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아름다운 만남, 그리고 새로운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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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12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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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행 10:24~33


오늘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팔로마한인교회가 이 땅에 세워진 지 31년이 되는 창립주일입니다. 동시에 지난 1995년,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제가 샌디에고에 내려온 이래, 교우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달려온 31년 사역을 마무리 짓는 마지막 주일예배이기도 합니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순간순간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돌보심과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의 연속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견고한 기초는 교회의 진정한 주인이자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고 친밀한 사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함께 울었던 눈물의 장례식, 기쁨으로 축복했던 결혼식, 새 생명의 탄생을 알린 유아세례,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며 하나 됨을 고백했던 성찬식, 교우 전체가 한마음으로 참여했던 성극, 상가건물에 19년을 지내다가 은혜 가운데 마련한 건물 remodeling을 위하여 많은 교우들이 나와 바닥을 깔고 물건들을 옮기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기뻐하던 순간들, 2014년 10월 바로 이 자리에서 감격 속에 드리던 첫 예배, 본당이 침수되어 비전센터 체육관에서 덜덜 떨며 드리던 예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교회에 나와 부르짖던 기도의 시간들이 지금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오늘 선포하는 설교의 본문과 제목은 31년 전 제가 교우들에게 와서 전했던 ‘첫 설교’와 동일합니다. 다만, 이제 새롭게 부임하신 주성필 목사님과 함께 교회의 제2기 사역이 시작되기에 ‘그리고 새로운 도약’이라는 고백을 더했습니다. 부족한 종의 첫 설교를 들으셨던 분 중, 지금까지 이 자리를 지키고 계신 분은 제 아내를 제외하면 고장우 장로님 한 분뿐이십니다. 당시 60대 이상으로 교회의 터를 닦으셨던 어른들은 고 장로님의 부모님을 포함하여 대부분 주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제가 마지막 주일 강단에서 이 본문을 다시 선택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의 목회와 신앙의 시작과 끝은 오직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귐이어야 하며, 그분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도 간의 아름다운 만남이어야 함을 교우들의 가슴에 새겨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와 유대인 사도 베드로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막힌 담을 허무시고 이방인 전도의 문을 열어젖히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연출이자 위대한 구속사적 분수령이었습니다. 목회자는 바뀌지만 교회의 머리는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팔로마한인교회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며, 주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만남’의 본질을 깨닫고, 온 교우가 하나 되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더욱 견고히 세워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에 언급된 베드로와 고넬료는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먼저 고넬료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모아 기다리더니”(24절): 은혜를 함께 나누는 사람
사도행전 10:2에 의하면 고넬료는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다고 합니다. ‘집안’하면 아내, 자녀들, 노예들까지 포함하는 말입니다. 고넬료가 자기만 하나님을 알고 경외한 것이 아니라 집안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그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데리고 있던 부하들에게도 전도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그런 고넬료인지라 베드로 사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을 불렀습니다. 친구들을 불렀습니다. 함께 말씀 듣기를 원했습니다. 주님과의 참된 사귐은 언제나 공동체를 세웁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혼자만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주님께로 이끌게 됩니다. 31년 동안 우리 교회가 지켜 온 아름다운 모습도 이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선교사를 후원하고, 새가족을 품고,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하며, 함께 울고 함께 웃었습니다. 앞으로도 팔로마한인교회는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누며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발 앞에 엎드리어”(25절):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
고넬료는 로마제국의 권력을 쥔 점령군의 장교였지만, 베드로 앞에 겸손히 엎드리어 절했습니다. ‘절하다’로 번역된 이 단어는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가 집 안에 들어올 때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이는 베드로 개인을 우상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자에게 부여하신 영적인 권위를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 역시 인간이기에 부족함과 허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교회를 섬기도록 세우셨음을 인정하고 그를 귀히 여기며 섬길 때, 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고 하나님의 복이 풍성히 임하게 됩니다.

“곧...보내었더니”(33절): 순종하는 사람
천사로부터 “욥바에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을 때, 고넬료는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 즉시 자신이 신임하는 경건한 종들을 욥바로 파송했습니다. 고넬료는 왜 베드로를 불러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와서 무엇을 말할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순종했고, 나중에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참된 믿음의 깊이는 언제나 ‘순종의 속도’와 비례합니다. 성경의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이었던 아브라함, 모세, Joshua, 사무엘 등은 계산하기보다 즉각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주장이 강한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 앞에 ‘곧’ 반응하며 자기를 부인하는 순종의 사람들을 통해 새 시대를 열어 가십니다. 이제 우리 교회에 새로운 영적 리더인 주성필 목사님이 부임하셨고, 새로운 비전의 돛이 올려졌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의 태도는 ‘내 생각, 내 경험, 우리 교회의 옛 전통’이 아니라, ‘지금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겸손히 묻고 즉각적으로 따르는 순종입니다. 주님의 순종이 교회의 순종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팔로마 공동체를 통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펼쳐 가실 것입니다.

