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Author
JungS.
Date
2026-07-05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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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삭개오에 관련된 유머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 중에 등장인물의 이름을 헷갈렸습니다. 니고데모는 세리였고 키가 작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몹시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여기까지 설교를 듣던 교인들이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수군거렸습니다. 목사님은 자기의 설교가 은혜가 있어 그런 줄 알고 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니고데모가 사는 여리고에 오셨습니다. 니고데모는 키가 작아 예수님을 볼 수 없자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 말을 듣고 교인들이 크게 웃었습니다. 그제야 목사님은 자기가 잘못 말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황해서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그러다가 순간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그때 삭개오가 나타나 외쳤습니다. “야 니고데모야 거기는 내 자리야. 빨리 내려와.”
신앙의 본질은 예수님과의 사귐입니다. 주님과 함께 걷고, 주님과 대화하고,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던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무리 가운데서 그를 찾으셨고, 그를 위해 걸음을 멈추셨으며, 그의 집에 들어가셨고, 그 결과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삭개오를 받아주신 예수님은 그의 구원을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희롱과 능욕을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혹시 내면에 숨겨진 상처나 공허함을 안고 주님을 갈망하는 분은 안계십니까? 본문을 통해 삭개오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으며, 받은 은혜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찾아와 사귐의 식탁으로 초청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과 깊은 사귐 속에서 부르심에 합당한 다이내믹한 신앙생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나무에 올라간 삭개오 (1~4절)
본문을 잘 이해하려면 앞 단락에 있는 ‘맹인 치유 사건’과의 연속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맹인의 치유 사건은 다른 복음서에도 나오지만, 삭개오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게다가 두 사건이 연결되도록 배치했습니다. ‘여리고로 들어가’라는 설명은 앞 단락이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18:35)라는 도입구로 시작하는 것과 병행을 이룹니다. 내용상으로도 두 사건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맹인과 삭개오, 두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과 돌보심을 필요로 하는 ‘잃어버린 자들’이었고,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이 베푸시는 구원을 받아 누렸습니다. 그러나 맹인이 길가에서 구걸할 정도로 가난했던 반면,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종려의 성읍’이라는 뜻을 가진 여리고는 기후가 온화하고 샘이 많아 예루살렘 다음으로 큰 도시였습니다. 누가는 삭개오를 소개하면서 ‘삭개오라 이름 하는 자’라고 합니다. ‘삭개오’는 히브리어 ‘자카이’의 헬라어 음역으로, ‘의로운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의롭지 못한 삶을 살아오면서 이름값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전역에서 세금이 가장 많이 징수되는 곳은 여리고와 갈릴리 가버나움이었습니다. 세리들은 로마 당국으로부터 그 지역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로마 당국은 가장 많은 세금을 상납하겠다는 자에게 징수 권한을 주었습니다. 많은 돈을 선불로 주고 권한을 획득했으니 삭개오가 세리장으로서 세금 징수를 어떻게 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리장은 자기가 투자한 이상의 돈을 뽑으려고 백성에게 세금을 과잉으로 부과했을 것입니다.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는 표현 이면에는, 동족들의 차가운 시선과 집단 따돌림 속에서 돈만을 유일한 신으로 삼고 달려왔던 한 인간의 정서적 고립이 숨겨져 있습니다. 삭개오가 오랫동안 세리 노릇 하다 보니 돈은 많이 모았겠지만, 어느 누구도 삭개오에게 다가와 따뜻한 말 하나 해 주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돈만을 보고 달려갔을 때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들려도 무시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돈을 모아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이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부유했지만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알려진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동경이 생겼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자신의 마을을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직접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길에 나가보니 사람들이 너무 많고 그는 키가 너무 작아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껑충 뛰어 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칠 수 없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길 가에 있던 돌무화과나무가 눈에 띄었습니다. 돌무화과나무는 18m 정도까지 자라고 상록수 잎이 무성한 큰 나무입니다. 이 사진은 2019년 3월 5일 샌디에고 교역자협의회에서 성지 답사를 가서 여리고를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아래쪽 가지가 비교적 낮게 옆으로 자랍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나뭇가지 위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세리장이라는 사회적 신분이나 나이, 체면을 고려할 때 나무에 올라가는 것이 상당히 부담이 되었지만 자신의 깨어진 인생을 고쳐 주실지 모른다는 간절함과 절박함이 그를 움직인 것입니다. 이 장면은 인간이 스스로의 죄성과 한계를 깨닫고, 오직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은혜를 사모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주님은 당신을 간절히 찾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삭개오를 부르신 예수님 (5~6절)
