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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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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1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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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눅 18:18~30

인간은 누구나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갈증을 안고 살아갑니다. 아무리 많은 부를 쌓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며, 도덕적으로 흠 없는 삶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문득 찾아오는 영적 허무함과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힘으로 감출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이민자의 삶은 더욱 그렇습니다. 낯선 땅에서 자녀를 키우고, 가정을 세우고, 재산을 마련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문득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내 영혼은 정말 만족한가?’ ‘나는 정말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살고 있는가?’ ‘내 삶이 끝나는 날, 나는 무엇을 붙들고 서게 될 것인가?’ 본문에 등장하는 ‘어떤 관리’는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부자였고, 관직에 오른 엘리트였으며, 어려서부터 종교적 계명을 단 하나도 어기지 않은 모범생이었습니다. 부족할 것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이 청년이 예수님 앞에 달려와 꿇어앉아 질문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은 역설적이게도 세상의 성취가 그의 영혼을 채워주지 못했음을 드러냅니다. 그는 이 영적 공허함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구원과 영생을 여전히 ‘인간의 노력과 행위’로 성취할 수 있는 ‘소유’의 개념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영생이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전인격적인 사귐’ 그 자체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바른 재물관과 구원관을 삶에 적용하며 영생을 확신할 뿐 아니라 주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관리의 질문 (18~21절)
그 동안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은 질병에 걸리거나 귀신에 들리는 등 문제가 있고, 사회적으로도 신분이 낮거나 소외된 계층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어떤 관리는 그들과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입니다. 같은 사건을 마태복음 19장과 마가복음 10장에서도 다루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재물이 많은 청년’으로, 마가복음에서는 ‘부자’로 소개됩니다. 세 복음서를 종합해보면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은 부자 청년이요 관리입니다. 더구나 그는 그저 세상의 것만을 목표로 삼고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보통 젊은이들과 달리 영생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는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까 고민을 하던 차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향해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르며 영생의 방법을 묻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저 훌륭한 종교 지도자나 도덕적 스승 정도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영생도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다는 오해를 하였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공적을 쌓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영생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을 반영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이 말씀은 단순한 언어 교정이 아닙니다. ‘너는 정말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응답하시며 선함의 본질적 근원이 오직 하나님께 있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청년이 예수님을 단순한 ‘선한 인간 선생’으로 깨닫는 한 결코 영생의 비밀을 알 수 없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바르게 아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도덕을 가르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지키지 못한 율법을 완전히 이루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심판을 대신 받으시는 ‘하나님 자신’이요 ‘구원자’이십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십계명 중 다섯 번째 계명에서 아홉 번째 계명까지를 열거하십니다. 언급하신 계명들의 순서는 7계명(간음 금지), 6계명(살인 금지), 8계명(도둑질 금지), 9계명(거짓 증언 금지), 그리고 5계명(부모 공경)입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1~4계명을 제외하고 이 계명들만 언급하신 것은 이것들을 지키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 아님을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에 관리는 어려서부터 이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그는 아마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지 모릅니다. 율법의 본래 의미는 instruction, 지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주신 지침입니다. 그 지침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다는 점입니다. 율법의 규정된 계명을 대부분 지키고 한 가지만 못 지켜도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죄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행한 종교적 행위의 껍데기를 벗기시고, 그가 하나님과 진정으로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질문하고 계십니다.

