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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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8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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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눅 18:31~43



 

6/28/2026(주일예배)

18:31~43 보기를 원하나이다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3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 대

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본문은 이야기체로 되어 있기에 성경 속의 장면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려보면 훨씬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내가 실제로 그 자리에 있다면 어떻게 할까, 내가 감독이라면 이 장면을 어떻게 연출할까 하며 접근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수많은 무리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 행렬의 중심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계십니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은 바로 '여리고'입니다. 여리고는 과거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무너뜨렸던 승리의 성읍입니다. 히브리말로 ‘여호수아’는 헬라말로 ‘예수’, 즉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1400년 전 여호수아가 활약했던 그 여리고에, 이제 진짜 구원이시며 율법의 완성이신 또 다른 여호수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유대 땅까지 여행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해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동편을 따라 내려오셔서 요단강을 건너시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시험산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공생애를 마무리 짓기 위해 예수님은 같은 코스로 내려오셔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요단강 서편에 위치한 여리고는 예루살렘의 관문입니다. 이번 여정은 십자가를 지시며 공생애를 마무리 짓기 위함입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인가?’ 이것이 누가복음 18장 전체의 주제입니다. 세상 사람의 가치관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을 과시하는 바리새인보다 죄인임을 고백하며 애통해하는 세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어른들의 부속물이나 성기신 존재 정도로 생각하던 당시 사람들의 편견을 깨뜨리시며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라 하셨습니다.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유대인들의 구원관에 도전하시며 하나님을 절대 의존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계명은 어려서부터 잘 지켰다고 자부한 부자 관리는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재물과 가족을 버리고 주를 따른 자들은 훗날의 영광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의 구체적인 수난 예고와 여리고의 맹인이 치유 받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들과 여리고의 한 맹인의 대조적인 모습을 통해, 주님은 우리가 어떠한 믿음으로 주님과 사귀며, 어떻게 그분을 따라야 하는지 참된 제자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제자도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수난 예고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31~34)

예수님은 제자들을 따로 데리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표현이 9장부터 반복해서 나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가셔야 할 최종 목적지였고, 그곳에서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그런데 고난과 죽음의 길을 두려워하여 마지못해 가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이끌고 당당하게 올라가십니다. 세 번째 수난 예고는 예루살렘으로의 긴 여정 단락의 말미에 위치하면서 이제 곧 도달할 예루살렘을 바라보게 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병행 기사와 달리 누가복음에는 ‘인자에 관해 기록된 모든 것이 응하게 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인자에 관해 예언한 핵심 내용은 인자의 고난과 부활입니다(시 22:6~7; 사 50:6; 사 53:8~12, 호 6:2). 세 번째 수난 예고에서 예수님은 수난 당하실 과정을 이전보다 상세하게 묘사하십니다. ‘넘겨지다’는 동사는 ‘허락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인자가 넘겨지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허락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넘겨진다’는 것은 로마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겨 재판을 받게 한다는 뜻입니다. 누가는 ‘희롱하다, 능욕하다, 침 뱉다, 채찍질하다, 죽이다’는 다섯 개의 동사를 연속적으로 사용해서, 고난의 강도가 점차 커지는 것을 강조합니다. 희롱, 능욕, 침 뱉음, 채찍질 등은 예수님의 심문과 처형 과정에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의 무지에 대한 언급이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하나도 깨닫지 못했다’, ‘말씀이 감취었다’, ‘이르신 바를 알지 못했다’ 라고 비슷한 표현이 나열하며 제자들의 안타까운 영적 실상을 보여 줍니다. 말씀이 감취었다는 것은 주님이 일부러 숨기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감출 것을 왜 설명까지 하면서 드러내 놓으시겠습니까? 이는 제자들이 철저히 ‘자신의 상식과 욕망’에 기초하여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를 무찌르고 다윗 왕국의 번영을 회복할 정치적, 육신적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제자들 역시 주님과 3년 동안 먹고 자며 깊은 사귐을 가졌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영광의 자리에 대한 탐욕과 야망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눈은 열려 있었으나, 영의 눈은 철저히 감겨 있는 ‘영적 맹인’들이었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만을 구했기에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과 오래 함께 있다고 해서 반드시 주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당시의 제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주님과의 사귐은 단순한 종교생활이 아니라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예수님께 외친 맹인 (35~39)

