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새 시대를 여신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2-21 17:35
Views
343

지난 2월 17일이 재의 수요일, 즉 Ash Wednesday였습니다. 그날부터 시작해서 부활절 전날인 4월 3일까지 사순절로 지킵니다. 작년 사순절은 COVID-19의 시작과 함께 보냈습니다. 일 년 동안 지구촌에서는 1억 천만 명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250만명 가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백신 접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COVID-19의 확진세가 한창 때보다는 떨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방심할 수 없습니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사순절이 찾아왔습니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번 사순절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을 묵상하며 섬김의 자리로 연결되는 의미 있는 기간을 맞이해야 합니다. 본문을 통하여 사순절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내야 할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막 2:1~3:6은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을 담고 있습니다. 죄인을 보는 관점이나 율법을 이해하는 관점에 많은 차이가 있다 보니,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바리새인들의 형식적 율법주의와 계속해서 충돌을 일으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레위를 부르신 이야기로부터 촉발된 논쟁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 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과 연결되며, 이것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으로부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식탁 교제 논쟁


- 레위를 제자로 부르심(13-14절) 


예수님이 다시 나가신 바닷가는 가버나움 근처의 갈릴리 바닷가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 지역에 널리 퍼져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큰 무리”가 원문에는 ‘모든 무리’로 되어 있습니다. 앞서 세례자 요한의 사역에 대해서도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1:5) 세례를 받았다고 했는데, 여기서도 과장법을 사용합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뜨거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가르치시니라”가 지속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리가 모이면 여전히 가르치신다는 겁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신 이야기는 바닷가에서의 두 번째 부름 기사입니다. 예수님은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셨습니다. 가버나움은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영토와 빌립이 다스리던 영토 사이에 있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레위는 헤롯 안티파스 치하에서 일했던 관세청 세리로 보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세리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지탄받는 대상이었습니다. 과도하게 세금을 거두어 그 중의 일부를 자기 몫으로 챙겼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방인과 돈거래를 하기 때문에 정결법상으로도 부정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재판의 증인으로 채택될 수도 없었고 회당에서도 축출되었으며, 사람들은 그의 가족과도 사귀기를 꺼려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레위가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역시 다른 세리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레위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를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릅니다. 레위가 ‘일어났다’는 것은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그들의 소유를 ‘버렸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부름에 일어나 따르는 레위의 모습 속에서 새로운 삶의 전환으로 결단하여 나아가야 할 제자의 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죄인 취급당하던 세리를 제자로 부르셨습니까? 예수님에 의해 건설되는 하나님 나라가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임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자격이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기초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자격 없는 자를 부르셔서 그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고 거룩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 차별 없는 은혜 때문에 우리가 부름 받았으니, 우리도 베푸신 은혜에 감격하여 차별 없이 이 사랑을 전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 세리와 죄인들과 식탁 교제(15절)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기뻐서 레위는 집에서 잔치를 벌이며 자기의 친구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세관을 떠나야했기에 송별회의 성격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레위와 예수님만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처음으로 ‘제자’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여기서“죄인들”이라 함은 도둑이나 살인자들과 같이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라기보다 종교지도자들이 정해 놓은 의식적인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먹고살기 바쁜 서민들이 복잡한 규정을 제대로 지킬 만큼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부정한 자들이요, 죄인들이었습니다.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식사하는 사람을 용납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경건한 유대인이 정결 규례 상 문제가 있는 사람들과 식탁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과 더불어 식사하시는 파격을 보이셨습니다. 레위 집에서 벌어진 잔치는 종말에 있을 천국 잔치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며, 그 잔치의 자리에 세리들과 함께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천국 잔치에 초청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따름이러라’는 미완료형으로 지속적인 따름을 나타냅니다. 유대 사회에서 죄인으로 취급당하고 소외받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따랐다는 것입니다. 


 


- 바리새인들의 질문(16-17절)