예수님 일행이 점점 자기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자 삭개오는 가슴이 뛰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걸음을 멈추시고 삭개오를 올려다보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죄인이요 민족을 파는 자로 정죄하며 미움으로 바라보았지만, 예수님은 그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으로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셨습니다. 주님은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아셨습니다. 그의 과거의 죄도 아셨습니다. 그의 외로움도 아셨습니다. 그의 상처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부르셨을 때, 삭개오는 아마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아셨을까?’ 삭개오는 아마 죽는 날까지 그 감격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5절과 7절에 ‘유하다’는 말이 나오지만 헬라어는 각각 다른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7절의 ‘머물다’는 단순히 여장을 푼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반면에 5절의 ‘유하다’는 영구적인 거주와 온전한 연합을 뜻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식탁을 같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조건 없이 친구로 받아들인다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그와 더불어 단순히 식사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나는 너와 교제하기 원한다’ ‘나는 너를 내 사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이라는 단어는 구원의 현재성과 긴박성을 나타냅니다. 삭개오가 급히 내려온 것은 그러한 주님의 거룩한 초청에 즉각 응답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즐거워하며 영접하는’ 행동은 뜻밖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순수한 기쁨과 감격을 표현한 것입니다. 삭개오의 행동은 구주를 만난 죄인들의 기쁨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삭개오가 자기 집으로 가는 장면을 상상해보세요. 키가 작은 삭개오가 맨 앞에 서서 신이 나서 걸어갔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주님과 제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 들이고 정성껏 대접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면서 삭개오는 지난날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집단 따돌림, 차가운 시선, 쌓였던 마음의 상처가 한 순간에 치료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시는 구나. 감격의 눈물까지 흘렸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화목하시기 위해 친히 마련하신 길입니다.
수군거린 무리 (7절)
은혜의 현장 이면에는 언제나 인간의 편견과 시기심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을 본 무리는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며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주님을 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만, 자신들이 미워하는 세리장 삭개오가 구원의 혜택을 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경건한 자나 평범한 죄인은 구원받을 수 있어도, 삭개오 같은 악질적인 죄인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의 수군거림을 다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삭개오에 대한 사회적 정서에 구애받지 않으셨습니다. 한 영혼을 향한 주님의 관심과 구원 사역에는 차별이나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교만한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등을 돌리시지만, 자신이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며 긍휼을 구하는 상한 심령을 은혜를 베푸시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세상이 손가락질하고 정죄할지라도, 주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끝까지 찾아내어 다가가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 취급하며 조롱하지만 주님에게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일뿐입니다.
회개한 삭개오 (8절)
주님을 집으로 모신 삭개오는 식탁 교제를 나누며 천국 복음을 들었고, 진정한 부요함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인격적 touch를 경험한 삭개오의 마음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평생 동안 돈 모으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며 움켜쥐기만 했던 그가 예수님이라는 보화를 발견하고 보니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삭개오는 주님이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벌떡 일어나 놀라운 결단을 선포합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개역성경은 ‘주겠다’와 ‘갚겠다’가 미래시제로 되어 있지만 원어에는 모두 현재형입니다. 이 고백은 미래의 다짐이 아니라 ‘지금 당장 행하겠다’는 강력한 결단입니다. 소유의 전부가 아니라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한 이유는 속여서 빼앗은 것을 배상하는 데 나머지 절반을 써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양을 도둑질했을 경우 네 배로 갚도록 규정합니다(출 22:1). 또 레위기 6:5과 민수기 5:6~7에 따르면, 죗값을 배상할 때 본래의 금액에 5분의 1일 더해서 갚아야 합니다. 삭개오의 결단은 일반적인 원칙보다 훨씬 철저한 배상으로, 그가 온전히 회개했음을 보여 줍니다. 자신의 소유 절반을 구제에 쓰고 나머지로 배상하고 나면 그에게 남는 재산은 거의 없게 됩니다. 물질의 노예였던 그가 이토록 철저하게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제대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말로만 끝나는 지적 동의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구조를 바꾸고 물질에 대한 청지기적 사명을 회복하는 구체적인 삶의 열매로 증명됩니다.