근심하는 관리 (22~23절)
계명을 잘 지켰다고 자부하는 청년의 중심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겉으로 계명을 잘 지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는 재물이 자리하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만약 계명을 잘 지키는 것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수님은 그에게 더 노력해서 계명을 완벽하게 지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명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재산 목록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 보좌에 누가 앉아 있는지를 드러내십니다. 그의 영적 실상을 정확히 진단하신 예수님은 그에게 맞는 처방을 주십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예수님은 그에게 단지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팔다’는 과거명령형이니 네 소유를 당장에 다 팔라는 것입니다. ‘주다’도 과거명령형이니 가난한 자들에게 당장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따르다’는 현재명령형이니 나를 계속해서 따르라는 것입니다. ‘와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제자로 부르시는 결단의 요청입니다. 지금까지 청년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제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은 9:23에 언급하신 제자도를 정확하게 반영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가진 것을 다 팔라’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에 해당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와서 예수님을 따르라고 합니다. 십계명의 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따라서 자기 재물을 이웃과 나누는 일은 곧 십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소유 포기에 이어지는 추가 요구 사항이라기보다 영생을 상속받은 사람에게 주어진 기회요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위로를 받고 치유를 받고 삶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혈루증 걸린 여인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 병을 치료받았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주님이 찾아가시니 다시 살아났습니다. 사람의 낯을 피해 뜨거운 낮에 물을 길던 수가 성 여인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새롭게 인생의 의미를 깨달으며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왔던 아버지는 주님을 만나고 나서 믿음을 가지게 되고 자기 아들은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관리는 주님을 만나고 나서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기는커녕 도리어 마음에 부담을 안게 되었습니다. 그는 큰 부자였으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했습니다. 그가 예상하지 못한 권면이었지만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예수님의 권위와 진정성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올 때의 자신감은 사라지고, 진리를 행할 수 없는 무력함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가 입술로는 영생을 구했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사실 그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던 진짜 주인은 ‘재물’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엄청난 부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기로에 섰습니다.

부자와 하나님의 나라 (24~27절)
마가복음에서는 부자 관리가 슬픈 기색을 띠며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하는데, 누가복음에서는 그가 여전히 예수님 곁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근심하며 머뭇거리는 그를 향해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관리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서술하신 말씀이고, 모든 신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만한 하나의 원리입니다. 그 관리가 ‘영생을 얻는다’(18절)라고 한 것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24절)라고 표현하고, 제자들은 그것을 26절에서 ‘구원을 얻는다’라고 바꾸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누가는 ‘들어가다’에 해당하는 동사를 미래형으로 사용하지 않고, 현재 직설법으로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 나라는 미래에 들어갈 곳이기도 하지만, 현재 들어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 관리는 자신에게 재물을 주신 분보다 재물 자체에 더 높은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재물을 가진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낙타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장 큰 동물이고 바늘구멍은 유대인들에게 아주 작은 구멍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부자는 낙타와 대비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에 대비됩니다. 재물에 집착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생의 기준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에서 ‘듣는 자들’은 제자들을 지칭하는 표현이고, 관리도 포함됩니다. ‘그런즉’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제로 한다면’이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부(富)를 하나님이 주신 의로움과 복의 증거로 여겼기에,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고 반문합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인간의 종교적 노력과 복의 기준이라 알려진 재물도 구원받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탄식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위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구원은 사람의 소유나 도덕적 행위, 결단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 영역에 속한 것이며, 오직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이 할 수 없는 그 일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신 구원의 주권자이십니다. 어린아이처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헌신과 보상 (28~30절)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자신들은 그 관리가 버리지 못한 재물과 가족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고백합니다. 그 안에는 은근한 공로 의식이 섞여 있었지만, 주님은 그들의 헌신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주님과의 사귐을 위해 대가를 지불한 자들이 누릴 풍성한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버린다’는 것은 윤리적인 방임이나 가족에 대한 혐오가 아닙니다. 