이 논쟁에 등장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바리새인들의 서기관들’인데 신약 전체를 통해 여기에만 등장합니다. ‘바리새파에 속한 서기관’이란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엄격한 정결법 규정을 삶에 적용하고 실천했습니다. 따라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누시는 예수님의 거침없는 행동은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정결법을 위반하는 행위였습니다. 중풍병자의 치유 사건 때 ‘죄 사함 받았다’는 예수님의 신성모독적 발언에 놀랐는데 지금은 세리, 죄인들과 식탁 교제를 나누시는 예수님의 행위에 당혹감을 느끼고 제자들에게 불만을 표출합니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하고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이를 전해들은 예수님은 두 가지로 대답하십니다. 하나는 속담을 인용해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고 하시며, 그들의 질문에 대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세상적 원리를 제시하십니다. ‘의사’는 예수님 자신, ‘건강한 자’는 ‘의인’그리고 ‘병든 자’는 ‘죄인’을 가리킵니다. 곧 의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병든 자인 것처럼,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십니다. 의인은 원래 ‘언약 백성으로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는 자’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율법의 모든 의무를 다 지켜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는 자’, 즉 ‘자칭 의인’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은 더러운 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킴으로써 정결한 상태를 유지하려 했고, 그것을 의로움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의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영혼이 병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건강하다고 자만하는 바리새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핍박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의 자리에 초대받는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변두리 인생들인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고 식탁 교제를 나눔으로써 그들을 받아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금식 논쟁 


- 금식 문제 제기(18절)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 예수님과 이를 비방하는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혼인집 비유와 생베 조각 비유, 새 포도주 비유를 통해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지 알려 주십니다. “금식하고 있는지라”에서 “금식하고”는 현재분사로 ‘금식하곤 했다’고 하는 습관적인 동작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계속 금식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는지 묻습니다. 다른 논쟁들은 어떤 현장에서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행한 말이나 행동이 문제가 돼 그 자리에 있던 종교지도자들이 이의를 제기하지만, 여기에서는 제자들이 어떤 상황에서 행한 행동이 아니라, 그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 ‘평상시의 관행’이 문제가 됩니다. 15-17절에서 논쟁의 주제가 먹는 것과 관련된 식탁 교제였다면, 18-22절의 주제는 그와 반대로 먹지 않는 것과 관련된 금식입니다.


 


구약에서 금식이 요구되는 경우는 일 년에 단 한번 속죄일입니다(출 20:10; 레 16:1-34) 이 날은 음식을 금하여 몸과 영혼에 고통을 가하면서 회개하여 죄를 씻고 속죄제를 올립니다. 따라서 금식의 성경적 의미는 ‘참회를 위한 고행’과 그것을 통한 ‘죄로부터의 정결’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한 주에 두 번씩, 즉 월요일과 목요일에 자발적인 금식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눅 18:12).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의미(사 58:6)를 상실하고 형식적 율법주의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금식을 다른 사람들의 경건과 의를 판단하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금욕적인 모습을 보였으므로 요한의 제자들도 바리새인들의 금식에 버금가는 금식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금식하셨고, 금식에 관한 교훈을 하신 것(마 6:16-18)으로 보아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에 대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던 것(마 11:19)으로 보아, 예수님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이 금식과는 거리가 먼 분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율법의 형식보다는 율법의 정신을 강조하시는 예수님의 특징상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금식에 대해서 크게 강조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 결혼식 비유(19-20절)


예수님은 먼저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시면서 세 개의 비유를 통해 답변하십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결혼식 잔치에 빗대어 자신을 ‘신랑’으로, 제자들은 ‘잔치에 참여한 손님들’로 비유하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되며, 결혼 잔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회복을 뜻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결혼식은 보통 며칠에 걸쳐서 큰 잔치로 진행됐습니다. 결혼식 손님들이 금식할 수 없는 이유는 신랑이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동안이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제자들과 함께 있는 시기를 말합니다. 구약의 전통에서 결혼과 결혼 잔치가 종말론적 구원 시대를 상징한다고 할 때,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이란 구원의 시대가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도래했음을 뜻합니다. 이미 구원의 시대가 왔기 때문에 금식이 아니라, 기쁨과 축하의 잔치가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에 금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금식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으십니다. 결혼식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은 금식할 수 없지만, 신랑의 빼앗기는 날이 오면 금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견하셨고, 그날이 오면 제자들이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0절은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의 비유(21-22절)