구원을 선포하신 예수님 (9~10절)
삭개오가 과거에는 세리장으로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토색한 세상 재물을 쌓는 것으로 기뻐하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 세상 재물을 버리는 것으을 도리어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재물로 인해 근심걱정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하나님 안에서 평강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삭개오의 극적인 변화를 보신 예수님은 그에 대한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오늘’은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머무신 날인 ‘오늘’(5절)과 같은 날입니다. 따라서 이 선언은 삭개오가 회개한 날에 구원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 선언은 재물을 바쳤기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는 행위 구원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회개한 심령에게 주어진 구원의 확증이며, 구원의 외적 열매가 삶의 변화로 나타났음을 주님이 보증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던 삭개오를 향해 ‘아브라함의 자손’ 즉, 언약의 백성이자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라는 영적 정체성을 알려 주셨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삭개오 이야기 외에도 어리석은 부자 비유(12:16-21),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16:19-31) 등 부자나 부에 관련된 비판적인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얼핏 보면, 부자들은 구원받기 어려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특징이 복음의 보편성임을 고려할 때, 복음이 가난한 자들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맥락에서 ‘회개한 부자’인 삭개오가 구원받은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됨을 보여줍니다. 삭개오는 전에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찾으셨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참된 인생의 길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는 것’임을 밝히십니다. 예수님이 부르시는 자들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이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 서서 긍휼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삭개오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과 오래 참으심, 그리고 찾아오시는 전적인 은혜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은 삭개오가 올라간 돌무화과나무마저도 그와의 만남을 위해 오랜 세월 동안 자라게 하시고 돌보셨을 만큼, 우리의 구원을 세밀하게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도무지 받을 수 없는 구원을 얻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크게 감사하며 이제는 우리 소견에 좋은 대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세
오늘 우리는 돌무화과나무 위에서 시작되어 식탁의 깊은 교제로 완성된 예수님과 삭개오의 사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지 이천 년 전 여리고에 살던 한 세리장의 성공담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간, 거친 세상 속에서 상처받고 공허해하며, 영적인 작은 키 때문에 주님을 보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어떤 결단을 촉구합니까?
-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삭개오가 세리로서 저지른 죄를 생각한다면 그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키는 작고 주변에 사람들은 많았으나 주님 만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체면도 내려놓고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 정말로 주님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도 주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신앙의 진보를 막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바쁜 일정, 돈, 건강, 자녀 문제, 세상의 염려가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죄와 열등감과 죄책감, 치유 받아야할 상처와 아픔, 이 모든 것들을 문제 해결의 근원이신 주님께로 가지고 가야 합니다. 삭개오처럼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정이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면 주님께서 찾아와 만나주십니다.
- 예수님을 만나고 가치관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란 단순한 지적인 동의나 죄에 대하여 슬퍼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된 삶을 청산하고 의지적으로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삶으로,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나를 만족시키기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들은 역동적인 변화와 치유, 회복을 경험합니다. 삭개오는 자기 일에 대한 죄책감과 외모에 대한 열등감으로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자 생각과 말과 행동과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삭개오가 처한 환경은 달라진 것이 없었으나, 그렇게 움켜쥐려 했던 재물을 이제는 과감히 나누는 청지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소유, 명예, 외모, 자존심의 굴레로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삭개오의 변화가 은혜 받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의 삶을 드라이브했던 세상의 우상들을 내려놓고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말씀 중심의 삶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 잃어버린 자에게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도 이 세상에는 세상 헛된 것에 취하거나 문제를 알고도 헤어나지 못하는 인생이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없는 죄인을 찾아와 죄 사함과 구원을 베푸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전에는 주님이 직접 이 일을 감당 하셨으나 주님은 부활 승천하시면서 이 땅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는 사명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세상 속에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늘의 상급이 큽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나가면서
본문은 소외되고 손가락질 받던 한 사람이 생명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어떻게 변화를 겪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삭개오는 사회적으로 ‘세리장’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었고, 남부럽지 않은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세상의 그 어떤 물질로도, 지위로도 채울 수 없는 깊은 영적 공허함과 죄책감, 그리고 인간관계의 깨어짐으로 인한 극심한 소외감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요,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던 삭개오를 향해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며 다가오신 주님의 시선이 머물던 그 자리가 바로 구원의 현장이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가정에 머물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교회에 머물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일터에 머물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왕으로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과의 사귐이 회복되면 삶이 회복됩니다. 가정이 회복됩니다. 교회가 회복됩니다. 예배가 살아납니다. 기도가 살아납니다. 사랑이 살아납니다. 변화된 우리를 통하여 또 다른 삭개오들이 주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세파에 깎이고 무뎌진 심령의 초점을 다시 한 번 십자가의 사랑에 맞추시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감격 속에 우리의 생을 주님을 향한 사랑의 불꽃으로 태우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삭개오처럼 주님을 간절히 찾고, 예수님을 깊이 만나며, 그분과 동행하며,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