“잘하였나이다”(33절): 남을 세우는 사람
고넬료는 베드로가 온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고 감사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남이 잘한 것보다 허물이 먼저 보이고 격려하기보다 문제점만 지적하려 한다면 아무리 바른 소리를 해도 관계가 불편해집니다. ‘당신은 이게 틀렸어’ 하며 자꾸 문제점만 지적하려 한다면 아무리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알고 있다할지라도 거부반응을 보이든지 방어 자세를 취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덕을 세우지 못하면 사람들이 그를 피합니다. 바른 소리만 하려고 하지 말고 덕을 세우는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남의 말’을 듣지도 말고 전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하는 말도 들으려고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남의 말을 자꾸 하는 자를 멀리해야 합니다. 이왕이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선한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하나님이 만드신 바’는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걸작품인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또한 칭찬은 사람을 세웁니다.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잠 27:21). 부지런히 칭찬하며 살아야 합니다. 바울의 권면대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롬 12:10)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33절):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주께서 당신에게 지시하신 모든 말씀을 들으려고 다 같이 하나님 앞에 모여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베드로의 인생 경험담이나 중근동 지방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말씀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생명의 길이 있고 주님의 백성이 복 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교회가 건강하려면 강단이 살아야 하고, 성도들이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제가 팔로마한인교회를 섬기면서 가장 감사한 것은 말씀을 사랑하는 성도들을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설교를 메모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교우의 모습을 보며 큰 힘을 얻습니다. 사실 목회자의 가장 큰 기쁨은 단순히 교인 수의 증가가 아니라 성도들이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팔로마한인교회가 말씀 중심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프로그램보다 말씀, 전통보다 말씀, 사람의 생각보다 말씀을 붙드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생명이 말씀에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도 충실히 준비하여야 하나 받는 자도 기도로 준비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33절):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는 사람
고넬료가 육신의 눈으로는 베드로를 보고 있었지만, 그의 영적인 눈은 베드로를 보내시고 그 자리에 친히 임재하신 만유의 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라틴어로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지 못할 때 인간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죄의 유혹에 빠집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으나, 어느 순간 하나님의 시선을 잊어버렸습니다. 왕궁 지붕을 거닐다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는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해 또 다른 계략을 꾸미고, 급기야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인 우리아를 죽게 만드는 죄까지 저질렀습니다. 다윗의 숨은 행위를 다 보고 계셨던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네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삼하 12:9)라며 책망하셨습니다.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시선은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시선을 의식할 때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할 수 없고, 주님의 임재를 확신할 때 어떤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새 시대를 맞이하며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태도 중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베드로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26절): 겸손한 사람
환상 중에 천사를 통하여 만나 보라고 하던 베드로, 말로만 듣던 베드로가 자기의 집안에 들어오자 고넬료는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리어 절했습니다. 베드로는 초대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이자, 설교 한 번에 3천 명을 회개시키고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중풍 병자 애니아를 낫게 하고 (8:32-35), 죽은 도르가를 살려낸 (9:36-42) 능력의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고넬료가 자신의 발 앞에 엎드렸을 때, 베드로는 거드름을 피우거나 주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가로채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 고넬료를 일으켜 세우며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낮추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제자다운 겸손을 보여주었습니다. 영적 권위는 자기를 대접해 달라고 소리를 높일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양 무리의 본이 될 때 자연스럽게 흘러옵니다. “나도 사람이라” 누구나 가슴에 새겨두어야 할 말입니다. 실수도 있고 부족한 것도 많지만 하나님이 불러 주셨으니 주의 이름을 감당한다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더불어 말하며”(27절): 온유한 사람
두 사람 이상 있으면 알게 모르게 파워 게임이 존재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을 수도 있고 자신을 높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권위적인 자세가 아니라 다정하게 고넬료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도자는 인도자가 되어야지 독재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지배하는 자가 높임을 받고 낮은 자가 섬기지만,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위한 섬김이 더 가치 있는 행동임을 말씀하시고 스스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베드로가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고 권면했습니다. 목회자는 권위적이고 고압적인 자세로 양 무리를 대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직무를 권력이나 권세로 여겨서도 안 됩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본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 ‘온유’를 잘 표현하는 말이 ‘내유외강’입니다. 겉으로 부드러우면서 속으로 강한 것을 말합니다. 모세가 온유했고 예수님이 온유하셨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하면서 걸핏하면 목소리를 높이고 싸우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은 결코 온유한 자가 아닙니다. 모든 양무리의 목자장은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주님은 목자들을 세우셔서 그들로 하여금 양들을 키우게 합니다. 목회자가 강단에서 설교할 뿐만 아니라 삶으로 본을 보이고 성도와 더불어 동역할 때, 비로소 상호 신뢰가 싹트게 됩니다.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28절): 순종하는 사람
