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3-14 14:14
Views
556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고 터무니없이 자기주장만 하며 막무가내로 우길 때 난처해집니다. 더구나 사실인줄 알았으면서도 모르는 척 감추고 진실을 왜곡할 때 답답해집니다. 그러다가 그 주장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 아니면 말고 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면 허탈해집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명백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도 종교지도자들은 사탄의 역사라고 우깁니다. 빛을 어둠이라고 하니 얼마나 모순입니까? 그런데도 이 모순이 통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마귀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진행되면서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가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 점점 밝혀지는데, 이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크게 둘로 나뉩니다. 예수님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오해하며 모함하는 가입니다.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가족들이 예수님을 붙들러온 이야기 중간에 서기관들이 와서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 주장하는 바알세불 논쟁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여러 번 등장하는 소위 샌드위치 구조인데, 얼핏 보면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이야기를 신학적 논점으로 설명하는 마가복음의 독특한 문학적 구조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누구보다도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지지를 해야 할 텐데 도리어 예수님을 비난할 뿐 아니라 죽이려고 할 정도로 아주 적대적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메시아와 예수님을 연결시키지 못하니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이단이요,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성가신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서기관들을 보내어 예수님의 가르침을 조사하게 합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귀신에 사로잡혔고 사탄의 능력으로 이적을 행했다고 비난합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을 통해 우리를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바로 알고 그분께 나아가 죄 사함 받으며 그분의 뜻대로 행하는 주님의 참된 가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기관들의 주장(22절)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의 권세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놓고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더불어 논쟁을 벌이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중심입니다. 서기관들은 예루살렘을 대변하는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권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식은 있으나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 없이는 사랑도 없습니다. 사랑 없이 의로움만 남은 상태에서는 비난이 그치지 않습니다. 마가는 서기관들의 비난을 두 가지로 언급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바알세불에게 지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귀신들의 왕에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는 것입니다. 이 두 비난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귀신 축출 능력과 관련해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지폈다’라는 말은 ‘가졌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관용구로 귀신이나 악령에 ‘사로잡히다’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바알세불은 유대인들이 사탄을 빗대어 하는 말로 ‘귀신의 왕’을 뜻합니다. 무당들이 작두위에서 춤을 춥니다. 어떻게 무당의 발이 작두의 시퍼런 날에 베이지 않고 멀쩡할 수 있습니까? 귀신에 사로잡혀 귀신의 능력을 받기 때문입니다. 감기만 걸려도 귀신의 역사라고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문제지만 귀신의 존재를 무시하고 귀신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사탄에게 조종을 당하고 사탄으로부터 능력을 받는다고 하며 예수님의 사역을 사탄의 행위로 정죄합니다. 그동안 살펴본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성령을 받아 성령으로 충만한 분이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분이십니다. 사탄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기는커녕 사탄에게 시험받으신 분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 그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고백했으며(1:21-27),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불렀습니다(3:11).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귀신 들려 그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주장했으나, 실상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그들이야말로 사탄의 권세 아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단순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서 나온 것이요, 열광적으로 몰려드는 무리를 예수님으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머리를 밟으시고 그 아래 종노릇하는 비참한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뿌리친 것이요, 크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짓밟은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독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반박(23-26절) 


예수님의 사역이 자칫하면 사탄의 사역으로 오해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악의에 찬 주장에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그들을 불러 비유를 통해 논리적으로 반박하십니다.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이 질문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서기관들의 비난을 반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쟁하는 나라와 가정에 대한 비유를 통하여 그들이 전개한 논리의 허점을 지적하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축귀 사역이 실제로는 사탄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인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하는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여기서‘나라’는 역동적인 ‘다스림, 통치’를 의미하는 ‘왕국’을 뜻하며 왕조, 영토, 국민 등까지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집’으로 번역된 ‘오이키아’는‘가족’을 뜻합니다. 나라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면 그 나라는 견고하게 설 수 없습니다. 집안에서 가족끼리 서로 헐뜯고 싸운다면 그 집안은 엉망이 됩니다. 사탄은 스스로 분열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사탄의 사역이라면 사탄이 귀신들을 내쫓는 격입니다. 사탄이 자기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아담과 하와를 미혹한 이후로 계속 하나님을 대적해왔는데, 그런 사탄이 예수님을 통하여 귀신들을 쫓아내면서 자기 나라를 약화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탄의 능력이 사탄의 세력을 없애는데 사용될 수 없다고 하시며 서기관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반박하십니다. 