예수님의 비유적인 언급은 정결 규례와 금식에 대한 하나의 구체적인 본보기가 됩니다. 생베조각 비유는 낡은 옷의 헤어진 곳을 깁기 위해 새 천을 대면 그것이 낡은 옷 자체를 끌어당겨 완전히 망가뜨린다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헌옷을 살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새 천으로 상징되는 예수님의 새 질서가 옛 질서에 붙어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두 번째 비유도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포도주는 염소 가죽으로 만든 부대에 담아 발효시키거나 운반했으며, 새로 담은 포도주는 발효력이 왕성해서 낡은 부대에 넣을 경우 제대로 늘어나지 않으면 부대가 터질 수 있었습니다. 개역성경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로 번역했으나 원문에는 동사가 없이 형용사와 명사가 반복되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가 됩니다. ‘버리게 되리라’로 번역된 단어는 ‘파괴하다, 멸망시키다, 죽이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 단어가 3:6에서 바리새인들이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를 의논하는 장면에서 사용되었고, 11:18에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까 의논하는 장면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귀한 포도주와 부대를 모두 파괴해버리는 어리석음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해 죽이려 하는 자들의 어리석음과 연결됩니다. 두 비유의 초점은 옛것과 새것이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비유를 통해 형식적 율법주의와 새 시대의 복음을 구별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적 율법주의에 갇혀 예수님을 비난하고 정죄했으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낡은 율법주의에 생명력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담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 예수님의 정체성


- 죄인을 부르시는 분


예수님은 자기 의에 빠진 교만한 자들이 아니라 죄로 타락해 구원의 길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새 시대의 복음은 죄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세리와 함께 죄인들로 분류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들, 잃어버린 양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참 목자라는 뜻으로 종말에 오실 다윗과 같은 목자로서의 메시아임을 밝히십니다(겔 34:23-34; 37:24-28). 예수님은 쫓겨나고 버려진 양들을 되찾으시고, 종말에 그분의 양 무리를 모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시고 그분이 성취한 의로 그들을 덮어 주십니다.  


- 새 시대를 여시는 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 낡은 옷이 찢어지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그 부대가 터지듯이, 옛 시대의 생각과 삶의 태도는 새 시대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형식과 관습에 매인 곳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가면 신랑이신 그분과 함께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사순절을 맞는 우리의 자세


사순절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을 통해 얻게 된 구원이라는 선물로 인해 감사할 수 있는 영성 훈련의 방법을 각자의 형편에 맞게 찾아야 합니다. 본문과 관련하여 네 가지를 생각해봅니다.


- 고백: 죄인임을 인식


아플 때 병원에 가는 것처럼, 자신이 영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자신들이 온전하고 건강한 줄로 착각하고 세리들을 죄인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레위는 예수님이 부르실 때 자신에게는 선한 것이 없음을 깨달았기에 예수님께 나아갔을 것입니다. 회개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자에게는 천국의 복이 약속돼 있습니다.


- 교제: 기도와 말씀을 통한 주님과 동행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주님에 관한 우리의 마음 문이 열리고 우리의 영혼을 살찌울 영의 양식을 얻게 됩니다. 사순절에 복음서와 서신들을 많이 대하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그것이 나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생각해보며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알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사순절은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기도생활을 upgrade시킬 좋은 기회입니다.


- 금식(절제): 무엇인가 포기하기 


영성 훈련 중의 하나가 금식입니다. 우리가 금식하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하고 우리의 마음을 되돌려 다시 주님께로 향하기 위함입니다. 단지 음식을 들지 않는 금식뿐 아니라 주님과 깊은 교제를 위해 무엇인가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각종 소셜 미디어, 쇼핑, 취미 활동 등 평소에 즐기던 것들을 사순절 기간에 절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 나눔: 받은 은혜를 나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죄인들을 위해 마련된 나라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사랑을 받았으면서 어느 새 바리새인과 같은 태도로 이웃들을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누군가를 비난하고 판단하면서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틀렸다고 하며 차별하지는 않는지요? 상처받은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나눔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우리 모두 예수를 믿기 전에는 다 죄인이요 영적으로 병든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 받은 자요 건강한 자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신앙이 좋은 사람만 모이는 곳이요 죄라고는 전혀 짓지 않은 사람들만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죄인과 병든 자들이 들어와서 의인이요 건강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곳입니다. 자칫하면 교회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집합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예수님의 길을 가야 합니다. 주님이 세상을 품듯이 교회가 세상을 품어야 합니다. 교회는 아픈 사람들을 위한 치유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치유와 소망을 있음을 전하는 전도와 선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역을 감당하려면 때로는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겸손하게 돌아볼 때입니다.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사고와 생활 태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기준은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진리이신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듯이 우리와 교제하시며, 우리 영혼의 질병을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죄 사함을 간구하는 자들을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후 5:17).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새 시대를 여신 예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듯이 믿음으로 예수님께 자신의 의탁함으로 주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혹시 예수님이 주신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잃어버린 채, 형식적인 예배와 봉사를 드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예수님이 주신 죄 사함의 감격과 진정한 자유를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로 초청하신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했던 초대 교회 교인들이 가졌던 그 생동감과 능력을 가지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새 시대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