마가복음 10:46과 마태복음 20:29은 여리고 맹인 사건의 발생 시점이 예수님이 여리고를 떠나실 때라고 기록하는데,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라고 기록합니다. 헤롯이 건설한 새 여리고 성이 옛 여리고 성과 함께 있었음을 감안하면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만나신 ‘한 맹인’은 마태복음에는 ‘두 맹인’으로(마 20:30), 마가복음에는 ‘바디매오’로(막 10:46) 약간씩 다르게 묘사됩니다. 누가의 관심은 맹인의 숫자와 그 이름에 있지 않고, 맹인이 예수님께 한 간청에 있었습니다. 그가 언제 어떻게 맹인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니 길에서 구걸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도 많은 사람들이 그 맹인 앞을 지나갔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게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주목하셨고, 예수님의 발걸음을 그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날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 것을 알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들이었습니다. 길가에서 구걸하던 한 맹인은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에서 평소와 다른 정황을 알아챘습니다. 맹인은 무슨 일인지 물었고,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예수’라는 이름이 당시에 비교적 흔한 이름이었기에 동일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 출신지를 따라 붙인 호칭입니다. 그의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앞을 지나간다는 것이 그의 일생에 다시 올 수 없는 기회였기에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어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나사렛 사람’으로 알았지만, 이 맹인은 예수님이 구약 성경에 예언된, 다윗의 혈통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실 종말론적 왕이자 메시아로 알아본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보지 못했고, 제자들처럼 주님과 친밀한 사귐을 가질 기회도 없었으며, 바리새인처럼 율법 지식이 해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에 관해 소문만 듣고서도 그분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이심을 알아보는 영적인 안목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의 탄생 기사에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몇 차례 묘사하고 있습니다(1:27,32, 69; 2:4,11). 또한 족보에도 예수님과 다윗의 혈연관계가 명백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3:31). 유대인들은 나단의 신탁(삼하 7장)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다윗의 자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스겔 37:24에서는 이 소망이 보다 더 구체화되어서 하나님이 통치하실 종말에 다윗 계열의 왕이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 예언되었습니다. 그 맹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가져올 메시아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다’가 과거명령형으로 되어 있으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는 ‘지금 당장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입니다. 시편에서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다윗의 기도를 반영합니다. 앞서 가던 사람들이 그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 마음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꾸짖다’와 ‘소리 지르다’는 미완료 시제입니다. 무리는 시끄럽다고 그를 계속 꾸짖고 맹인은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지금 당장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자기 인생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절대적 신뢰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간절함을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맹인 (40~43)