 


예수님의 자기소개 (27절) 


24-26절이 나라와 집과 사탄이 내분에 의해 망하는 것을 말한다면, 27절은 강한 자의 집이 더 강한 자에 의해, 즉 외부 세력에 의해 강탈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탄의 나라가 내분에 의해 자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시면서 서기관들의 비난을 반박하셨다면, 27절에서는 귀신 축출의 본질, 즉  예수님이 사탄을 결박하심을 말씀합니다. 여기서 ‘강한 자’는 사탄이고, ‘강한 자의 집’은 ‘사탄의 나라’이고, ‘강한 자의 집을 강탈하는 자’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강탈 행위는 귀신 축출을, 그리고 예수님이 강탈하는 ‘강한 자들의 재산들’은 사탄과 그의 부하들인 귀신들에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강한 자’였습니다. 그는 죄로 타락한 인간들의 영혼과 육체를 마음대로 오랫동안 지배해왔습니다. 강한 자가 완전히 무장을 하고 집을 지킬 때에 그의 소유들은 안전합니다. 하지만 더 강한 자가 오면 그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들을 가지게 되는 것처럼 사탄은 예수님 앞에서 약한 자로 전락하였습니다. 사탄은 ‘강한 자’로 예수님은 ‘더 강한 자’로 비유됩니다. ‘더 강한 자’라는 개념은 이미 1:7에서 ‘능력 많으신 이’로 소개된 바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탄의 세력을 제압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영적인 전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사이에 싸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으로 사탄을 압도하고 그의 밑에서 신음하고 고통을 받던 자들을 자유케 하고 회복시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 이사야의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경고(28-30절) 


28-29절은 예수님이 귀신 들렸다는 주장에 대한 답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사탄의 일로 비난하는 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예수님께서 엄숙한 선언을 하실 때에 많이 쓰시는 표현입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이 부분은 성경 난해 구절 중 하나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모든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여기서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일반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에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회개하면 어떤 죄라도 용서함 받습니다. 예수님도 용서하지 못할 그런 죄는 없습니다.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에 대해 회개하는 한 하나님이 계속해서 용서해 주십니다. 


 


그런데 용서 받지 못하는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성령 모독죄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함을 얻지 못하는 죄가 있다는 말이 우리에게 당혹감을 줍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내가 혹시 성령 모독죄를 범하지는 않았는지 두려운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령 모독죄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표현입니다. ‘영원히 사함을 얻지 못한다’, ‘영원한 죄가 된다’는 말도 죄의 심각성을 강조합니다. ‘모독’한다는 것은 권위를 모독하고 무시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은 성령을 통해 하시는 것인데, 이를 ‘귀신의 왕’이 하는 일로 모함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 성령의 권위를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마치 어둠을 빛이라 하고 빛을 어둠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귀신 들렸다고 하고 그분이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하시는 일을 귀신의 일로 모독한다면 그는 자신을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자리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성령 모독이 영원히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는 엘리가 그의 두 아들에게 한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삼상 2:25). 대답은 ‘없다’입니다. 아버지 엘리 제사장의 말을 듣지 않은 아들들은 결국 여호와의 심판으로 죽임 당했습니다. 요약하면, 성령 모독죄란 예수님의 사역을 사탄의 것이라고 하여 하나님을 모독할 뿐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나타난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부인하고 대적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된 소문을 듣거나 오해하여 거역하는 말을 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을 직접 확인하고도 그것을 부인하며 거역하는 것은 분명히 성령을 대적하는 죄입니다. 성령을 대적하면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죄 용서 사역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자는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합니다. 말은 말하는 사람의 마음과 정체를 반영하므로 심판의 근거로 작용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해 심판 날에 심문받고 정죄 받을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웠기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귀신들렸다고 하면서 모독하였습니다.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니 자기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죄를 깨닫지 못하니 용서해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용서 받기 위한 전제조건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도 않는데 저절로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회개해도 용서를 받지 못하는 어떤 심각한 죄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회개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굳어져서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마가복음 1장부터 3장을 죄 사함의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1:4-5). 예수님께서 같은 맥락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2:10). 예수님을 비방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2:17)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심령도 멸망치 않고 다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구원 계획을 세우시고, 성자 하나님은 구속 사업을 이루시고, 성령 하나님은 그 일을 성도에게 적용시키십니다. 그런데 성령을 모독한다면 죄 사함 받는 길을 막는 것이니 방법론적으로 볼 때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30절에서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 들렸다’는 표현은 22절에서 ‘예수님이 바알세불에 사로잡혔다’는 말의 반복입니다. 다만 ‘바알세불’이 ‘더러운 귀신’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이런 대체를 통해 마가는 세 가지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바알세불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줍니다. 더러운 귀신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30절의 ‘더러운 귀신’은 앞서 있었던 예수님의 더러운 귀신 축출 사역을 알고 있는 독자에게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는 서기관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29절에서 언급된 ‘성령’과 ‘더러운 귀신’을 대조시킴으로써,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귀신 축출 능력의 근원을 완전히 오해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자세 


