말씀을 신뢰하고 상황과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발언을 통하여 그들 스스로가 신성모독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내려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내려오는 것이라고 소리를 질러 줄 법도 하신데 잠잠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묵묵히 죽음을 당하시는 모습도 예언의 성취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에 대해 회개함이 없이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까지 죄 없는 예수님을 정죄하면서 멸망하는 자의 최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우리는 그 두 강도 중 한 사람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음을 알고 있는데, 마가는 이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그가 구원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이 같은 조롱은 사탄의 마지막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능으로 당장이라도 십자가에서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아니하신다면 인류의 구원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 유혹을 견뎌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바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그들의 말대로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구원하셨고, 또 구원하실 것이지만, 자신만 살겠다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을 통해서도 진리를 선포하게 하십니다.


 


* 우리의 자세


-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조롱하고 해를 끼치던 무리들의 행동은 다 성경에 예언된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준 행동이나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은전 삼십에 판 것도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일련의 행동에 관련된 자들의 죄가 면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습니다. 선택은 그들이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들과 같지 않습니까? 알게 모르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비웃고 모독하며 하찮게 여기지 않았습니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으면 우리가 언제 어떻게 사단의 도구가 되어 말과 행위로 하나님을 대적할 지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천사들이 나팔을 불고 성도들이 부활하여 그를 영접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온전한 신앙고백을 하고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며 주님이 예비하신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 때,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주님의 일을 훼방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살후 1:9).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 주님의 참 제자가 되려면 기도와 말씀 생활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의 삶 가운데 불평과 원망이 싹트게 됩니다.   


- 십자가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셨습니다. 그분이 받으신 모욕과 조롱, 극심한 고통과 정죄됨은 우리를 죄악의 형벌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한 것이 사실은 못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그 끈질긴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구원 사역의 중심일 뿐 아니라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의 모본입니다. 왕이신 주님은 우리를 백성 삼으셨고 또한 주님이 자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게 하십니다. 그 길은 주님처럼 사랑하고 섬기고 희생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간 모든 백성에게 왕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십자가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나가면서


십자가는 예수님의 고난의 상징이요 아울러 우리의 구원의 상징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막혀진 담이 무너지고 잃었던 관계를 회복하는 화해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인하여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죄의 권세로부터 놓임을 받게 되었고 죄로 인한 심판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그저 이천년 전에 유대 땅에서 한 번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에게 계속 일어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그분이 흘리신 보혈이 우리를 씻기시고 우리를 죄악에서 깨끗케 하십니다.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생활을 했는지 점검해봅시다. 주님이 우리를 통하여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고난주간에 주님과 기도와 말씀을 통해 그동안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고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면서 주님이 누구신지 알고 주님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역동적으로 섬기기를 다짐하면서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고난주간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