예수님은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당장 그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50에 의하면, 그 맹인은 자신이 걸치고 있던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다고 합니다. 거지에게 겉옷은 단순한 옷 한 벌이 아니라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보겠다는 열망이 있었기에 그 소중한 겉옷까지 팽개치며 주님께로 달려갔습니다. 그의 모습은 많은 재물을 포기할 수 없어서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던 부자 관리의 근심하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버림’은 제자가 되기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 중의 하나입니다. 주님께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습니까? 아직도 집착하는 옛 사람의 것이 있습니까? 보다 귀한 것을 얻기 위하여 덜 중요한 것은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말로만 듣던 예수님 앞에 섰을 때 그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벅찬 감격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요? 서서 기다리시던 예수님은 그가 다가오는 모습을 주욱 지켜보셨을 것입니다. 거지인지라 더럽고 냄새도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오는 자들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기쁨과 설렘으로 나아온 그에게 물으십니다.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주님이 그의 소원을 모르기 때문에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맹인의 직접적인 고백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위치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다시 한 번 강화시켜주고 더 나아가서 사람들 앞에 그분의 권능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는 마음의 소원을 진지하게 주님께 고했습니다. 연약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실 분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똑같은 질문을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 10:37) 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 맹인의 대답은 간결하고 명확했습니다. ‘눈 뜨게 하소서’라고 하지 않고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응답은 언제나 풍성합니다. 보기를 요청하였을 때 그는 기대하던 것보다 더 큰 것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제부터 볼지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십니다. ‘보다’가 과거명령형이니 지금 당장 보라는 것입니다. 보게 되는 것만도 감격스러운데 자기의 믿음을 인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습니다. ‘구원’은 이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육신적 치유’를 뜻하기도 하고 ‘영적 구원’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는 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받았습니다. 혈루증 걸린 여인도 예수님으로부터 동일한 칭찬을 받았습니다(8:48). 지금 누가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까? 제자들을 포함한 무리입니다. 맹인이 주님의 칭찬을 받을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뜻밖입니다. 제자들도 그들의 믿음을 인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신 이유는 제자나 무리도 맹인처럼 믿음이 있으면 주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맹인은 눈뜬 제자들이나 무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자기의 문제를 해결 받겠다는 열망과 예수님께 자신의 문제를 분명히 말함으로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주님의 치유의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그가 볼 수 있게 되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따르다’가 미완료시제입니다. 계속해서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치유를 받자마자 즉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것은 전례 없는 일입니다. 부자 관리에게 이러한 영적인 안목이 있었다면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여전히 무지한 제자들에게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백성이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길가에 앉아 있던 맹인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치유를 경험하고 길 한 가운데서 기뻐 뛰며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마지막으로 가시는 길에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러 가시는 길이었으나 그를 인하여 구원의 큰 기쁨이 넘치는 행렬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줄곧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이야기하실 때마다 그들은 영적 무지와 함께 속에 품은 야망을 드러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다 도망갔습니다(막 14:50). 맹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고 있었고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인해 치유를 경험하고 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뤄진 것입니다. 제자도의 핵심단어가 부름, 버림, 따름입니다. 그는 부름을 받았고 버릴 것을 버렸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열두 제자들보다 더 참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주님의 참 제자가 되려면

여리고 맹인 스토리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등장합니다. 그만큼 성경에서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그를 통해 제자도에 대해 어떤 교훈을 얻습니까?

- 믿음으로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여리고 맹인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이적, 능력 있는 가르침 등에 대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나사렛 예수가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그 맹인은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그분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근처를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무리의 웅성거림 속에서도 예수님은 멈추어 서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을 찾는 자들을 기쁘게 맞아 주십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예수님은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을 결코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바디매오를 무시했으나 예수님은 그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던 발걸음을 바디매오를 위해 멈추셨습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인데 천년만년을 살 것 같이 주님과 상관없는 삶, 무관심한 삶을 이제는 그쳐야 합니다. 믿음의 주시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가가야 합니다.

- 믿음으로 예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다가도 약간의 분주함이나 방해 때문에 쉽게 기도를 포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기도하지 않고 걱정만 하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 맹인처럼 기도를 방해하는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맹인은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반복해서 부르짖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할 때 작은 소리로 기도한다고 주님이 듣지 못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절박한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강청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지금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 중에 맹인과 같이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주님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된다는 자세로 응답이 임할 때까지 매달려야 합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마음에 합한 간구를 하는 자들에게 응답을 주기 원하십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그럴 때 문제가 해결될 뿐더러 영혼의 구원까지 체험합니다.

-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여리고 맹인은 눈을 뜨게 되자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이제 그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49절에서 ‘부르다’라는 단어가 세 차례나 반복된 것은 단순히 바디매오의 눈을 고쳐 주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를 제자로 부르셨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을 뜨게 된 것은 큰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우리의 질병이 치유되고 어려움이 해결되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가 중요합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눅 9:62).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자는 더 이상 땅의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방해가 되는 이 땅의 것을 아낌없이 버립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 길이 바로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가면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그 나라로의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에 기초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그들이 영적인 맹인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반면에 여리고 맹인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임을 알아보는 영안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단순히 맹인의 눈이 열린 기적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은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한때는 죄 가운데 있던 영적 맹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맹인의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말씀을 통해 제시된 증거 중의 하나입니다. 맹인에게 나타난 믿음의 특징은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 주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 끈질긴 기도, 그리고 주님을 따름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제2, 제3의 여리고 맹인을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우리의 대답은 같아야 합니다. ‘주님, 제 영안을 열어 주옵소서. 십자가의 사랑을 더욱 알게 하옵소서.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주옵소서.’ 주님과의 참된 사귐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바라볼 때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사귐은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오늘도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부르짖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