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사명에 충실하신 예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2-07 14:15
Views
336

지난 한 달 동안 다룬 마가복음 1장을 한번 정리해볼까요? 마가복음 1장 1절부터 13절까지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밝혀줍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였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갈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사십년을 지내는 동안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다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허물로 인하여 사단에게 종노릇하던 사람들을 건져내기 위한 제 2의 출애굽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능력 많으신 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이’라고 했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에게 임하심으로 문자 그대로 메시아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세례식은 메시아 취임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간 시험을 받으신 후에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1장 14절부터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는가를 보여줍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첫 제자들을 부르시고(16-20), 가르치시고(21-22, 27), 복음을 전하시고(38-39), 귀신을 쫓아내시고(23-26, 32-34, 39) 질병을 고치십니다(30-31, 32-34). 예수님은 랍비로 공식적인 교육을 받지 않으셨지만, 그분이 가르침에는 기존의 랍비들을 압도하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는 권세만 가지신 것이 아니라, 귀신 쫓는 권세, 병을 고치는 권세를 함께 가지셔서 사역의 현장에서 적절하게 사용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권세와 그가 행하신 사역에 관한 소식이 갈릴리 지방에 금방 퍼졌습니다. 마가는 특별히 24시간 동안에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함으로 예수님이 얼마나 분주하게 일을 많이 하시는 지를 보여줍니다. 금년에 어떤 섬김의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섬기되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기 원하십니까?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모습을 살펴보며 예수님과 같이 분명한 소명 의식을 가지고 맡기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전도하시는 예수님(35-39절)  


35절은 1:21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24시간 가버나움 사역을 마무리 짓습니다. 전날 밤에 예수님은 당신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많은 병든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이렇듯 쉴 틈 없이 사역하신 후에 예수님은 주변의 분주함과 번잡함을 피하여 이른 아침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십니다. 굳이 기도하지 않아도 되실 분을 꼽는다면 그분은 바로 신성을 가지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셨기에, 늘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하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기도는 단지 성도의 의무 중 하나이거나 경건함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사랑하는 주님과 만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기도하는 시간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현실에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 하는 복의 통로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내용으로 기도하셨는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 자신의 사역에 있어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는 간구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영성과 사역에 균형이 잡힌 본을 보여주십니다.


 


제자들이 자고 있던 이른 새벽에 예수님이 나가셨으니, 그들은 예수님의 행방을 알 수 없었습니다. ‘뒤를 따라가’라는 표현은 그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방으로 찾아다녔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개역성경에는 ‘만나서’로 번역되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발견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모든 상황과 환경, 그리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단절된 곳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해 기도하신 것을 보여줍니다. 시몬과 다른 제자들은 모든 사람이 주님을 찾는다면서 예수님께 재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본질에 충실하기 위해 새벽에 기도하러 나오신 예수님의 모습과 대중적 인기에 고무되어 예수님을 찾아온 제자들의 모습이 대조를 이룹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을 돕는 것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얼른 예수님을 모시고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아무리 급하고 중요하게 여겨지는 일도 주님의 뜻이 아니라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발등에 떨어진 불만 끌려고 쫓아다녀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바쁜 것 같은데 막상 주님 앞에 내어놓을 열매가 별로 없습니다. 제자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고 하십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직역하면 ‘내가 이 일을 위해서 나왔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이 전도, 즉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온 갈릴리 지역을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귀신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귀신을 내쫓는 사역이 함께 언급되는데, 이는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가 선포되는 곳에서 사탄의 세력이 쫓겨나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예수님(40-45절)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장면은 마가복음에서 지금까지 나타난 치유 기사들 가운데서 환자의 믿음과 환자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한층 더 섬세하게 묘사합니다. 나병은 한 사람의 인격과 삶을 철저하게 무너뜨리는 무서운 병입니다. 나병은 전염성이 있기 때문에 유대 사회에서는 부정하고 위험한 병으로 간주했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들은 피부 질환으로 인해 육체적 고통을 당했습니다. 사회적 격리로 인해 공동체로부터 추방을 당했기에 성전이나 회당 출입을 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을 더욱 괴롭히는 것은, 그 질병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사회적 인식이었습니다. 그 결과 자신들을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청합니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님께 치유를 간구하는 모습은 나병환자의 절박함과 다급함을 잘 표현합니다. ‘끓어’는 ‘경배하다, 굴복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엎드려’역시 하나님을 향한 ‘절한다’는 경배의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신적 존재로 마땅히 경배 받아야 할 분임을 암시합니다. 신자들이 기도할 때 무릎 꿇는 것 또한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철저히 자기를 낮추고 완전히 자기를 예수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 사역에 대한 소문을 누군가를 통하여 들었을 것입니다. 그 소문을 들으면서 자기의 병도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예수님께 나왔다는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병환자는 일반 사람들과 격리된 삶을 살아야 했으며,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만약 나병 환자가 이런 정결법을 어기고 사람들에게 접근할 경우에 죽임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대담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능력이 있으시면 자기를 고쳐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원하시면 자기를 깨끗하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치유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다만 자기같이 부족한 자를 예수님이 고쳐주실 지를 확신하지 못했기에 의향을 물은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보여 준 행동은 복음서에 나오는 치유의 공식을 보여줍니다. ‘믿음을 가지고 나아감’‘자신을 낮추고 간구함’회당장 야이로의 딸, 열 두해 동안 혈루증 걸린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렇게 치유를 받았습니다.


