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권세 있는 사역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1-31 18:51
Views
324

귀신에 홀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귀신에 사로잡히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귀신이 원하는 대로 말하고 귀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그렇다고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이 자기 의지대로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귀신 보다 더 강한 자의 도움이 있어야만 귀신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귀신에 홀릴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귀신도 있지만 넓게 생각한다면 하나님 외에 지나치게 우리의 관심을 끌고 우리의 자원을 낭비하게 만드는 세상의 풍조나 이 시대의 정신이 바로 귀신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술기운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하고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게 하라는 권면입니다. 도박이나 마약도 우리를 홀리게 합니다. 일단 그런 것들에 빠지면 헤어나기가 쉽지 않은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런 유혹이나 영향력보다 더 강한 분이 우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에 보니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에 오셔서 안식일에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안식을 주십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묻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십니까? 공생애 3년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때로 이해가 더디고 때로 주님보다 앞서 가려고 하고 때로 주님의 뜻과 상관없는 엉뚱한 행동을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조금씩 예수님을 알아갑니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으시고 병을 고치시는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음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8-9). 구약 시대에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식은 일시적인 안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을 때에 그 땅에 대적이 침입하고 심지어 나라도 망하고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면서 제대로 안식을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또 다른 여호수아가 자기 백성들에게 참 안식을 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 누가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주님만을 푯대로 삼아 나아가고 있습니까? 예배에 참여한 모든 분들이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그분의 삶을 본받으면서 주님이 주시는 권세를 힘입어 귀한 사명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권세로 사역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의 첫 사역은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일어났습니다. ‘나훔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가버나움은 갈릴리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이곳을 전도의 근거지로 삼으시고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루의 사역을 어떻게 감당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별로 쉴 틈 없이 꽉 채워진 스케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은 보통 사람들의 것과 다릅니다. 권세가 있습니다. 즉 권위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그 권세로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치십니다.  


 


- 가르치는 권세 


예수님이 안식일 아마 오전에 네 제자를 데리고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을 ‘가르쳤다’는 것은 회당 예배에 참석해서 토라나 예언서의 일부를 읽고 그 본문에 대해 설명하거나 설교 형태의 강론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보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초점을 맞춥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완전히 압도됩니다. 평범한 무리가 듣기에도 그 가르침은 지금까지 자기들을 가르쳤던 서기관들의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께서 직접 말씀을 전하시니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능력 있는 선생으로서의 권위가 그의 가르침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 


예수님이 가지신 권세는 귀신을 내어 쫓는 이적을 통해 보다 명확해집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귀신 축출이 단순한 이적을 말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귀신들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귀신들의 쫓겨남이라는 주제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필연적으로 사탄의 통치를 위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졌는지는 단지 말씀으로 사탄의 세력을 제압하시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가르치실 때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갑자기 소리를 지릅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하나님의 거룩한 자’란 구약에서 하나님이 구별하여 세우신 종을 지칭할 때 사용하던 표현입니다(왕하 4:9).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고, 그 권위는 귀신을 꾸짖기도 하며 또한 내쫓을 수 있는 막강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 점을 귀신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을 멸하려, 곧 완전히 파괴하려고 왔는지 묻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그렇다’입니다. 더러운 귀신들은 사람에게 들어가 그를 사로잡고 자신들의 종으로 삼아 그를 파멸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은 악한 영들을 쫓아내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은 ‘무슨 이유로 우리에게 적대감이 있는가’라는 뜻을 지닌 구약적 표현입니다.  ‘당신이 무슨 상관이기에 끼어들어’와 비슷한 의미를 가집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다. 상대방의 신분을 드러내면서 기선을 제압하려고 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으나 그런 술책이 예수님께 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습니다. “잠잠하라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말이 떨어지자마자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키게 하더니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옵니다. 회당 안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무리들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면서 묻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다시 말하면 이 사람은 누구인가? 무리는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을 좇아내는 ‘행위’를 보고 ‘권위 있는 새 교훈’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단순히 말로만 끝나거나 머리로만 이해되고 끝나는 가르침이 아니라, 사람을 치유하고 또 억압하는 것들로부터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이적 모두 이 세상에 대한 사탄의 권세를 끝내고 하나님의 권세,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없던 서기관들과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능력 있는‘선생’으로서의 권위가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다시 한 번 입증됩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집니다.