무엇보다 베드로는 평생을 얽매여 왔던 유대인으로서의 고정관념과 전통, 율법적 편견을 과감히 깨뜨리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세 번이나 반복된 부정한 짐승에 관한 환상을 보며 그 의미를 알지 못해 고민했지만, 성령이 고넬료 집으로 가라고 명하셨을 때 기꺼이 이방인의 집으로 향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당시 유대인이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은 동료들로부터 엄청난 비난과 정죄를 받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평판보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하신 주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베드로의 순종이 있었기에 이방 선교의 거대한 물줄기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31년 동안 주님의 교회를 섬기면서 깊게 깨달은 것은 제 계획보다 주님의 계획이 옳았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해되지 않는 길도 있었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도 있었고,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뒤돌아보니 주님의 길이 지름길이고 열매가 더 풍성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 새 시대를 열어 갑니다. 새로운 목회자가 오셨으니 새로운 비전이 펼쳐질 것입니다. 여전히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주님의 기도가 교회의 기도가 될 때 하나님은 그 교회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나의 간증
돌아보면 저의 인생과 목회 역시 편견과 비늘을 벗기시는 주님의 인도하심 그 자체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공학 공부를 마친 제가 왜 목회의 길로 접어들었는지 궁금해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밖에 드릴 말이 없습니다. 1982년 유학길에 오를 때, 제 아내의 외할머니가 아내를 부르셨습니다. ‘내가 계속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서집사가 공학 공부를 잘 마치도록 하실 것이고 그 후에는 다른 계획이 있으신 것 같다는 감동을 자꾸 받는다’고 하시면서 아내에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아내는 할머니가 하신 말씀을 제게 전하지 않고 간직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Maryland 대학에서 근무할 때 진로를 놓고 기도하는데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힘이 강권적으로 저를 몰아가신다는 느낌을 자주 받아서 아내에게 이야기했더니 그때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떠올리며 저에게 신학을 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일 년 가까이 기도하다가 마침내 결단을 하고 91년에 대륙횡단을 해서 Pasadena에 있는 Fuller 신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도 이민을 오신 후에 우리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집 뒤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곳이 할머니의 오시면 기도하시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87세가 되신 어느 날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셔서 입원하셨습니다. 저희 부부가 할머니를 찾아뵈었습니다. 침대에 누워있던 할머니가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시자 하신 첫 마디가‘오직 예수’였습니다. 그 말씀을 하시고 누워서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셨습니다. 조금 있다가 또 말씀을 하시려는데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러나 입모양을 보니 ‘오직 예수’였습니다. 세 번째로 말씀하시려는데 입술만 움직이실 뿐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오직 예수’라고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할머니는 눈을 감고 가만히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이틀 후에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을 붙들며 손녀와 손녀사위에게 ‘오직 예수’를 말씀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나는 과연 이 땅의 생을 마감하는 때에 나의 손자 손녀들을 향하여 ‘오직 예수’를 말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나가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와 베드로라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을 초자연적인 섭리로 만나게 하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고넬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복음을 들어 구원을 얻게 하심이요, 사도 베드로에게는 유대주의라는 해묵은 편견과 전통의 비늘을 벗겨내어 선교의 지경을 열방으로 넓히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나는 모습은 오늘날 주님의 지체들이 본받아야 할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다 기도에 힘썼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겸손함과 온유함과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넬료는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려 하고,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권위에 순복하고, 감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의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팔로마한인교회를 섬기기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하나님의 때가 되어 은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31년의 세월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 은혜의 역사는 강단에서의 선포뿐만 아니라, 이름도 빛도 없이 눈물로 기도하고 묵묵히 순종하며 교회를 받쳐주신 수많은 지체들의 아름다운 섬김이 겹겹이 쌓여 이루어진 거룩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은혜와 어제의 영광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우리의 삶과 교회를 새롭게 조명해야 합니다. 교우들은 저를 기억하기보다 우리 모두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교회의 미래는 언제나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새 일 행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주성필 목사라는 새로운 종을 통해 팔로마한인교회의 영적 지평과 선교의 지경을 더 넓히기 원하십니다. 이제 사역을 마무리 짓는 부족한 저의 간절한 소망은, 오순절 강림하셨던 성령의 역사가 이곳에 모인 팔로마 교우들과 새롭게 부임하신 주성필 목사 위에 폭포수처럼 임하는 것입니다. 온 성도가 주님 안에서 깊이 사귀고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활기 있는 신앙생활, 열매 맺는 신앙생활, 능력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교우들의 온전한 순종과 열정적인 헌신을 통해, 팔로마한인교회가 하나님께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의 수를 더하시는 구원의 방주가 되며,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힘 있게 증거하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위대하게 도약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