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침묵하신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3-21 16:53
Views
397

지난주에 YouTube를 통하여 KBS에서 방영된 유럽에 있는 명품 식당 시리즈를 보았습니다. 프랑스의 빵집과 치즈가게, 이탈리아 피자가게와 Gelato 가게 등등. 그들 모두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숱한 위기와 역경 속에서 그들이 생존했을 뿐 아니라 나라를 대표하는 가게가 될 수 있었던 공통점이 무엇인가 정리해보았습니다. 첫째, 최상의 식재료를 사용합니다.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주로 local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 중에서 엄선해서 사용합니다. 둘째, 주인이나 종업원들이 가게에 대한 열정이 있습니다. 100년 이상이 된 가게들이다보니 자녀들이 대를 이어 사장이 되고 자녀들이 여럿 있으면 역할을 분담하기도 합니다. 2-30년 이상 한 곳에서만 일하며 청춘을 보낸 종업원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 그 가게에서 일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셋째, 전통적인 조리방식을 고수하면서도 변화하는 trend에 맞춰 새로운 메뉴 개발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맛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주장에 적지 않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하셨는데 그렇다면 소금의 짠맛을 가지고 있습니까?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한번 밖에 없는 우리의 삶인데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왕이면 명품 제자들, 명품 교인들이 되어야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 위해 이것만은 타협할 수 없다는 것들이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의 삶을 drive하고 있습니까? 현재 사순절을 보내고 있고 29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금주와 다음 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게 되시는 과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기 위하여 악역을 담당한 사람들의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행동조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의 구원이란 선한 목적에 사용하십니다. 등장인물들에 각자를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예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충성스런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두 종류의 재판을 받으시는데 하나는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행해지는 종교재판이요, 또 하나는 빌라도 앞에서 행해지는 정치 재판입니다. 대제사장 집의 안뜰에서 열린 재판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 주장했다는 이유로 신성모독죄를 적용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신성 모독죄는 사형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는 로마가 다스리고 있었기에 공회에서는 공식적인 사형 언도를 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문제를 총독인 빌라도에게 가져오는데 신성 모독죄는 로마법에 저촉되지 않으니 고소 내용을 슬그머니 바꿉니다. 대제사장 무리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 주장했다는 이유로 로마 황제의 왕권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는 반역죄로 고소합니다. 


 


빌라도의 정치 재판(1-5절)


유대인들이 새벽에 빌라도를 찾아온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처형을 몹시 서두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목요일에서 금요일로 넘어가는 밤에 기습적으로 예수님을 체포했습니다. 이제 금요일 새벽이 밝았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금요일 안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했습니다. 그 다음날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안식일 이후로 예수님을 처리하는 것이 미루어지면 그 사이에 백성들 사이에 예수님의 체포에 대한 소문이 다 퍼지게 될 것이고 그럴 경우 일이 그들의 생각대로 진행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일주일전에 예수님이 성안으로 들어오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친 사람들 중에 예수님에 대해 우호적인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 안에 계실 때도 함부로 잡지 못한 것은 무리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종교지도자들인지라 그들이 예수를 겟세마네에서 체포할 때나 재판할 때나 빌라도 앞에 끌고 갈 때에나 인적이 드문 시간을 이용했습니다. 


 