 


- 병을 고치는 권세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예수님의 사역의 일부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은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하였다고 고백합니다(살전 1:5). 마가는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 쫓으신 사건 뒤에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신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단순히 이적을 말하려는 것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통치가 성취되는 모습을 소개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때는 오후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집안에는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누워있다는 것은 그의 병세가 중한 것을 보여줍니다. 시몬의 식구들은 곧 그 여인의 상태에 대하여 예수님께 이야기했습니다. ‘곧’이란 단어가 계속 나옵니다. 이 표현은 사건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긴박하게 진행시키는 마가의 특성이 잘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에게 다가가셔서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갑니다. ‘일으킨다’는 동사는 예수님의 부활(16:6)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으며, 구약에서는 무너진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행위를 가리킬 때 쓰입니다(사 42:6). 예수님이 나병 환자를 치유하실 때도 그랬습니다(1:41). 그를 불쌍히 이기셨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실 때도(5:41), 그리고 간질병을 앓던 소년을 고치실 때도(9:27)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언제 손을 잡습니까? 그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길 때입니다. 병자의 손을 잡는 것은 때로 꺼림칙한 일일 수 있습니다. 전염이 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당시 정결법에 따르면 병든 자는 부정했습니다. 시신은 가장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손잡는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근원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보통 열이 많이 난 상태에서 기력이 회복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시몬의 장모는 바로 수종 들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며 섬겼을 것입니다. ‘수종들다’(디아코네오)는 천사의 ‘수종’(1:13)과 예수님의 ‘섬김’(10:45)과 같은 단어로, 구원받은 예수님의 제자에게 기대되는 올바른 반응임을 암시합니다. 한편 마가복음 끝부분인 15:41에서도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의 섬김이 언급돼 있습니다. 마가복음 처음과 마지막에 여인들의 섬김이 언급돼 마가복음 전체를 감싸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인들의 섬김은 이 땅에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으로 마가복음의 핵심 주제인 섬김을 강조합니다. 정성껏 대접하는 시몬의 장모의 모습은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능력을 체험한 자가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섬김은 베푸신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격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것입니다. 능력 있는‘선생’의 모습을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이 또 한 번 놀랐을 것입니다. 


  


‘저물어 해질 때’는 안식일이 막 끝날 때를 가리킵니다. 이제 그 하루가 저물고 새로운 날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날은 바뀌었지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은 계속됩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더러운 귀신을 쫓아낸 사건이 갈릴리 전역에 퍼졌다고 말했습니다. 더군다나 시몬의 장모까지도 치유하셨으니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더 퍼졌을 것입니다. 안식일엔 이동이 제한되고 치료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시몬 베드로의 집 문 앞에 모였다고 마가는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귀신들도 많이 쫓아내셨습니다. 그런데 귀신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잘 알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정체가 섣불리 알려지면 예수님이 앞으로 사역하시는데 방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단지 병이나 고치고 귀신을 쫓으며 이적을 행하는 자로 이해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때가 안 되었습니다. ‘모든 병자’, ‘귀신 들린 자’, ‘온 동네’, ‘각종 병이 든 사람’, ‘많은 귀신’등과 같은 표현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이 얼마나 많고 다양하며 얼마나 폭넓게 행해졌는지 보여줍니다. 


  


새벽에 기도하시는 예수님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는 오후 6시에서 오전 6시까지 3시간 단위로 구분하는 유대 시간법에서 밤의 4경에 해당하는 말로 새벽 3-6시경을 가리킵니다. “아직도 밝기 전에”는 여전히 어두운 밤을 말하며 ‘일찍, 이른’을 뜻하는 단어와 함께 새벽을 뜻합니다. 여기서 ‘한적한 곳’은 베드로의 장모가 살고 있는 동네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곳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전날 늦게까지 병든 자를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아주 이른 새벽에 일어나셔서 한적한 장소를 찾아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시간과 장소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데 가장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더니’는 미완료 시제로 지속적인 기도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날 새벽 따라 일찍 잠이 깼는데 잠이 오지 않아 기도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평소 늘 하시던 대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위해, 능력 있는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하나님과 자신이 교통하는 시간과 공간이 꼭 필요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