- 신앙생활은 마귀와의 영적 전쟁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저 일주일 한번 교회당에 나오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의 삶이 영적 전쟁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성도들의 씨름의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라고 합니다. ‘씨름한다’는 말의 어원을 보면 ‘레슬링을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제한된 공간에서 맞붙어 싸워야하고 마주 잡고 뒹굴어야 합니다. 싸우는 전선이 따로 없기에 이 싸움은 더욱 힘듭니다. 미국이 월남에서 고전하다가 마침내 철수했습니다. 지금도 아프카니스탄에서 고전하고 있습니다. 전선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교지만 영적인 싸움터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모든 삶의 현장이 영적인 싸움터입니다. 가정, 학교, 사업장, 심지어 교회까지라도 싸움터가 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조종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마귀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마귀는 성경에서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 ‘시험 하는 자’(마 4:3), ‘살인자/거짓말하는 자’(요 8:44)로 그려집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벧전 5:8). 공격할 대상을 찾기 위하여 분주하게 다니면서 일단 목표물을 발견하면 사정없이 달려듭니다. 마귀의 조력자들이 있는데 정사/권세/어두움의 세상주관자/하늘에 있는 악의 영 즉 귀신들입니다. 사탄의 세력은 막강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미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사탄의 힘을 과소평가하지도 말고 과대평가하지로 말아야 합니다. 그 세력을 멸하실 때까지 더 강한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안에서와 그의 강한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라고 권면하면서 성도들이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믿음이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는 영적인 싸움에서 계속적으로 싸울 힘을 공급받기 위하여 기도에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 성령의 인도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보혜사’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곁에 있도록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곁에 계시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은 믿는 자들을 통하여 이 세상 사람들을 책망하십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죄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책망하십니다. ‘의’란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기질은 본질상 이런 순종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가 순종하도록 우리를 설득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책망하십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면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이요 귀머거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이적 행하심을 보고도 귀신들린 자의 소행으로 몰아세웠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의 근본 죄성을 치료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들추어내어 철저히 회개하게 하십니다. 성령을 의지할 때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더럽고 흉악한 죄를 지었을지라도 주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다 용서함을 받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성령 모독죄의 특징은 죄 용서를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not asking forgiveness of sins). 


    


나가면서


예수님은 사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권능으로 사탄을 결박해 그에게 사로잡힌 죄인을 구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더 이상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죄에 종노릇하지 않으며, 의와 평강과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로 옮겨집니다(골 1:13). 그렇기에 구원받은 백성은 성령 안에 의와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롬 14:17). 성도는 어둠에 거하지 않기 위해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거룩한 통치를 구하며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사탄은 ‘강한 자’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시는 예수님은 ‘더 강한 자’이십니다. 이 살아계신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궁극적인 승리는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고전 15:57) 한다고 고백합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세상의 것을 비우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움 받아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주님과 동행하며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