예수님은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급하게 소집된 모임에 끌려가셔서 졸속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원래 산헤드린 법정에서의 판결, 그것도 중형에 해당하는 판결은 하루 정도 지나고 나서 내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는 이런 절차가 완전히 무시되었습니다. 두 명 이상의 제대로 된 증인이 확보되지 않았고, 최종 판결을 즉결심판처럼 내렸습니다. 이른 새벽에 대제사장들은 다른 공회 의원들과 함께 다시 공회를 열었습니다. 간밤에 가야바의 집에서 가졌던 모임은 불법적인 성격이 강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유월절에 도리어 죄 없는 사람을 죽이도록 계교를 꾸밉니다. 자신들의 유익 때문에 한 사람의 생명을 거침없이 희생시키려 하는 유대인 지도자들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까지라도 기꺼이 내어놓으려는 예수님의 모습은 대조를 이룹니다.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며 자기들의 의를 내세우는 그들이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어기며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갔습니다. 빌라도는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 지방을 다스린 제 5대 총독으로 티베리아 황제 때 서기 26-36년까지 재임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를 로마에서 후원하던 Sejanus가 몰락하였습니다. 믿었던 권력의 줄이 사라진 상태에서 빌라도는 그의 정치적인 입지가 좁아진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신병을 인도받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유대인의 왕’은 ‘다윗의 자손’(12:35), ‘이스라엘의 왕’(15:32), ‘찬송 받을 이의 아들’(14:61) 등과 같은 호칭이 아니라 경멸적 의미가 담겨있는 호칭이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네가  ... 그리스도냐”(14:6)라고 경멸하듯 예수님께 질문한 것처럼 빌라도도 예수님을 조롱하는 태도로 질문했을 것입니다. 이 칭호는 후에 십자가 위에 걸린 죄 패에도 기록되었습니다(15:26). ‘네 말이 옳도다’를 직역하면‘네가 말한다’입니다. ‘네가 말해 놓고 왜 묻느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확실한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진정한 왕이 맞습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생각한 정치적인 왕은 아닙니다. 설령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고소를 받으셨더라도, 정치 세력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이상 정치범으로서 중형을 부과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들이 안심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부족해 보이는 예수님의 죄목을 보완하고자 ‘여러 가지’로 고소했습니다. ‘여러 가지로’번역된 말의 헬라어는 ‘많이’라는 뜻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이들이 어떤 내용으로 고소했는지 언급돼 있지 않은데,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이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고,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말하며 다닌다는 이유로 고소를 했습니다(눅 2:32). 그러나 빌라도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말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고소가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아가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전에 가야바의 집에서도 증인들이 나와 거짓 증언을 할 때에 예수님은 그들의 고소내용을 반박하면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수 있었지만 잠잠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빌라도 앞에서도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여러 가지로 고소를 당하나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대제사장들 앞에서의 재판과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의 공통점은 예수님 자신이 무죄함을 밝히거나 유리하게 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잠잠하시고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질문에서는 입장을 분명히 하며 재판의 결과를 자신에게 도리어 불리하게 이끌고 간다는 점입니다. 재판의 성격으로 보아 죄가 드러나면 사형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자신에게 가능하면 유리하게 변론하려고 애쓰는 일반 피고들과 달리 예수님은 어떤 항변도 하지 않으시고 침묵으로 일관하시니, 그 행동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아 빌라도는 그 모습에 놀랐다고 합니다.  


 


명절에 있는 특별 사면(6-11절)


로마 당국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유월절과 같은 명절이 되면 백성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풀어주는 일종의 특별사면을 시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애굽에서 구원된 것을 기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귀한 절기에 죄수 한사람을 놓아준다는 것은 뜻 깊은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침 그때에 바라바라 하는 악명 높은 죄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민란을 선동했고 민란 중에 사람을 죽인 죄목으로 투옥되어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리가 빌라도에게 나아와 관례대로 죄수 한 명을 석방시켜 달라고 요청하자, 빌라도는 이를 계기로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재판이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심 때문에 시작된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시기한 이유는 예수님이 놀라운 이적과 가르침을 베풀면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많은 논쟁들은 예수님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한 종교 지도자들의 공격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이 공격할 때마다 지혜롭게 대응하시자, 사람들은 더욱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고, 종교 지도자들은 점점 권위를 잃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성전을 타락한 강도의 소굴이라고 비판하시니 그들의 미움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종교 지도자들은 그동안 독점적으로 누리던 기득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예수님을 시기했습니다. 빌라도는 무리에게 ‘유대인의 왕’을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바라바’라는 아람어 이름은 ‘아들’이란 뜻의 ‘바르’와 ‘아버지’라는 뜻의 ‘아바’가 결합된 단어로서, 직역하면 ‘아버지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십니다. 무리는 두 명의 ‘아버지의 아들’가운데 한 사람을 택해야했습니다. 사람을 죽인 바라바 보다 당연히 아무 죄가 없는 예수를 넘겨 달라고 할 것이라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하였는데 대제사장들의 선동에 넘어간 무리는 빌라도의 예상과 달리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요구합니다.  


 


십자가 형을 허락하는 빌라도(12-15절)  


당황한 빌라도는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묻습니다. 그러자 무리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다시 소리칩니다. 이에 빌라도는 무리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만한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고 묻습니다. 마가가 이렇게 당시 상황을 자세히 적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실행된 것이 아님을 부각시키기 위함입니다. 대제사장들에게 선동되고 군중 심리에 사로잡힌 무리는 소리를 더 높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합니다. ‘소리 지르다’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상태를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실 때에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10:47)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는 예수님께 자비와 도움을 구할 때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리서 무리는 나쁜 의도로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로 번역된 문장은 2인칭 단수 과거명령형입니다. 군중이 빌라도에게 명령하듯이 당신은 예수님을 지금 당장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고소한 제사장 무리들은 슬그머니 뒤로 빠지고 무리들이 검사의 입장에서 구형을 하고 있습니다. 살인범인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합니다. 무리는 자기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사단의 도구가 되어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빌라도의 선택입니다. 마 27:24에 의하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아무래도 불안하니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합니다. 손을 씻는 것은 어떤 행위에 대하여 자신은 무죄함을 보이는 유대인의 관습이었습니다. 자신은 예수 죽인 것에 책임이 없다고 사람들 앞에서 선언합니다. 그런다고 빌라도의 책임이 면해집니까? 가룟 유다가 예수님 판돈을 대제사장에게 돌려준다고 그가 저지른 행동이 용서를 받습니까? 회개 없이는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최종 재가권을 가진 자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무리의 위세에 눌려 그들을 만족시키고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 주고 대신 바라바를 놓아줍니다. 무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민란이 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지위에 대한 집착, 또 그것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파괴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악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는 먼저 채찍질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병사들은 죄수를 발가벗긴 채 날카로운 금속이나 뼈 조각들이 박힌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이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당기려는 조치로 보입니다. 