예수님의 이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이 모두 놀란 이유는 이제까지 이러한 일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규정합니다. 예수님의 이적은 그분의 가르침과 연관되어 있고, 이 이적과 가르침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인 하나님의 나라와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질문은 마가복음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 즉 “이는 어찜이냐”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가장 먼저 인식한 존재는 사람들이 아닌 악한 영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 이 세상의 악한 영과 질병을 꾸짖으셨으며, 어둠과 고통에 눌려 있는 영혼들을 치유하시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분께 나아오는 수많은 각종 병자를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병자와 귀신 들린 자의 모습은 죄에 종노릇하는 죄인의 영적 상태를 보여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이신 예수님을 통해 임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죄인은 죄로 인한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 온전히 회복됩니다. 주님은 지금도 악한 영으로 인해 죄악의 어둠 속에 갇혀 있는 모든 영혼에게 유일한 구원자가 되십니다. 오직 주님만이 그들을 죄악에서 건지시고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악함과 약함, 아픔과 슬픔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습이 아닙니다. 이는 사탄이 인간 세계에 심어 놓은 가라지로 인해 변형된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전해지는 곳마다 사탄의 세력은 무너지고 질병은 떠나가며, 창조의 원형은 회복됩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치유자이시며, 권세자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창조주 하나님의 권세요, 만물의 주이신 왕의 권세입니다. 사탄의 세력을 굴복시키는 권세이며,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권세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문제를 주님 앞에 내놓기만 하면 반드시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 때문에 허덕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모든 짐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때로 세상의 권세 잡은 자가 위협하며 삼키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권세를 의지하는 자들은 주님의 능력을 힘입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자세


- 주님을 본받아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권세가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능력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며 사탄과 대적하셨듯이 열광하는 군중과 맞닥뜨릴 때마다 한적한 곳(광야)으로 물러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광야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때처럼 시험과 심판의 장소이며, 또한 하나님을 대면하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밤늦게까지 병든 사람들을 고치느라 몹시 피곤하셨을 텐데도, 새벽 일찍 일어나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시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십니다. 예수님의 사역 준비는 기도로 시작되었습니다.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사역에 기름 부으심을 입었습니다. 아직도 어둠이 깔려 있는 새벽 시간에 자신이 걸어가야 할 사명의 길을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의 씨름’을 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비록 고난의 길을 걸어가도 ‘새벽 여명’에 한적한 곳에서 드리는 기도는 모든 어둠과 장벽을 이기는 능력의 원천이 됩니다. 영적 재충전이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은 ‘안식’과 ‘기도’의 재충전은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게 하는 기회가 됩니다. 올 한 해 우리 모두 새벽을 깨우는 자들이 되어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며 주님이 베푸시는 지혜와 능력에 힘입어 귀한 열매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 주님의 권세로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치유와 회복을 경험합니다. 귀신조차 그를 알아보고 두려워 떨었고 사람들은 귀신을 다스리시는 그의 능력에 놀랐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각종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는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오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인하여 치유함을 받고 회복된 성도들은 주님처럼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다른 사람과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치유함을 받고 주님을 섬겼던 베드로의 장모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으로 회복된 것이 깨달아지면 이제는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잃어버린 영혼의 구원이요 하나님의 나라 확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능력 있는 선생님이신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을 날마다 가까이 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매여 종노릇 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분임을 믿습니까?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결박을 풀어주시며 자유케 하십니다. 병으로부터 치유함 받기 원하고, 과거의 상처로부터 치유함 받기 원하고, 인간관계의 아픔으로부터 치유함 받기 원하고, 각종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겸손하게 주님께 무릎을 꿇으며 주님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손이 우리를 붙드시고 그분의 능력이 흘러들어와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각자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을 인하여 참된 안식을 누리며 받은 사랑과 은혜를 인하여 주안에 있는 평강을 보여주며 나누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