삶의 우선순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과 그분의 나라를 그 어떤 세상의 가치보다 ‘최우선’에 두는 영적 결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첫 번째 보상은 ‘금세에 여러 배’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복주의적인 물질의 복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영적 가족(형제, 자매, 부모)을 얻게 되며, 주님 한 분만으로 온전히 만족하는 영적 부요함을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열두 명의 제자들로 시작되었는데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는 120명이 됐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다가 오순절에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외치니 하루에 3000명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사도행전 4:4에는 믿는 남자의 수가 약 5천이나 되었다고 하면서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놀랍게 늘어난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과 같은 사도들의 전도를 인해 복음이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까지 전파되어 많은 결신자들이 생겼습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인 영적 가족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살 때도 고난은 있지만 결국은 우리의 삶이 풍성해집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4). ‘풍성하다’는 것은 단순히 부자가 되거나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주 안에서 참된 만족과 평강을 누리는 삶을 말합니다. 두 번째 보상은 ‘내세에 영생’을 받는 것입니다. 앞서 관리가 그토록 갈망했으나 소유하지 못한 영생이, 주님을 위해 자기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보장되어 있습니다. 주님과의 사귐을 위해 세상의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결코 썩지 않을 하늘의 영원한 보화 자체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의 자세
버릴 것은 버릴 줄 알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며 영생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올바른 재물관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나온 관리는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영생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다고 자부했던 그가 재물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이 주신 재물을 이웃과 더불어 나누지 못했습니다. 청년이 이해한 영생의 가치는 그의 재물보다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였습니다. 물론 그에게 하셨던 예수님의 명령이 모든 부자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그의 경우는 재물에 대한 집착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데 걸림돌이 되었기에 그것을 언급하셨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재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일을 하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주신 재물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사용하는 가가 영생에 들어가기 위한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이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재물뿐이 아니라 시간이나 달란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을 잘 관리하는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 올바른 구원관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원자요, 심판자이십니다.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고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산 장사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서라도 얻어야 하는 귀한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전에 의지하고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그 자리에 모시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물론 삶의 주인을 바꾸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쉽지 않습니다. 과거의 나와 단절하는 것이며,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들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들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을 주인 삼으며 그분을 따라갈 때 영생을 얻게 됩니다.
- 올바른 동기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기는 했지만 베드로의 말 속에는 보상에 대한 기대가 들어 있음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버릴 때 그 동기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방해하거나 지체시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됩니다. 관리의 경우는 그것이 소유욕이었습니다. 그‘한 가지 부족한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때 주님과 동행하게 되고 비로소 영생을 소유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좇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보다 가치 있고 영원한 것을 놓치는 어리석음이 없어야 합니다.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모든 것을 버리고 제자의 길을 걸어갈 때 하늘의 보상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6은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입니다. 베푸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릴 때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게 됩니다.

나가면서
하나님 나라에서 과연 누가 진정으로 부요한 사람입니까? 세상의 재물과 스펙을 많이 소유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 손에 쥔 소유를 기꺼이 내려놓고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주님을 온전히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편안한 삶을 누린다 해도, 우리 영혼 깊은 곳의 공허함은 세상의 것으로 절대 채울 수 없습니다. 이 영적인 굶주림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주님이 부어주시는 십자가의 사랑, 그리고 주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질문하십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 부자 관리에게는 그것이 재물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 주님과의 깊은 사귐을 방해하고,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길을 지체하게 만드는 ‘그 한 가지 부족한 것’, 우리 마음의 보좌를 차지하고 있는 우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돈일 수도 있고, 세상의 평판일 수도 있으며, 자녀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나 포기하지 못하는 나의 자존심과 옛 사람의 습관일 수도 있습니다. 영생은 우리가 무언가를 소유하거나 종교적인 행위를 열심히 쌓아서 얻어내는 ‘보상’이 아닙니다. 영생은 삶의 우상을 내려놓고,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진짜 주인으로 모셔 들이며 그분과 나누는 ‘전인격적인 사귐’입니다. 자기가 쥐고 있는 것을 움켜잡으려다가, 눈에 보이는 잠깐의 가치를 좇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고 가장 가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결단과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은혜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제 삶의 우선순위를 그리스도께 맞추어 조정해야 합니다. 각자에게 부족한 그 한 가지 우상을 과감히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면서, 금세에 주시는 영적 공동체의 풍요함과 평강을 누릴 뿐만 아니라 내세의 영원한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참된 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