 


* 우리의 자세


- 침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심문에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의 침묵 속에 빌라도는 무엇인가 압도되는 위엄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구약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가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것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예수님의 침묵은 약자의 절망적인 체념이 아닙니다. 실상은 이 재판의 주관자가 빌라도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폭력에 대항할 능력이 부족해서 십자가에 못 박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 계획에 따라 스스로 인류를 위해 대속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런 침묵의 힘은 바로 주님이 평소에 하신 깊은 기도, 간절한 기도로부터 나왔습니다. 죄인을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여 자신의 몸을 드리려는 예수님의 굳은 결의를 엿보게 합니다. 예수님은 각종 억울한 누명과 악의적인 고발에 대해 어떤 변명이나 반박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셔야만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와 실수는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만을 변호하기에 급급한 오늘의 세태 속에서 대속의 죽음을 향해 침묵하며 나아가시는 주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대립과 갈등이 난무한 곳에서 예수님의 진실함과 침묵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화목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 무엇이 삶을 주관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한 것도 알았고,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시기로 넘겨준 것도 알았고, 간밤의 꿈에 예수라는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으니 그 사람의 일에 상관 말라는 아내의 조언도 있었으나(마 27:19) 자기의 지위를 지키려는 집념 때문에 영원히 후회할 만한 결정을 하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꼭 죽이겠다는 마음도 꼭 살리겠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가 없음을 확신하고도 고소하는 내용이 조작된 것임을 알고도 목소리 큰 자들의 주장에 굴복했습니다. 인간적인 양심은 기꺼이 떨쳐 버리고 권력을 좀 더 유지하겠다는 정치적인 야망만이 그의 생을 주관하였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변명을 할 수는 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애를 썼는데 무리가 우겨서 할 수 없이 그랬다고. 그러면서도 심령이 불안하니 사람들 앞에서 손을 씻었습니다. 가장 후회할 만한 선택을 한 빌라도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 수억의 성도들이 사도 신경을 외울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하며 십자가형의 총책임자로 빌라도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무엇을 하느냐가 보다 무엇이 그의 생을 주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행위 자체보다 동기가 더 중요합니다. 과연 무엇이 현재 나의 생을 주도합니까? 나의 삶에 있어 최우선순위가 무엇입니까? 출세, 돈을 많이 모으는 것, 남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나, 그런 것들이 우리의 생의 목표가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목표를 먼저 이루고 나서 나중에 하나님을 제대로 섬겨 보겠다고 합니다.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중에, 나중에”우리가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자기를 위하여 쓰고 싶은 것 다하고 주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시기하여 빌라도에게 넘겨준 대제사장들이나 권력을 위해 무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빌라도나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의 동기에 시기와 탐욕이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 베푸신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 주고 바라바를 놓아 줍니다. 바라바가 달려야할 십자가에 예수님이 대신 달리심으로 바라바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벌레만도 못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주셔서 구원하신 그 놀라운 사랑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삶은 사랑으로 시작해 사랑으로 끝이 났습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십자가를 통해 보여 주신 그 사랑을 찬양하며 날마다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며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크고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방해하려는 사단의 계획에 많은 자들이 참여했습니다. 진리를 잊어버리고 군중을 선동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는 종교 지도자들,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악의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무리, 정치적인 생명의 연장을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준 빌라도. 그들 모두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신들이 하는 행동이 무슨 뜻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사단의 도구가 되어 예수님을 희롱하며 예수님에게 고통과 모욕을 주었습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오신 구세주 대신 생명을 빼앗은 살인자를 선택한, 타락과 난맥이 극에 달한 유대 사회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에 각처에서 모인 유대인들에게 성령이 충만하여 외쳤습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는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행 3:34). 혹시 나의 모습 속에 그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자들마저도 떠나 버린 그의 인생에 있어 마지막 때요, 외로운 때에 주님은 침묵 속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십니다. 모든 시련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자신이 가진 초자연적인 능력을 사용하여 피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평소의 기도를 통하여, 특별히 겟세마네의 동산에서의 마무리 기도를 통하여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닫고 십자가를 지실 결단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난가운데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인하여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을 생각해봅시다. 행위보다 말이 앞서지 않습니까? 무엇이 나의 삶을 주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 번 대속의 은총을 베푸신 주님께 감사하며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