 


나병환자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어떠합니까? 불쌍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동정심을 가지다’(Filled with compassion)로 번역된 곳도 있고 ‘분노하다’(being angered)로 번역된 곳도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나병을 인해 시달려온 그를 보면서 불쌍히 여겼다고 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피조물이 악한 세력에 의하여 망가진 것을 보시면서 분노하셨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나병환자와의 접촉은 정결 규례 상 금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만지셨습니다. 나병환자는 병을 앓는 이후 처음으로 사람의 손길이 자기 몸에 닿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나병환자를 만졌으니 예수님은 정결법에 의하면 부정한 자가 되지만 주님은 율법의 규정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거룩하심은 도리어 부정함을 깨끗케 합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당신의 마음을 확실히 알려주기 위하여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권세는 이번에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즉시 떠나가고 깨끗해집니다.  


 


“곧 보내시며”예수님은 왜 나병환자를 치유하시자마자 바로 제사장에게 보내십니까? 갈릴리에 있는 나병환자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제사장에게 가서 나병이 치유되었음을 보이고 율법에 규정된 제물을 드린 후에 돌아오려면 적어도 일주일 이상 걸렸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나병환자라는 낙인이 벗겨져서 어엿하게 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서둘러 그를 보내십니다. 예수님은 레위기 14장을 염두에 두시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보여라’, ‘드려라’두 동사가 과거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보이고 지금 당장 드려서 공식적으로 깨끗함을 받아 빨리 사회에 복귀되기 원하는 주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그 사람의 치유뿐 아니라 앞으로의 삶까지도 신경을 쓰십니다. 또한 예수님이 율법을 파기하시는 오신 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정결법이 바라보았던 실체요, 율법의 완성이십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이 치유 받은 나병환자를 제사장에게 속히 보내신 것은 앞으로 유대 사회에서 살아야 하는 그를 위한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엄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앞에서 귀신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곧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오해를 막기 위함입니다. 당시 나병은 치유가 불가능한 병으로 알려졌습니다. 따라서 나병 환자의 치유가 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깨끗함을 입은 나병환자는 예수님이 치유해 주신 것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습니다. 오랫동안 억눌려 온 질병에서 자유롭게 된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일을 전해야 다른 병자들도 예수님을 통해 치유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병 환자의 불순종으로 예수님은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고 기록합니다. ‘다시는 못하셨다’는 말은 그 이후 영원히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 전파 사역을 계속하지 못하고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한적한 곳, 즉 인적이 드문 동네 바깥이나 광야 지역에 머무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잠시 방해를 받을 수는 있지만 영원히 중단되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그 나병환자를 다시 만났다면 그를 꾸짖었을까요 칭찬했을까요? 마가복음 1장을 마무리 지으면서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추측할 수는 있습니다. 마가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에 예수님의 사역이 어려워졌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헬라어 미완료 시제로 사용된 단어 ‘나아오더라’는 갈릴리의 여러 곳에서 계속해서 사람들이 찾아왔음을 의미합니다. 2:1에도 “수일 후에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 5:14). 빛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감추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병의 치유는 메시아 시대에 일어날 것으로 기대되었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따라서 마가는 예수님의 나병환자 치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임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 우리의 자세 


예수님을 본받아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살려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자세를 본받아야 합니다.


-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24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고 불평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주어진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많은 열매를 거둡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듭니까? time management를 잘 해야 합니다. 우선순위를 세워야 합니다. 각양각색의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치유되고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가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맞이할 생각에 새벽부터 자리를 비우신 예수님을 급하게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른 새벽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시며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어떤 일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기도의 시간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도, 예수님의 우선순위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구원의 복된 소식을 잘 전하기 위해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기보다 스스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미루고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려는 잘못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쁜 일과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조용히 머무는 시간을 갖기로 다짐하며, 소홀히 했던 기도 시간을 힘써 지키기로 작정해야 합니다. 제자의 삶은 기도의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자주 감정이나 상황에 휩쓸립니다. 상황이 곧 부르심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와 요구라는 상황에 흔들리지 않으시고 언제나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따라 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고 그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기 위해 우선순위를 세워야 합니다. 


 


- 주님의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꿇어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아무도 손을 대려고 하지 않는 그에게 예수님은 손을 내미시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예수님의 치유 능력의 근원입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헤세드’인데 이는‘엄마의 자궁’이란 말에서 유래합니다. 어미는 자식이 안타까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솟구쳐 오릅니다. 그런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 마음으로 주님은 연약한 우리를 치유하시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추하고 더러운 모습으로 예수님께 나아간다 할지라도 그분은 우리를 멀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더러움을 씻으시고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더 잘 보이기 위해 가면을 써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치 않고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죄악 된 이 세상은 예수님을 필요로 합니다. 누구든지 온갖 죄로 더러워진 영혼을 깨끗하게 씻김을 받기 원한다면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하면서 바울은 예수님의 겸손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빌 3:17). 바울은 자기가 완전하거나 믿음의 경지에 도달했기에 자기를 본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하는 자기의 자세를 본받아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연민과 겸손으로 가득한 주님의 마음을 품고 이웃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치유 직후에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그 사람에게 엄하게 경계하셨습니다. 자칫하면 예수님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인하여 그의 사역에 지장을 받을까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자기를 고쳐주셨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더 이상 마을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자기들의 그릇된 판단이나 불순종으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의 삶은 순종의 자리에서 성숙하게 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께서는 나병환자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복음 사역을 진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고난을 당하신다는 말을 듣고 베드로가 만류하자 그를 꾸짖으시면서 한 말씀 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마 16:23) 자기 열심이나 자기의 방법으로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저지르기 쉬운 함정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약점은 어쩌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없다기보다 그릇된 자기도취에 빠지거나 자기는 잘한다고 생각하며 주님의 뜻과 상관없이 엉뚱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행동하지만 결과적으로 덕을 세우지 못하면 다시 주님을 한적한 곳으로 몰아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만이 모든 것을 잘 아시기에 주님 앞에 ‘꿇어 엎드리어 간구’를 해야 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겸손하게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우리 모두는 주님의 제자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로서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주님의 칭찬을 들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열매를 얻겠습니까? 주님보다 앞서 나아가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그분께 간구하며 나의 소원이 주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에 치유와 회복이 있고 풍성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몸소 삶으로 본을 보여 주시며,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의 삶은 감당해야 할 많은 일과 계획보다,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제자는 상황과 환경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철저히 헌신해야 합니다. 제자는 합리적인 선택과 결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과 순종을 통해 성숙합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이런 삶을 따를 때 우리는 예수님을 닮게 되고, 예수님이 남기신 지상 명령을 감당하는 성숙한 제자가 될 것입니다. COVID-19의 위협이 머지않아 수그러들 것입니다. 교우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예배드릴 날이 곧 올 것입니다. 금년 한해도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그 분의 뜻에 온전히 따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며 칭찬을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